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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클래식 코미디 '프레스턴 스터지스 감독론'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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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턴 스터지스와 스크루볼 코미디의 시대
김지연(부산영화평론가협회)
누군가에게 영화가 종교이듯 또 누군가에는 오락거리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나 역시 이를 인정하려고 애쓴다. 와작와작 팝콘을 먹거나, 지루해지면 휴대폰을 켜보고, 제대로 듣지 못한 대사가 뭐였는지 옆 사람에게 좀 물어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예의라는 이름으로 눈총을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장면에서 소리 내어 웃는 것마저 스스로 저어하고 있거나, 아무도 웃지 않는 순간과도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시네마테크의 엄숙주의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찰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의식(儀式) 중에 웃음이 불필요한 요소든, 다만 여력이 없든, 영화가 건네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건 아닌지. 나와 당신이 믿는 영화가 원하는 태도란 과연 그런 것일까? 물론 베리만, 고다르, 안토니오니의 영화 앞에서는 공손히 엎드리는 것이 예를 갖추는 길임을 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또 다른 성인(聖人)들이 있다. 이를테면 히치콕, 바르다, 봉준호 등 가사사대 결코 그러하지 않나니... 프레스턴 스터지스가 이와 같은 부류라는 건 그의 영화 한 편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오히려 그는 당신이 참지 못하고 웃기를, 이왕이면 포복절도하기를, 동행이 있다면 그 웃음 가운데 서로 눈을 마주치거나 한두 마디 나누기를 바랄 것이다. 관객 또한 1941년 <설리번의 여행>(1941)에서 보이는 영화관 풍경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소년은 호루라기를 불었고 잠에서 깼거나 놀란 아기가 운다. 어둠을 틈타 용기를 낸 동행이 슬그머니 당신의 손을 잡을 수도 있는 일이다. 부디 그가 당신이 좋아하는 상대였으면.
프레스턴 스터지스가 유능한 각본가로 활약했던 1930년대 중‧후반부터,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스크루볼 코미디의 연출자로 자리매김한 1940년대 초반은 할리우드 영화산업이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세계대전의 직‧간접적 영향이 미국사회 전반에 불안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가져왔지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영화관을 찾았다는 뜻이다. 영화의 역사는 이즈음을 스튜디오 시스템의 절정, 스크루볼 코미디와 뮤지컬의 시대라고 기록한다. 관객이 영화에게 구한 것과 영화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스터지스가 웃음이라고 대답하는 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부하게 들린다면 당신은 아직 그의 영화를 보지 못했다. 삶의 짐을 잠시나마 덜어주는 웃음의 숭고함에 대해서도 모를 것이다. 결국 이 말을 하려고 빙 둘러왔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가 요청하는 바에 따라 마음껏 웃어도 된다. 아니, 웃어야 한다.
스터지스의 영화는 장르의 단단한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서 부단하게 탈주를 시도한 흔적들이다. <설리번의 여행>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서 승승장구해온 주인공이 고난을 체험하는 데 그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에는 현실 세계를 외면한 채 밝고 활기찬 영화만 제작해오던 예술가로서 갖는 자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그리고 야바위꾼, 광대들을 비롯해 웃음을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배를 바치는 영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영화산업이 지속되는 한, 오프닝신의 풍자와 냉소에는 유효기간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영화에는 관객에 대한 사랑이 넘실거린다. 어디나 사람들이 모이고 천을 하나 드리면 스크린이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빛나는 얼굴들, 그리고 삶들이여. 그들의 모습이 담긴 장면들을 보면 설리번, 스터지스, 그리고 영화가 관객의 존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스터지스의 재치는 언제나 서늘한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발휘된다. “빈자들은 가난을 알아요. 부자들만 가난에 관심이 있죠.” 라고 시작하며 집사 버로우가 피력하는 가난에 대한 견해는 낡은 옷을 입고 다리를 절며 빈자를 흉내 내는 설리번을 향해 점잖지만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순간이다. <팜 비치 스토리>(1942)의 법과 질서를 깡그리 무시하는 사냥클럽 무리, <설리번의 여행>에서 행해지는 절세 목적의 위장 결혼, 남편의 경영매니저와 결혼하는 아내도 썩 도덕의식이 높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알다시피 서민이나 빈자들도 모두 착한 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따뜻한 손길을 내밀지만, 설리번은 퍽치기를 당해서 노역을 살며 진짜 고생을 겪는다. 