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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959년으로의 여행 <히로시마 내 사랑>2019-11-26
Review 11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1959년으로의 여행 2019.11.16.(토)~11.20.(수), 11.26.(화)~12.05.(목)

 

 

고통의 육체적 현존: 도시의 이름으로 호명된 남과 여

 

심미성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뒤엉킨 육체 위로 잿빛 가루가 흩어진다. 이것은 얼마간 히로시마의 분진을 상기시키는 였다가, 이내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을 띄더니, 남녀의 등과 팔에 맺힌 의 형상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교차편집을 통해 히로시마에서 만난 프랑스 여자와 일본 남자의 문답을 동시다발로 묶는다. 이때, 히로시마의 10년 전 과거와 오늘의 잔해가 기록영화의 형태로 나열된다. 적나라한 사진과 재현된 영화, 생생한 박물관의 기록과 뉴스들은 여자가 히로시마를 보았다고 강변하는 근거가 된다. 그녀의 입으로 전해지는 많은 숫자들(이를테면 단 9초만에 생겨난 20만 명의 죽음과 8만 명의 부상자, 1만도에 육박하는 지면의 열기, 그녀가 박물관을 다녀간 4번의 경험)은 히로시마를 간명하고도 육중한 숫자의 기호로 압축한다. 그러나 이 문답은 시종 열리지 않고 닫힌다. 상념에 잠긴 여자는 히로시마의 고통을 보고 들었노라고 말하지만, 단호한 남자의 대답은 줄곧 당신은 히로시마를 보지 못했다로 귀결된다.

  히로시마에서 만난 두 남녀가 사랑하게 된 현재는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지 10년이 흐른 뒤다. 확실한 전쟁의 종식과 함께 스무 살을 맞이했던 여자는 이제 서른이 되었고, 지금 서른두 살의 남자는 10년 전에 가족을 잃었다. 여자에게는 십여 년 전 겪은 잊지 못할 과거가 있다. 고향 느베르에서의 기억이다. 기억은 그녀의 무수한 삶의 편린들 중에 남자가 택한 것으로서 현재에 부름을 받는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느베르에서 유년기를 보낸 여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 독일 병사와 금지된 사랑을 나눴다. 그 대가는 참혹했고 여자는 죽은 연인의 피를 핥으며 기억을 박제했다. 느베르라는 단서를 발견한 남자는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여자의 발길을 붙잡아 그녀의 과거를 듣는다. 느베르의 기억에 가까워질수록 남자는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느베르 덕분에 당신을 알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그의 표현대로, 느베르와 여자는 분리할 수 없는 무엇이다. 느베르가 곧 여자라고까지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느베르를 모르는 채로 이 여성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자신이 느베르의 고백을 듣게 된 유일한 남자라는 사실에 기쁨을 토해내기도 하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여자의 이야기는 시공간의 경계를 잃어간다. 과거형의 동사는 현재형과 뒤섞이고, 독일 병사를 향한 지칭어는 어느새 가 아닌 당신으로 바뀌어있다. 이야기를 듣는 남자도 마찬가지로 히로시마의 일본인이 아닌 느베르의 독일 병사로서 소임을 다한다. 이를 단순한 역할 놀이로 정의할 수는 없다. 느베르를 말하는 여자의 육체는 마치 현재와 과거에 모두 있는 것처럼 보이며, 좀 더 집요하게 말해 본다면 과거는 여자의 육체에, 정신에, 히로시마에, 느베르에, 모두 있다. 하물며 기억 자체의 불완전성을 여자는 모르지 않는다. 임의로 자르거나 버릴 수 없는 기억은 의지와 무관하게 심기고 사라진다. 저주하려 들수록 잊지 못하는 고통의 기억은 과거로 끝나지 않으며 현재에도 미래에도 지속된다. 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러운 기억만이, 그러므로 먼저 휘발된다. 여자는 이제는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면서도 고통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은 이 영속적인 과거, 영원한 고통을 담기 위해 영화적 수단을 동원한다. 카페의 음악(현재)과 느베르의 영상(과거)가 과감한 병치를 이루는 플래시백이 그 단서다. 과거와 현재는 분절되지 못한 상태로 끝없는 지속을 영위한다. 초점이 사라진 눈을 한 여자는 카페에서 호텔로, 호텔에서 거리로 이동하는 내내 과거와 함께 있다. 그녀의 걸음이 닿는 거리는 히로시마이자 느베르가 되고, 어쩌면 히로시마 위를 걷는 사람은 고통의 동의어로서의 느베르다.

  여자는 과거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면서 스스로 느베르를 말했다는 옛 연인에 대한 배신의 행위에 절망한다. 갈수록 깊어지는 그녀의 혼란은 두 개의 이별 상황에 중첩돼 있다. 히로시마에서 만난 남자와 앞둔 당장의 이별과 과거(느베르)와의 이별이다. 여자의 입으로 일컬어진 말들과 일컬어지지 않은 내면의 독백은 둘 중 어디를 향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려워진다. 히로시마의 남자는 그녀를 알게 될수록 그녀에게서 멀어지지 못하고 더 알기위해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여자의 이야기가 시작된 이래로 둘의 관계는 이전과 다른 모양이 되어 있다. 두 사람의 시선과 걸음은 숱한 불일치를 이룬다. 실제로 화면 속의 두 사람의 시선은 혼탁한 눈동자를 대체로 맞추지 않고, 먼 곳을 나란히 응시하거나 마주침이 발생하지 않는 인위적인 구도 아래에 있다. 걸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불일치가 거듭되자 질문이 생겨난다. 고통은 고통을 알아볼 수 있는가. 고통은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관해서라면 아마도 영화 전체가 부정 언어의 연속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애초에 영화는 히로시마의 폐허를 보았다는 프랑스 여자의 절절한 고백을 일일이 부인하는 일본 남자의 말을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히로시마 내 사랑>은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 너머의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알랭 레네는 그의 정신적인 유작이라고 말해도 될 법한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2012)를 통해서도 질문해 왔다. 본다는 것(안다는 것)에 대한 요원한 물음. 어쩌면 하나의 주제에 천착한 대가의 물음은 끝내 종료되지 못할 영원의 미결 상태로 남는다. 유일한 대답은 이 뿐이다. 타인은, 고통은, 나아가 어떤 세계는 개인의 눈으로 담지 못할 아득한 무엇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은 두 남녀의 만남을 통해 이 무엇의 주변부를 방황하는 자리에 관객을 앉힌다. 최종적으로 택한 영화의 결구는 그 대담성만으로 충격과 전복을 안긴다. 과거의 현존, 고통의 등가물로 존재하던 남녀의 눈이 (상징적 의미에서) 최초의 활기로 마주친다. 장 뤽 고다르가 이 영화의 트래블링(이동촬영)은 모럴이다고 말하기도 했던 <히로시마 내 사랑>의 카메라는 이 순간 남녀의 얼굴 가까이로 이동한다.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이름이 도시의 이름으로 호명된다. 남자의 이름은 히로시마, 여자의 이름은 느베르. ‘마주친 시선호명된 이름은 영화가 고통의 세계를 어루만지는 하나의 몸짓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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