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영화평론가 비평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평론글로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 여성 영화의 선구자들 <크리스토퍼 스트롱>, <댄스, 걸, 댄스>2019-09-03
-
폐허와 비석에 대한 기억 : 도로시 아즈너의 <크리스토퍼 스트롱>, <댄스, 걸, 댄스>
한창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똑똑해 보여요(You look very smart).” <댄스, 걸, 댄스>에서 주디는 마담 바실로바와 함께 스티브에게 가는 길에 모자를 쓴 바실로바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모자가 정말 그를 똑똑하게 보이게 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주디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여성의 꾸밈 노동이 강요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복장을 보고 ‘똑똑해 보인다’라고 말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보통 통념상 여성스러운 복장이 아니라 남성들이 하는 오피스 복장, 장식 없는 액세서리(안경과 같은 것)에 ‘똑똑해 보인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바실로바의 모자는 그런 복장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적’이라고 할 법한 장식 많은 모자다. 주디는 이 모자를 두고 ‘예뻐 보여요’라고 하지 않고 ‘똑똑해 보인다’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옷을 통해 자신의 말을 전하는 방식은 도로시 아즈너가 <여성용 패션>(1927)을 만들고 항상 바지를 입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즈너는 1940년에 <댄스, 걸, 댄스>를 만들었다. 아직 남성 중심적 시각이 많이 남아 있던 그때, 여성은 그저 남성의 보조적 존재이거나 핀업걸에 머물던 그때(이건 미국 TV 시리즈 <매드 맨>에서 잘 드러난다), 아즈너는 잘 어울리는 복장을 한 여자가 흔히 들었을 법한 말을 전혀 다른 것으로 전유한다. 그것은 강요된 것을 뒤집는 발화다. 그런 만큼 도로시 아즈너의 영화 속 대사로부터 우리는 그의 세계를 읽어낼 단서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댄스, 걸, 댄스>는 무용수 주디의 이야기를 그린다. 주디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무용수로서 춤을 좋아하지만 클럽과 벌레스크를 찾는 남자들의 욕망을 채워주기에는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주디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해리스를 만난다. 해리스는 주디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너무 실재 같아요(You’re too real).” 실재 같다는 말은 환영적이지 않다는 말처럼 들린다. 환영이란 꿈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욕망이나 두려움에 매개되어 재현된다. 그렇다면 해리스의 말은 주디가 욕망이나 두려움에 매개되지 않은 대상이라는 뜻과도 같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버블스란 인물을 통해 좀 더 들여다볼 수 있다. 버블스과 주디는 조금 시간을 달리하여 한 무대 위에 선다. 하지만 주디는 버블스를 돋보여 주기 위한 들러리일 뿐이다. 아즈너는 버블스와 주디의 연기를 이어서 보여준다. 버블스의 퍼모먼스는 뛰어나다. 흔히 말하는 밀고 당기기 게임의 실력자로서 청중을 사로잡는다. 버블스의 무대는 시각적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요부의 이미지를 충만하게 재현한다. 하지만 그 무대는 그 이름처럼 거품과도 같다. 실재는 없고 환상만 존재하는 곳. 이와 달리 주디의 무대는 성적 판타지가 아니라 높은 예술적 감수성을 요구한다. 환상의 충족이 아니라 관객의 관조적이면서도 적극적인 감상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 예술의 자리마저도 읽게 한다. 단순히 욕망을 자극하고 채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물의 깊은 정서와 실재를 반영하고 사유하는 영화.
우리는 서사를 따라가며 주디에게 이입한다. 그리고 이 이입의 절정은 주디가 공연의 약속을 깨뜨리는 순간에 자리한다. 주디는 그저 수동적으로 청중의 반응을 무력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제 목소리를 내며 새로운 반응을 이끈다. 물론 이 순간에 이입하는 것 또한 소망을 실현하고픈 마음과 이어져 있다. 하지만 이 소망은 주류에 승인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에게 둘러싼 굴레로 향한다. 그것은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지만 모두가 숨죽여 동의할 수밖에 없는 뒤틀린 욕망을 폭로한다.
우리가 주디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순간은 주디가 자신과 동료들의 임금을 요구한 장면에서다. 그것은 단순히 음성으로서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목소리다. 그가 요청하는 돈은 그저 돈이 아니라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자의 목적의식이 담긴 수단이다. 주디는 돈에 관심이 없었다. 주디와 해리스의 스캔들이 기사로 나자, 버블스는 왜 해리스가 부자인 사실을 자신에게 알리지 않았냐며 다그친다. 주디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애초에 주디가 해리스에게 빠진 이유는 돈이라기보다 해리스의 관심에 있는 듯하다. 이런 관심에 대한 갈구는 언뜻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와 배치되어 보인다. 하지만 타자의 관심을 통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 도로시 아즈너는 그 마음을 긍정한다. 주체적으로 살면서도 사랑과 관심을 갈구해도 괜찮다는 말.