또한 명색이 스크루볼 코미디의 주인공이, 미련을 뚝뚝 흘리면서도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어서 파산한 남편을 떠나기도 한다(<팜 비치 스토리>). 그런 것들은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스터지스의 인장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무엇보다도 <설리번의 여행> 중반, 설리번(조엘 맥크리)이 여인(베로니카 레이크)과 함께 무료 급식소와 샤워장, 부랑자 캠프 등을 누비며 빈자들의 세계를 구경하는 장면이 상기된다. 무성영화를 닮은 이 일련의 몽타주 후반부에,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숲길을 걷는다. 함께 모험을 겪는 동안 서로에게 의지하며 싹튼 동지의식 내지는 사랑이 그 산책에 이르러 증폭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음악과 달빛이 흐르는 밤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지나가던 그 횡축 트래킹숏에는, 명백히 목을 매단 자살자로 추정될 사람의 하반신이 걸쳐진 지점이 있다. 이를 발견한 자에게 그 장면이 마냥 아름다운 정조로 기억되는 건 힘들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 이상 시신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것이 빈자와 부랑자들의 일상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전시해 놓았을 뿐이다. 영화는 이 광경을 못 봤어도 좋은 것처럼 강조할 생각 또한 없다. 그런 식으로 영화는 제작자들의 입김과 검열을 통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사건이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려울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그리하여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봉합되는 것이 무릇 스크루볼 코미디의 기본이거늘. 발칙하게 <팜 비치 스토리>는 ‘그랬을까요…(or did they)?’를 덧붙이며 장르의 관습에 도전하는 기개를 펼친다. 영화는 영원한 사랑에 의심을 표시하며 시작하고, 또 그렇게 끝을 맺는다. 관계가 파탄 난 뒤에 다시 시작하는 서사는 일찍이 레오 맥커리가 <이혼소동>(1937)으로 보여준 적이 있으므로 낯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장르는 근본적으로 사랑과 결혼의 고결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여러 변형들을 시도해왔다. 그런 측면에서 스터지스의 인물, 설정, 사건들은 스크루볼 코미디라는 범주 안에 있더라도 꽤나 돌출적이다.
<팜 비치 스토리>에서 오프닝신의 영문 모를 결혼식 소동은 주요 서사의 흐름 안에서 내내 분리되어 있다가 결말부에 이르러서야 그 진상이 밝혀진다. 주인공 부부가 각각 쌍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결혼했어야 할 사람들은 톰(조엘 맥크리)과 제리(클로데트 콜베르)가 아니라 그들 각자의 형제들이었다는 말이다. 형제의 결혼 상대에게 반해버린 나머지, 톰과 제리는 당사자들을 대신해 식장에 나와서 부부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째서 나중에라도 그들의 형제들이 결혼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도록 하자. 어쨌든 톰과 제리는 다시 사랑을 확인하고 마지막에 진정한 의미의 결혼식을 올린다. 그렇지만 그들의 형제는 주인공들에게 반해버린 해켄세커 3세(루디 발리), 센티밀리아 공주(메리 애스터)와 결혼한다. 그러니 영화는 동종 장르의 영화들이 공유하는 가치를 여전히 위반하고 있는 셈이다. 2년 뒤에 내놓은 <모건 크리크의 기적>(1944)에서 결혼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다. 주인공은 지난밤 파티에서 진탕 취해버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군인과 결혼한 뒤 아침에 집으로 돌아온다. 게다가 곧 본인이 임신한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로 인해 주인공은 자기를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하려고 마음먹는다. 제작년도를 감안하지 않아도 파격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며 서사를 꾸려가는 자신감이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스터지스의 영화에서도 사랑에 빠진 이들은 모두 바보가 된다. 대표적인 예가 <레이디 이브>(1941)에 있다. 진(바바라 스탠윅)은 사기를 치려고 찰스(헨리 폰다)에게 접근했다가 그를 정말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찰스는 진의 정체를 알게 되고 매몰찬 거짓말로 그를 차버린다. 진은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그 복수란 허술해서 상대가 속아 넘어가는 게 이상해 보인다. 이브 스위드리치라는 영국 귀족 아가씨로 위장하고 찰스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얼굴에 점 하나 찍을 성의조차 없이 말투만 영국식으로 바꾼 채 말이다. 그래도 그가 속아 넘어갈 것이라는 자신감도 상대를 사랑하는 데서 온다. 찰스가 티끌만큼 의심도 없이 이브를 새로운 인물이라고 믿고 금세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두 여인을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거나 그 정도 계략에도 속을 정도로 어리석거나 그 어떤 이유라도 이 계획을 성립시키는 근원에는 이들 연인을 대책 없는 바보로 만든 사랑이 자리한다. 영화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 않은 먹시(윌리엄 드마레스트) 뿐인 것이 당연하다. “(이브와 진은) 향수까지 똑같은 걸 쓴다고, 이 친구야!!!” 하지만 이미 사랑의 노예가 된 남자의 귀에 그 말이 들릴 리 없을 것이다.
