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평론가 비평

영화평론가 비평

오디오 해설 영화관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평론글로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여성 영화의 선구자들 <어둠 속에서>,<히치하이커>2019-09-03
여성 영화의 선구자들: 도로시 아즈너 & 아이다 루피노 2019.09.03(화)~09.18(수)

 

 

아이다 루피노, 앞에서 볼까? 뒤에서 볼까? : <어둠 속에서><히치 하이커>

 

 

이광호(부산영화평론가협회)

 

   할리우드 초창기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여성으로서 비교적 왕성히 활동했지만, 한국에서는 감독보다는 배우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이다 루피노의 영화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았으나 실질적인 연출을 얼마간 담당했던 작품까지 포함하면, 그는 총 8편의 극장 영화를 만들었다. 한 여인의 여정을 따라가며 내적인 고민을 바라보는 <낫 원티드>(1949), 소아마비에 걸린 여성 무용수의 이야기 <두려움 없이>(1950),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한 여성의 내면에 집중하는 <아웃레이지>(1950), 테니스 챔피언인 딸과 야심가 엄마 사이의 갈등과 주변 가부장을 그리는 <거칠게, 빠르게, 아름답게>(1951), 두 개의 가정을 차린 한 남성과 두 여인을 다룬 <이중 결혼>(1953), 수녀 학교에 입학한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천진함이 빛나는 코미디 영화 <천사들의 장난>(1966)까지. 물론 각각의 영화 안에서 아이다 루피노가 보여주는 독창적인 장기, 이를테면 그림자를 활용한 필름 누아르적인 표현 방식이나 남성 캐릭터에 대한 설정과 묘사, 트라우마를 간접적으로 형상화하는 빼어난 기술, 이에 더해 여성 캐릭터의 욕망을 표현하려는 시도 등은 각각의 영화들을 풍성하게 만든다. 하지만 언급한 6편의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지만) 여성이 서사의 중심부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나 외연적인 소재와 틀 자체만으로 손쉽게 '여성영화'라는 성급한 수식으로 영화가 지닌 힘의 완전함이 얼마간 무력화될 위험을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특징을 벗어나는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하나는 니콜라스 레이와 함께한 <어둠 속에서>(1951)이며, 다른 하나는 단독 연출한 <히치하이커>(1953)다. 두 편 모두 범죄와 폭력이 서사의 진전과 긴장을 만드는 중핵이 되고, 인물과 인물 사이의 갈등 혹은 한 인물의 심리적 고민이 이야기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아이다 루피노가 남성 중심의 장르인 필름 누아르적 표현에 큰 관심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편의 영화는 전면적으로 필름 누아르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전통성의 세부에 변칙을 주며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낸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두 영화가 다루는 여성적인 (특성과 인물 자체 두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캐릭터와 관련한 것이다.

 

   <어둠 속에서>는 약간 혼란스럽다. IMDB 상에서 니콜라스 레이와 공동감독으로 올라와 있는 현재, 어느 부분을 아이다 루피노가 연출하였고 어느 부분이 레이의 인장인지를 정확하게 알기란 어렵다. 하지만 이 불명확한 지점을 실증적으로 검증하고, 각각에 해당하는 부분들을 여성과 남성의 특징으로 구분 짓는 일은 대단히 고단하고 간편한 작업이며 결과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조금 도발적으로 말하면, 나는 아이다 루피노가 실제로 이 영화의 몇몇 연출을 맡았다는 사실이 거짓이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는 쪽이다. <어둠 속에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명민한 여성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이라기보다, 다시 말해 영화 바깥의 감독이라는 아이다 루피노보다, 이 영화 안에 배우로 현현하고 있는 아이다 루피노가 지니는 무게가 중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건 밤의 도시와 백주대낮인 시골의 전원 풍경이 공존하며, 그 시각적 차이와 함께 각각의 공간에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주어진다는 점, 그에 따라 1부는 필름 누아르, 2부는 멜로드라마처럼 구성되어 전반적으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는 특징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지적은 영화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니콜라스 레이의 뛰어난 시적 연출에 대한 찬사 이상을 말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몇몇 아름다운 빛과 그림자, 풍경의 이미지가 <어둠 속에서>를 풍성하게 만드는 요인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더욱 인상적인 것은 장르를 교란하는 두 명의 여성 캐릭터다. 서사적으로만 본다면 이들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관습적 인물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첫 번째는 전반부 범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짐이 만나는 여성이다. 필름 누아르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즉각적으로 이 여성 캐릭터를 숱한 범죄물에서 남성 주인공을 파국으로 이끄는 악녀, 팜므 파탈로 읽어낼 것이다. 그러한 관습을 차용하듯 이 여성은 금발에 검은색의 잠옷을 입고 나타나며, 순종적이기보다는 당당하게 짐과 대면하고 짐의 담배를 피우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여성을 통해 정보를 얻어낸 짐은 큰 방해 없이 범인을 검거하고, 그 과정에서 행한 과잉폭력으로 시골로 발령을 받으면서 이야기의 한 도막이 마무리된다. 말하자면 이 여성은 팜므 파탈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기존 누아르의 방식대로 기능하면서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관습적 캐릭터로 기능하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이 여성이 수행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제공자 이상이 아니다. 물론 그렇기에 이야기적으로 그녀가 주체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존의 팜므 파탈이 남성들의 비극적 서사를 위한 하나의 도구처럼 기용된 사례와 달리, 이 여성은 그러한 특징을 절반 정도만 갖춘 채로 어중간하게 스쳐 지나가며 남성 장르의 완성을 무마시키는 사실상 반항적인 인물이다.

