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당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사이트정보
home  > 영화  > 영화와 비평  > 영화평론가 비평

영화평론가 비평

오디오 해설 영화관



영화에 대한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 다양한 관점이 돋보이는 '영화평론가' 차별화된 평론을 만나는 공간입니다.
감독과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인 평론글로 여러분을 새로운 영화 세상으로 안내합니다.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클래식 코미디 <이지 리빙>2019-12-10
12월 시네마테크 기획전 PRESTON STURGES AND THE CLASSIC COMEDIES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클래식 코미디 2019.12.06.(금)~12.11(수), 12.15.(일)~12.25.(수)

 

 

사랑스러운 스크루볼 코미디: <이지 리빙 Easy Living>

 

장지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1937년작 <이지 리빙 Easy Living>은 프레스턴 스터지스 작가가 각본을 쓰고 미첼 라이슨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이지 리빙><그 밤을 기억하라>(1940)까지 미첼 라이슨과 프레스턴 스터지스는 두 편의 작품을 함께 했다. <이지 리빙>은 각본가 프레스턴 스터지스 특유의 수다스러움과 빠른 속도감을 통한 코미디 매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프롤로그 격인 첫 장면부터 화려함을 앞세우는 미첼 라이슨 감독의 미장센이 볼거리를 더하는 영화다. 우연의 연속으로 쌓아가는 스토리 전개는 언뜻 싱겁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정작 발생한 우연의 결과들이 매번 절묘하게 상황을 전환시키면서 영화는 리듬감 있게 나아간다. 그 연장선에 녹아있는 코미디와 놓치지 않는 시대와 인간에 대한 시선은 낯선 감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끼기 충분해 보인다.

 

 

슬랩스틱의 향연

 

  코미디 영화를 떠올릴 때 우선적으로 발견하는 몇 가지 효과가 있다. 그 중 하나로 많은 관객들은 슬랩스틱을 꼽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해롤드 로이드와 같은 몇몇 얼굴들을 기억해 낼 것이다. <이지 리빙> 역시 할리우드 고전기이자 코미디의 황금기에 걸쳐있는 영화다. 영화는 시작부터 직접적인 슬랩스틱을 주저하지 않는다. 기업인 제이 볼(에드워드 아놀드)의 등장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 엄격한 말투를 가진 미스터 볼이 집사들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상황이 이 영화의 첫 슬랩스틱이다. 계단을 구르는 볼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는 가정부와 굴러 내려온 그를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언어유희를 곁들여 식사 자리로 안내하는 집사까지, 이 과정에서 촉발되는 웃음은 슬랩스틱의 공식을 정직하게 따르고 있다.

  영화 초반부는 볼의 집안에서부터 시작해 볼이 출근하러 나서는 장면까지 여러 차례 슬랩스틱을 선보이면서 상류층의 허례와 삶을 희화화 시키는데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옥상 밖으로 집어던진 밍크코트를 매리 스미스(진 아서)가 뒤집어쓰게 되고 소시민인 그녀와 상류층인 볼 가문이 인연을 맺으면서 일련의 해프닝을 이어간다.

 

  <이지 리빙>이 선보인 슬랩스틱의 하이라이트는 매리 스미스가 저녁 식사를 위해 찾은 식당에서 일어난 장면이다. 다양한 메뉴들로 가득한 ‘AUTOMAT'이라는 식당은 마치 자판기처럼 개별 음식마다 금액을 지불하고 원하는 음식을 먹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원하는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곳이지만 실상은 각자가 가진 돈 만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커피 한 잔과 아이스크림이 먹을 수 있는 전부인 매리 스미스에게 호감을 느낀 식당 직원이 다가오고 직원은 그녀에게 식당 몰래 요리를 건넨다. 이를 보안 담당자에게 들키자 둘 사이에는 주먹다짐이 오가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식당 내 모든 음식 칸막이가 열리면서 공짜 음식을 먹겠다고 사람들이 몰려 식당은 아수라장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딪치고 음식을 먹고 뺏고 뒤엉키면서 넘어지는 대규모 슬랩스틱이 펼쳐지는 가운데 매리는 직원에게 받은 파이를 묵묵하게 먹는다.

  웃음으로 버무린 슬랩스틱이 대향연으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영화는 시대를 응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부호 미스터 볼을 내세웠던 초반 잔명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또 다른 슬랩스틱, 다분히 우연이 많다고 밝힌 스토리 안에서 슬랩스틱은 구르고 넘어지는 허당미를 뽐내면서 예리한 풍자의 날로 대공황 시대의 단면을 겨냥한다. 미스터 볼을 중심으로 선보인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과 먹을 것을 찾아 달려드는 사람들이 충돌하는 식당 슬랩스틱은 전복된 상황의 집약이자 대비로 귀결되고 이름처럼 어수선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스크루볼 코미디로써의 매력을 피어낸다.

