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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영화사회학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컨설팅을 했고,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면서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기획이사로 활동 중이다.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 「김경욱의 시네마크리티크」를 연재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2012), 『한국영화는 무엇을 보는가』(2016), 『영화와 함께 한 시간』(2022) 등이 있다.
- 나의 선택을 고통으로 남기지 않기 위한 여정 - <면접교섭>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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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택을 고통으로 남기지 않기 위한 여정 - <면접교섭>
송아름(영화평론가)
‘아이를 위해 평생을 참았다’, ‘아이에게 나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와 같은 말들은 부부가 이혼을 고려할 때 아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이혼으로 귀결되든 그렇지 않든 더 이상 부부의 연이 닿지 않을 때, 당사자가 아닌 아이는 이 알리바이 속에 보호된 듯 보이기 쉽다. 그러나 부부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늠하며 아이를 놓치지 않았다 해도 아이는 더 이상 전과 같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없다. 아이들은 매일 보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쉽게 보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보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듣는 일이 잦아진다. 이 사이 아이는 혼란을 겪으며 자신의 어느 편에 서야 할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다큐멘터리 <면접교섭>은 바로 이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단순히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을 찬찬히 짚어나간다. 특히 이 중심에 법적 의무가 없는 ‘면접교섭권’이 어정쩡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것이 이혼가정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두 아빠를 통해 설명한다. 초등학교 3학년 딸이 있는 김재훈 씨는 누구보다 딸과의 만남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이가 오면 사주고 싶은 물건들을 미리 골라두고, 거리가 얼마가 되든 어떤 상황이든 아이만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감수한다. 청주로 아이를 만나러 가는 배문상 씨는 어렵게라도 아이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김재훈 씨와 상황이 다르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온 아들은 아빠를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외운 듯 오지 말라는 소리를 반복하며 돌아선다. 아이의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는 아이를 쫓아가며 보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외치지만 아이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아빠와 멀어진다.
두 아빠는 모두 현재 비양육자로 면접교섭을 통해서만 아이를 볼 수 있다. 양육자의 선택은 객관적인 환경을 고려하기보단 아이의 선택에 맡겨지는 경우가 다수이며, 아이에겐 엄마가 필요할 것이라는 인식이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결국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자라게 될지에 대한 전문가의 시선은 배제되고 아이가 조금이라도 친숙하거나 혹은 안타까워하는 이를 양육자로 선정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주 양육자를 어떤 이유로 정했건 간에 이 자체로 주 양육자는 권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아이를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비양육자를 좌지우지할 수 있으며, 이 사이 아이들은 양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두 아빠가 면접교섭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정확히 이 경로를 관통하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한 부모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부모따돌림은 아이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미워해야 하는 상황 속에 아이를 놓이면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면접교섭>은 두 아빠의 고난을 보여주며 양육비는 법적 의무이면서 면접교섭권 이행이 그렇지 않다는 것 사이에 녹아든 편협한 사고, 즉 아이의 양육이 물리적 자원만으로 그 기반을 구성할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을 꼬집는다. 아빠가 빨리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며 울며 전화를 걸어온 아이의 그리움이나, 마치 외운 듯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아빠를 거부하는 아이의 불안은 결코 양육비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어 <면접교섭>은 아이들이 느낄 그리움과 혼란 그리고 슬픔이 정서적 학대가 될 수 있다는 점까지를 설명하려 한다. 배문상 씨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아이가 학대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도움을 구하고자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에 가입한다. 그가 느낀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없을 만큼 끔찍한 학대를 당하는 아이들이 많고 결국 세상이 바뀌어야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볼 수 있을 것이란 깨달음이었다.
사실 학대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비양육자를 만나지 못하는 것과 학대를 연결짓는 것을 의아하게 만들지 모른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목도했던 아동학대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알려진 사례가 다수였고 만약 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면접교섭권 불이행으로 인한 문제는 다소 가벼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양육비와 면접교섭권 이행에 대한 시선이 그랬던 것처럼, 물리적 폭력과 정서적 결핍의 경중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유효한지 이 작품은 되묻고 있었다. 특히 한 아이가 양육자에게 제대로 양육되지 못한 채 비양육자의 시선까지 차단당한다면 고립된 아이는 정서적 학대를 넘어서는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면접교섭>은 아이들이 경험할 어려움을 마치 저울로 재듯 구분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 할 문제들을 던지고 있었다.
<면접교섭>은 아직도 정말 이 상황을 학대로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질지 모를 이들에게 작품의 말미 이혼가정에서 자란 이들의 인터뷰를 배치하여 답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엄마 아빠라 부르던 이 중 한 사람이 갑작스레 사라진다. 그것만으로도 힘든데 양육자의 주변인들은 자신이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계속 깎아내린다. 그가 나쁘다는 것도 밉다는 것도 다 알지만 결국 그는 내가 그리워하는 엄마이거나 아빠이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인 결핍으로 문득문득 나를 괴롭힌다. 자신이 느꼈을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던 인터뷰이의 떨리는 목소리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괴로웠을 많은 이들의 아픔을 대변한다. 이렇게 <면접교섭>은 이 누적된 아픔이 어떤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겹겹이 싸여 있던 문제들의 결과인지를 천천히 드러내며 변화해야 할 것들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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