진이 찰스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다는 걸 시각화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그들의 계급과는 반대로 진이 파이크호에 처음 등장한 것은 누구보다 가장 높은 위치에서다. 찰스는 가장 낮은 바다 위에서 배에 오르려는 참이다. 뿐만 아니라 진은 식당에서도 거울로 등 뒤를 넘겨다보며, 찰스와 그를 둘러싼 세계를 자기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전능한 내레이터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찰스는 진과 만난 이후 언제나 추락의 연속이다. 넘어지거나 무릎을 꿇거나 어떤 식으로든 진의 발밑에 있다. 첫 만남에서도 찰스는 진이 내민 발에 걸려 넘어졌고, 부러진 구두 굽을 핑계로 진의 선실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는 무릎을 꿇고 진에게 신발을 신겨야 했다. 뱀을 보고 놀랐다는 핑계로 진이 찰스의 얼굴을 끌어안을 때, 정신이 혼미해진 그는 진에게 납작 눌리다시피 깔려있다. 진이 이브로 돌아왔어도 이들의 관계는 역전되지 않는다. 찰스는 2층 계단을 ‘내려온다’. 진과 똑같이 생긴 이브를 보고 크게 놀라서 앞으로 가면 소파에 걸려 넘어지고, 뒤로 가면 커튼을 밟아 넘어진다. 앉아있어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쟁반이 기울어지며 음식이 주르르 쏟아지니 그가 봉변을 피할 도리는 없어 보인다. 뱀만 알던 그의 삶에 진/이브의 등장은 재난 급이다. 그러니 멍청한 슬랩스틱은 모두 찰스의 차지다. 매력적인 여인 앞에 눈앞이 흐려지고 말을 더듬는 것쯤이야 기본이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에서 엘리(클로데트 콜베르)가 단번에 히치하이킹에 성공한 이래로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다리는 성적 암시의 대상이 된 것일까? 적어도 스터지스의 영화에선 남녀를 불문하고 그렇게 보인다. <팜 비치 스토리>의 제리는 다리 긴 여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고 직접 그 유용성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두 인물을 연기한 배우가 클로데트 콜베르, 동일인인 것은 우연일까, 스터지스의 계산일까. 또한 <설리번의 여행> 속 제작자들은 섹스신을 못 넣어서 안달 났지만, <설리번의 여행>을 만든 제작자들은 그런 걱정을 많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값 비싼 연출자의 무모한 여행에 순순히 동의할 수 없는 제작자들은 캠핑카로 그의 여정을 따르려 하고, 이에 도망치는 설리번을 쫓는 추격전만 봐도 그렇다. 집기들이 깨지고, 오븐이 열리고, 반죽 그릇에 얼굴을 묻으며 부엌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큰 재미지만, 그에 교차하여 앞 좌석에서 춤추는 여비서의 다리는 분명 눈요깃거리다. 여행에 따라나서는 여인(베로니카 레이크)도, 설리번의 다리 위에 버티고 앉아 같이 가자고 발버둥 치지 않았던가.
그런가하면 <팜 비치 스토리>의 제리는 남편을 떠나려 할 때마다 혼자서 벗기 힘든 드레스 때문에 톰의 다리에 앉게 된다. 이 상황은 반복되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레이디 이브>의 진은 더 노골적으로 다리를 이용한다. 그는 자신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리를 뻗어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찰스의 발을 거는 것이었다. 찰스를 사로잡기 위해 적극적인 애정 공세를 펼칠 때마다 찰스의 눈길이 닿는 곳 또한 진의 다리였다. 그는 일부러 다른 쪽을 보려고 노력하고, 진의 옷자락을 내려서 조금이라도 가리느라 진땀을 쏟는다.
사랑과 결혼은 시대를 지나오며 그 가치와 형태가 거듭 변화해왔다. 그렇지만 삶이라는 서사에서 일정 부분 그것들이 중요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이상, 스크루볼 코미디는 당대의 시공간을 초월하며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여자와 남자라는 영원한 타자들 사이의 관계는 21세기에도 풀리지 않는 연구과제가 아닌가. 장르의 구조를 따라 어찌어찌 모두가 행복한 결말로 갈 것을 알고는 있지만, 스터지스의 스크루볼 코미디는 그 길까지 어떻게 당도할 것인지에 관해 영화라는 이름 아래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하는 것 같다. 그래서 과장, 왜곡, 데우스엑스마키나 같은 한 방을 준비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 속 남녀들은 활력으로 가득한 대결구도 안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삶과 사랑을 운명이나 숙명의 그늘 아래에 그저 맡겨두고 따르지는 않는다. 약간의 우연이나 필연으로부터 촉발되더라도, 결국은 각자가 힘차고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거기에 달려들어 쟁취해낸다. 세련되고 통찰력 가득한 대사들도 그로 인해 더 빛난다.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보는 게 좋다. 스터지스의 영화와 사람들 속에서 나는 세상을 잊는 걸까, 그 안에서 세상을 찾는 걸까. 스터지스는 아무래도 좋다고, 다 중요한 거라고 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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