 

   두 번째는 시골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범인의 누이, 아이다 루피노가 연기한 메리다. 흔히 이 시골을 배경으로 한 2부는 멜로드라마로 읽힌다. 다만 그것이 1부와 구별되는 시각적 차이, 즉 밤과 낮이라는 대비, 도시와 시골이라는 대비, 하나의 이야기가 종결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명시적인 차이들과 함께 자연스레 끌려 들어온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영화로 되돌아가보자. 우리가 이 영화의 시골 부분을 멜로드라마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다 루피노의 존재다. <어둠 속에서>가 1부와 2부로 구분된다고는 할 때, 그것은 공간의 변화나 짧은 에피소드의 종료라는 도식적이고 구성적인 지점에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두막에서 메리가 등장하는 순간부터다. 그 이전까지 짐은 여전히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의 입장에 있으며, 마을 주민의 차량을 탈취하여 추격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전반부에 보여주었던 다혈질적인 면모 또한 아직까지 갖추고 있다. 메리는 범인 대니의 누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지만, 사활을 다해 동생을 지키려고 하거나 짐의 수사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행동은 오히려 사소한 것들로 가득하다. 메리는 집에 찾아온 짐에게 차를 내어주고, 장작불을 피워주고, 외로움에 대해 묻는다. 내내 경찰로서 자신만의 정의(Justice)에 심취하여 모든 행동에 나름의 목적을 가지던 짐 윌슨은 비로소 어질러진 가구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메리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시간을 보낸다. 수사 상황에 어떤 변곡점으로 작용하거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메리의 역할은, 오히려 이후 짐이 동생 대니를 발견하고 그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범죄물로서의 장르적 재미를 '낮추는데' 기여한다. 그녀는 표면적으로 다분히 순종적이고 온화한 감성의 여인이라는 관습 하에 있지만, 오히려 범인 추적의 진행 서사 안에서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데, 오히려 그러한 특징 때문에 범죄물의 장르적 색채를 약화시키고 멜로드라마로의 전환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어둠 속에서>에 등장하는 두 여성은 얼핏 장르의 공식 속에서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범상한 인물이지만, 한 명은 팜므 파탈이라는 성질을 절반만 취하는 불완전한 흔적의 인물로 장르의 규범을 비껴가고, 다른 한 명은 서사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그 무관한 말과 행동으로 한 인물(짐 윌슨)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끝내 장르의 노선을 변화시키는 데에 이른다.

 

   아이다 루피노의 단독 연출작 <히치하이커>에는 여성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데, 어떻게 여성의 관점을 찾아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에서 여성이 부재함으로써 오히려 남성들의 이야기를 더욱 신선하게 풀어나갔다고 생각한다. 도입부 친절한 자막이 일러준 대로, 이 영화는 총과 남자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는 히치하이커 살인마가 권총을 들고 상대를 위협하는 하나의 조형적 형태가 아니던가.