이러한 긍정에도 불구하고 아즈너에게서 연애는 인물의 최종 도달점이 아니다. 아즈너의 영화는 신데렐라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먼 곳으로 나아간다. 고급 예술 무용팀을 운영하는 스티브는 일견 백마 탄 왕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디는 왕자의 손길이 미치기 전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무대 위에서 꼿꼿하게 자신을 지킨다. 아즈너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 구조를 지워내거나 곧장 전복할 수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 구조 속에서 여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본다.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주디는 스티브의 연인으로 자리하지 않는다. 물론 주디가 나중에 스티브와 사랑하게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잠재적 가능성으로만 남겨진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크게 주디에게 남겨진 것은 진지한 무용수로서의 가능성이다.
연애로 수렴되지 않는 것은 <크리스토퍼 스트롱>에서도 마찬가지다. 1933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여성 파일럿 신시아와 명망가 크리스토퍼의 사랑 이야기를 담는다. 그들의 사랑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륜이다. 신시아는 연애보다는 자신의 비행기에 더 애착을 느끼며, 크리스토퍼는 한 가정의 충실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살아간다. 그런 두 사람의 사랑은 사회의 도덕률과 다툴 수밖에 없다. 이 도덕률을 말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시간을 알리는 자들이다. 크리스토퍼가 처음 등장한 장면에서 그의 아내 일레인이 그에게 왜 늦게까지 자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벌써 새벽 4시가 지났다고 말한다. 이는 신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시아의 가정부가 신시아에게 다가와 정해진 일정을 알린다. 그러면서 저녁 8시가 지났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처럼 크리스토퍼와 신시아는 비슷한 상황에 부닥치면서 신시아는 가부장의 위치에 있는 사람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돌봄 노동에 묶인 여성들을 상기시킨다.
도로시 아즈너는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자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댄스, 걸, 댄스>에서도 무용수들의 살림을 책임지는 가정부가 등장하고, <크리스토퍼 스트롱>에서는 크리스토퍼와 신시아의 집에 각기 돌봄 노동자들(일레인, 가정부)이 자리한다. 그들은 그 당시 여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지위를 알린다. 여기서 일레인은 이중으로 구속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신파적인 인물이다. 마지막에 최후를 맞이하는 신시아보다 더 신파적이다. 일레인은 가정사를 관장하는 돌봄 노동 수행자이면서, 새롭게 바뀌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딸과 유부남의 만남을 반대하는 것과 같이 사회의 도덕률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자신이 ‘촌스러운(old-fashioned)’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녀의 이중 구속은 이해하기 힘든 선택으로 이끈다. 크리스토퍼와 신시아의 만남에 상심하면서도 스스로 물러서며 그것을 용인하는 듯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레인의 신파적 위치는 한국의 신파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을 두고 벌어졌던 페미니즘 논쟁을 상기시킨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억압에 순응하는 여성을 보여줌으로써 전통적 여성상을 공공히 한다는 비판을 받은 동시에, 신파를 통해 여성의 억압을 역설적으로 노출시킨다는 지지를 받았다. 이처럼 <크리스토퍼 스트롱>의 일레인 또한 수동적 여성상으로 표상하면서도 그러한 여성상이 어떤 억압을 받고 있는지 상기하는 역할로 자리한다.
신시아는 억압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인물이면서도 자신의 결핍을 몸으로 체현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결핍은 미래를 예견하는 몸으로서의 여성을 드러낸다. 일레인은 신시아가 칸느의 빌라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이 시점에서는 아직 신시아와 크리스토퍼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 않은 단계다. 일레인이 그들의 연애를 지켜보기 이전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기에게 닥칠 무언가를 직감한다. 이는 그의 결핍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해 보인다. 그 결핍이란 ‘촌스럽다’는 말처럼 시대의 변화 속에서 자신이 아직 체화하지 못한 감각의 자리다. 자신에게는 없지만, 신시아에게는 있는 것. 주체적인 여성의 삶. 일레인은 이 결핍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뒤로 물러서기만을 반복한다.
