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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오래된 극장 <고독>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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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멜빌의 <고독> : 버려지는 자를 위한 시
김현진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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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는 결국 죽어야 한다. 그것이 킬러의 운명이다. 이 운명을 어느 범죄소설에서, 어느 범죄영화에서 누가 먼저 만들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살인청부업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는 우리는 킬러는 왜 죽어야만 하는지 궁금해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다. 범죄자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생존해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려는 창작자의 욕망 때문인가. 아니면 그 권선징악을 원하는 관객들의 욕망 때문인가. 아무튼 킬러들은 그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 속에서 대부분 죽어야 했다. 물론 예외도 얼마든지 있다. 자신 대신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3>(1991)), 몸이 심각하게 망가지거나(왕가위의 <열혈남아>(1989) 대만판 엔딩이나 유위강의 <무간도 3: 종극무간>(2004)), 끝까지 살아남지만 그의 곁엔 아무도 없는 결말(마틴 스코시스의 <아이리시맨>(2019))도 있다. 혹은 대놓고 권선징악을 비웃는 듯한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1993))도 있다. 아무튼... 영화 속의 킬러들은 대부분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관객들은 킬러들의 비극을 보게 될 것이다. 킬러라는 직업을 노동의 관점으로 보자면 그들은 개인사업자이며 비정규직 프리랜서이고, 조직의 부름을 받아 일하지만 언제든 조직에게 버려질 수 있는 소모품 같은 존재들이다. 우리가 킬러 영화를 볼 때 느끼는 비애감은 여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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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1967년 작 <고독>(원제 <사무라이>)의 첫 장면은 살인청부업자인 주인공인 제프 코스텔로(알랭 들롱)가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서 내뿜는 담배 연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도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일까? 관객들이 영화들 속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담배 연기는 마치 장례식의 향에서 피어나는 연기처럼 보인다. 자신이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치르는 듯한 풍경. 그 연기 위로 자막이 보인다. ‘사무라이보다 더 고독한 것은 없다. 만약 있다면 정글 속의 호랑이 정도...’ 이 오프닝을 통해 멜빌은 자신의 주인공에게 쓸쓸한 운명을 미리 점지해둔다. 왜 그는 킬러가 되었는지, 왜 그는 영화 내내 한 번도 웃지 않는지, 그렇게 돈을 벌어 대체 무엇에 쓰는지... 많은 것이 궁금하지만 멜빌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관객들에게 알려줄 마음이 없다. 그는 그냥 고독한 킬러이며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 하며 영화를 본다. <고독>은 삶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킬러가 주인공인 영화들에 대한 영화인 것이다.
멜빌의 영화들이 차갑고 건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범죄자들과 경찰들 간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드라마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인물이 감정을 드러낸다거나, 인물 사이의 감정적 교류가 오고 가는 장면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대신 멜빌은 인물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움직임만을 상세히 담아낸다. <고독>에서 코스텔로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장면, 수십 개의 열쇠를 준비해 자동차를 훔치는 장면, 자동차 번호판을 바꾸는 장면, 방 안에 도청장치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이를 못 쓰게 만드는 장면, 경찰의 미행을 따돌리는 장면... 여기엔 관객의 눈길을 끌기 위한 그 어떤 과장도, 영화적 테크닉도 없다. 마치 영화로 찍은 범죄 매뉴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세한 묘사 그 자체가 멜빌의 주특기인 것이다. 그리고 온갖 감정을 철저히 억제한 채로 조용히 흘러가는 매 장면은 멜빌의 영화에 고요하고도 쓸쓸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멜빌의 금욕적이고 미니멀한 스타일은 결국 마지막에서야 관객에게 아주 잠깐 탄식의 순간을 허락한다. 코스텔로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지만 눈감아준 클럽의 여자 피아니스트를 죽이라는 임무를 받는다. 그는 여자에게 총구를 겨눈다. 미리 매복해 있던 형사들이 코스텔로에게 총을 쏜다. 그는 쓰러진다. 그의 총의 탄창에는 총알이 없다. 범상한 범죄영화처럼 보이던 영화는 이 엔딩을 통해 시의 경지에 이른다. <사무라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이렇게 완성된다. 여기에 무슨 교훈이나 위대한 철학 같은 건 없다. 그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만은 해할 수 없다는 윤리를 품은 킬러의 마지막을 통해, 멜빌은 그에게 영화로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3
멜빌의 영화들은 이후 많은 후대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오우삼은 멜빌의 <사무라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멜빌은 내게 신과 같은 존재였다"라고 존경심을 표했다. <첩혈쌍웅>(1989)의 주윤발이 클럽의 여자 가수 엽천문을 찾아가 그녀의 노래를 듣는 장면, 그 장면의 주윤발의 눈빛은 알랭 들롱이 클럽의 여자 피아니스트를 바라볼 때의 눈빛을 생각나게 한다. 탄창에 총알이 있는가의 문제는 주윤발과 그의 친구 사이의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정말 한 발이 남았나?” 두기봉은 멜빌의 인물들이 보여줬던 과묵함, 극히 적은 감정 표현, 프로페셔널리즘, 과장되지 않은 움직임이라는 특징을 오우삼보다 훨씬 더 파고 들어간다. <미션>(2000)부터 이후 계속 이어지는 과묵한 사내들의 조용한 총격전이라는 특징은 명백히 멜빌에게서 온 것이다. <암흑가의 세 사람>(1970)에서 알랭 들롱이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탈옥수가 자신을 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는 대답 대신 담배와 라이터를 던져주는, 남자들 사이에서 말없이 유대감이 드러나는 장면도 두기봉의 영화 속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자주 나타난다. <피의 복수>(2009)에서는 아예 프랑스 배우인 조니 할리데이를 캐스팅해 그에게 ‘코스텔로’라는 이름을 선사하는 식으로 멜빌에 대한 경의를 바치기도 한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두기봉은 <암흑가의 세 사람>을 리메이크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짐 자무시는 <고스트 독>(1999)을 통해 자신의 스타일로 멜빌의 <고독>에 대한 치열한 주석을 달았다. <고스트 독>의 부제는 ‘사무라이의 길’이다. 총알 없는 총이라는 모티브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2008)에서도 찾을 수 있다. 김지운은 <달콤한 인생>(2005)에서 고독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나르시시즘에 빠진 듯한 조직의 해결사 이병헌이 보스에게 배신당하는 이야기를 통해, 김지운 나름대로의 알랭 들롱을 창조했다. 니콜라스 빈딩 레픈은 <드라이브>(2011)를 통해 라이언 고슬링을 알랭 들롱처럼 말 없고 무표정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멜빌의 후계자들을 계속 이야기하자면 이 글을 끝내기가 힘들다. 앞으로도 멜빌의 흔적은 누군가의 영화 속에서 계속 발견될 것만 같다. 그만큼 멜빌이 간결하면서도 매혹적인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한 감독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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