 

   히치하이커 살인마가 목표로 삼은 차량 안에는 남성과 여성이 아닌, 건장한 남성 두 명이 타고 있다(설정 자체도 무척 흥미롭다. 그들은 어디로 가던 것일까. 두 남자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닐까?). 그런데 그들은 범인의 틈을 노려 기습할 계획을 꾸리지 못한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범인이 권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입각해 총을 남근의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영화는 권총이 그저 당장에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협적인 도구라는 것을 강조하며 직접적으로 총의 위협을 가시화한다. 사실상 이 살인범은 어떠한 카리스마나 비범함, 노련미를 갖추고 있지 않지만 그저 권총 하나로 악당의 자리를 배정받는다. 도입부 자막에서 이 영화가 총과 남성에 관한 것이라고 할 때, 그때 남성이라는 위치는 총보다 우월한 상위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총의 하부에 놓인다. 영화는 시종일관 총이라는 사물의 힘이 만드는 긴장으로 진행될 뿐이다. 중반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친구를 표적으로 세우는 범인의 장난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붙잡힌 두 남자 사이에 놓인 신뢰와 우정, 어쩌면 사랑일 수도 있는 감정선은 단숨에 무너진다. 순수하게 총을 다루는 능력만을 시험하는 이 단순한 놀이는, 총이라는 도구의 권능과 그 즉물적인 힘을 가감 없이 드러낼 뿐이다.

 

   말하자면 <히치하이커>에서 총은 종종 이야기 안에서 여성을 의식하여 남성들의 멋짐이나 마초적인 정신을 강화하는 은유적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격발 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물의 물리적 특성으로만 기능한다. 여성이 없는 범죄물, 바로 그렇기에 여기에는 남자들의 구차한 사랑이나 멋 부림이 없으며, 오직 생존을 위한 긴장만이 존재한다. 영화 속의 세 남자는 어떤 기세도 뽐내지 못하고 총 하나 때문에 이도 저도 할 수 없거나, 총 하나 덕분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조성한다. 경찰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자신이 인질로 잡은 남자와 옷을 바꿔 입는 범인의 선택은 교활하기보다 차라리 알량하다. 범인이 검거되는 마지막 장면, 경찰이 들이닥치자 길버트는 용기를 내어 범인을 제압한다. 이때 그는 손목을 가격해 마침내 권총을 범인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어떠한 추가 공격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범인 또한 매한가지다. 그는 반격할 수 없다. 거의 부가적인 신체처럼 기능하던 유일한 무기인 권총이 사라졌으니, 그저 상대를 황망히 바라만 볼 뿐이다. 통상적으로 격투장면의 흥미를 일으키는 가학과 피학의 쾌감 없이도 이처럼 흥미로운 순간을 만들어내는 영화는 드물 것이다.

 

   아이다 루피노의 <어둠 속에서>와 <히치하이커>는 표면적으로 남성의 장르를 드러내고 있지만, 두 영화에서 여성이라는 캐릭터는 절반으로 애매하게 놓여있거나, 극의 진행과는 무관하게 단독으로 존재하며 장르의 변주를 꾀한다(<어둠 속에서>). 혹은 여성인물이 보이지 않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할리우드의 남성들이 종종 여성과 호흡하며 선보이던 마초스러운 말과 행동이 일시에 행적을 감추고, 그들의 전유물이던 권총의 기능을 재구성하여 남성 캐릭터의 다른 면을 관찰한다(<히치하이커>). 아이다 루피노라는 여성작가의 작품이라는 정보, 서사에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주체적 여성상이나,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여성적 시선이라는 요소 없이도 여성의 시선을 감각하는 신기한 경험이다. 단순히 우리의 눈에 맺히는 시각적 정보와 외부적 사실에 기대지 않고 영화의 성질과 태도를 만들어내는 일은 동시대의 영화에서도 자주 만나기 힘든 경험이다. 두 편의 영화가 여성영화일 수 있다면, 그것은 카메라를 축으로 삼아 한 번은 카메라 앞에서 생생히 현존하고, 한 번은 카메라 뒤에서 창의적인 세계를 구축한 아이다 루피노의 힘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여성영화에 대한 아이다 루피노의 선구안은 단순한 영역의 개척을 넘어 그것을 영화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시도였으며, 그래서 더욱 말해져야 할 귀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다음글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클래식 코미디 '프레스턴 스터지스 감독론'
이전글 여성 영화의 선구자들 <크리스토퍼 스트롱>, <댄스, 걸, 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