 

 

대공황 시대의 욕망과 판타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대에 나온 여러 스크루볼 코미디의 연장선에 있는 이 작품에서 미첼 라이슨 감독이 바라보는 세상의 키워드는 욕망인 것 같다. 주인공 매리 스미스가 겪게 되는 이지 리빙은 우연히 맺어진 미스터 볼과의 만남에서부터 출발한다. 매리가 미스터 볼의 정부일 것이라는 오해 때문에 미스터 볼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여러 인물들이 그녀에게 접근하고 이들은 각자의 욕망을 매리를 거쳐 이루고자 한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루이스 호텔의 사장 루이스인데 그는 매리를 호텔로 초대해 (거의) 무료로 그녀를 묵게 하면서 미스터 볼에 잘 보여 자기 사업이 성공하기를 꿈꾼다.

  루이스 사장이 매리에게 방을 소개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다.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의 의상 디자인과 아트 디렉팅 일을 거쳐 감독이 된 미첼 라이슨 감독의 미적 감각은 영화 전반에 거쳐 인상적인 미장센으로 드러난다. 극중 매리에게 안내하는 루이스 호텔 최고 스위트룸은 지나칠 만큼 화려하게 치장되어 대공황이라는 시대상과는 극단적인 이질감을 드러낸다.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그곳은 철학이나 미적 감각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대신 값비싼 가구와 인테리어로 채워져 자본과 욕망이 무분별하게 혼재된 공간이다. 이곳은 호텔 사장의 욕망이 오롯이 투영된 공간이며 대공황의 위기와 상응하지 못하고 동 떨어져 발현된 욕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지 리빙>에서는 루이스 사장을 비롯해 테일러와 가십 기자 등 일방적이거나 자의적인 방식으로 욕망을 표출하는 인물들을 매리의 주변에 배치해 놓았다. 결국 매리는 주변의 욕망들이 만들어놓은 궤도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그녀는 오랫동안 미스터 볼의 이름을 모른다) 올라타게 되고 소시민으로서 이전까지 꿈꿀 수 없었던 이지 리빙이란 판타지를 경험해 볼 기회를 얻는다.

  재미난 지점은 <이지 리빙>에서 욕망을 그리는 방식이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매리가 올라탄 판타지 열차는 그녀에게 상류층의 삶으로 인도하는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릴 뿐 그녀 앞에 펼쳐진 물질적 향유를 마다하지 않는다. 대신 매리에 비해 그릇되게 욕망을 쫓는 추종자들과의 충돌로 매리 스스로가 누릴 수 있는 경계를 가늠하도록 한다.

  욕망을 통제의 영역이 아닌 활용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가치와도 맞닿아있다. 어느새 영향력을 가지게 된 그녀가 본의 아니게 미스터 볼의 회사를 위기에 빠뜨렸다가 다시금 제자리로 돌려놓는 과정을 곱씹어보자면 매리는 이를테면 <이지 리빙>의 인물들 중에 상대적으로 옳은 욕망의 활용법을 행사하면서 성장한다. 이후 매리는 미스터 볼의 정체를 알게 되고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가 그의 아들인 것 또한 알게 되면서 <이지 리빙>의 로맨스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향해 간다.

  대공황이라는 시대에 불거진 왜곡된 욕망을 꼬집으면서 소시민 주인공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결합된 <이지 리빙>의 스토리는 미스터 볼의 회사 위기가 매리 덕분에 무마되면서 발칙한 쾌감을 전한다.

 

 

맺음

 

  코미디는 영화의 오랜 친구였다. 영화사 초기의 시도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물 뿌리는 정원사>(1895)와 같은 코미디 작품은 영화의 시작으로부터 머지않아 이 새로운 발명의 어색하고 이질적인 괴리를 상쇄시키는데 큰 역할을 자임했다. 그 결과 영화는 대중에게 센세이셔널하게 파고들 수 있었다. 찰리 채플린과 바스터 키튼, 해롤드 로이드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떠올릴 수 있는 코미디의 황금기를 시작이자 끝으로, 이후 주류 장르로써 코미디의 위상은 예전 같지만은 않다.

  때마침 2019년의 한국영화는 예년보다 자주 코미디 영화를 만날 수 있는 한 해였다. 그 포문을 연 것은 많이들 짐작할 수 있듯 연초에 개봉한 <극한 직업>의 흥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로 여러 영화가 코미디로써, 또는 코미디가 강화된 퓨전 장르로써 관객들을 만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오늘의 영화는 스펙터클의 시대다.

  무한 확장하는 스펙터클의 시대에 코미디는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슈퍼맨과 배트맨의 자리를 아이언맨이 대신하게 된 결과를 두고 여전히 유머(코미디)는 유효하다는 사족을 붙여보고도 싶다. 여전히 코미디란 유연해서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유연해서 자유 분방하게 할 말 다 하는 매력적인 장르다. 프레스턴 스터지스의 각본을 거쳐 미첼 라이슨이란 감독을 통해 선보이는 <이지 리빙>은 유효한 코미디의 확인을 넘어 황금기 고전 코미디 영화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반가운 작품이다.

 

 

 

다음글 오래된 극장 <남쪽>
이전글 프레스턴 스터지스와 클래식 코미디 '프레스턴 스터지스 감독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