앞날을 직감하는 신체. 신시아 또한 그러한 신체를 부여받는다. 신시아는 크리스토퍼에게 담뱃불을 붙여 준다. 그런데 그녀는 성냥불을 꺼뜨리지 않는다. 잠시 후 크리스토퍼의 담배에 불이 붙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꺼뜨리지 않은 불을 다시 담배에 가져다 댄다. 신시아가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은 단지 촬영의 용이성(두 번 불을 붙여야 할 필요가 없는 것) 때문으로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굳이 담뱃불을 두 번 붙이는 이유가 설명이 안 된다. 마치 그것은 담배불이 붙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그렇게 도로시 아즈너는 신시아와 크리스토퍼를 비슷한 위치에 놓은 것처럼, 신시아와 일레인 또한 비슷한 위치에 놓는다. 신시아 또한 일레인처럼 결핍되고 속박된 인물인 것이다. 신시아는 여성으로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지만, 모니카의 말처럼 그것은 평범한 연애를 누리지 못하는 삶이 되었다. 신시아와 일레인의 결핍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직감하는 예민한 감각이 된다. 신시아는 ‘약속할 수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크리스토퍼는 계속해서 약속을 요청하지만, 신시아는 자신과 크리스토퍼가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는 상태로 인식한다. 도덕률에 묶인 관계라는 점을 무엇보다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토퍼는 신시아의 그러한 인식과 발화를 자신에게 가두려고 한다.
신시아 또한 일레인처럼 속박된다. 사랑에 속박된 것이다. 신시아의 마지막 순간은 속박 속의 해방과도 같다. 그래서 더욱더 애처롭다. 도덕률과 윤리 의식, 사랑, 이 모든 것이 신시아를 옭아맨다. 도로시 아즈너는 신시아와 크리스토퍼의 정사를 신시아의 손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당시 검열에 의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굳이 검열이 아니더라도 탁월한 선택이다. 신시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는 신시아의 반지 낀 손을 향해 묻는다. 신시아는 그것이 문장(紋章, crest)이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용기는 죽음을 정복한다”하는 말이 적혀 있다. 그런데 신시아는 ‘사랑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사랑은 죽음을 정복하지 못한다는 말일까? 아니면 용기는 사랑을 정복하지 못한다는 말일까? 이 모호한 말은 우리에게 위의 두 가지 명제를 모두 생각해보게 한다. 마치 문장이 사랑의 절정(crest)이라는 말로 들리는 것처럼, 신시아가 ‘사랑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모두 읽힌다. 용기가 사랑을 정복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무리 용기가 있어도 사랑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 될 터이며, 사랑이 죽음을 정복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무리 사랑해도 최후를 피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전자와 후자 모두 신시아가 처한 운명을 예견한다. 신시아는 누구보다 용기 있는 여성이었지만, 결혼 제도와 도덕률의 굴레를 벗어나 사랑을 약속하지 못한다. 신시아는 크리스토퍼를 사랑했지만, 결혼 제도와 도덕률 안에서 그 사랑의 최후는 명약관화하다. 이러한 운명 속에서 신시아는 스스로 최후를 맞이한다.
신시아가 다른 선택을 하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 지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로시 아즈너는 신시아가 굴레를 벗어나는 만족스러운 마무리보다는 신시아를 둘러싼 굴레들을 정념화하고 그것을 마지막에 이르러 폭발시킨다. 처음에 신시아와 크리스토퍼가 비행기를 함께 탔을 때 영화는 그들이 날아가는 모습만 보여줄 뿐 땅에 도착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명백히 그것은 마지막 순간을 위한 생략으로 보인다. 함께 날아갔지만, 혼자서 꼬꾸라져 땅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여자의 운명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 추락과 폭발의 형상은 그 운명을 정서적으로 환기시키면서 앞으로 살아갈 여성들이 밟고 올라서야 할 폐허이자 비석이 된다.
도로시 아즈너는 초기 미국 영화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감독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줄곧 여성의 운명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운명은 <크리스토퍼 스트롱>과 <댄스, 걸, 댄스>의 여성을 속박하고 추락시키는 굴레를 바라보고, 남성 중심의 견고한 사회 구조 속에서 앞으로의 여성이 취해야 할 자세와 길을 제시한다. 아즈너가 바라본 사회로부터 꽤 많은 진보를 이루어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에 여전히 우리는 아즈너를 기억해야 한다. 용기가 죽음을 극복한다고 쓰인 신시아의 비석은 마치 아즈너의 비석인 듯 우리에게 기억할 것을 요청한다.
- 다음글 여성 영화의 선구자들 <어둠 속에서>,<히치하이커>
- 이전글 거장의 예외적 영화들 <바다의 침묵><몽상가의 나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