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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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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피알라 특별전 <사탄의 태양 아래>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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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하고 절박한 자의 종교극 ; <사탄의 태양 아래>
김지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사탄의 태양 아래>(1987)는 관객이 보지 못한 사이에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고 느껴지는 영화다. 영화가 생략했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유추해 서사를 이어갈 수 있는 부분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가능한 분량 이상이 제거되어 전개상 비어져 나오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소녀가 죽고 나서 다른 교구에 배정된 도니상(제라르 드파르디유)이 갑자기 군중들의 추앙을 받는 장면이 그러하다. 누군가 그에게 말한다. 저는 롱블랭 부인을 만났어요, 신부님의 몸짓에 감동받았대요. 줄곧 교구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던 그는 므누 스그레(모리스 피알라) 신부의 골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탄 마차를 에워싸고 사인을 청하거나 예사로 여길 법한 말 앞에서 우리는 순간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몸짓’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짚이는 바가 없고 영화는 그 이상 알려주지도 않는다. 수도원에서 나온 도니상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지도 않은데. 굳이 따져보자면 그가 죽은 소녀를 제단으로 안고 갔던 일 정도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서 다른 교구민들까지 찾아와서 도니상에게 기적을 청하고, 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따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좀 모자란 감이 있다. 관객은 알지 못하는 모종의 기적을 그가 행했고 사람들이 이미 그것을 보고 들어서 알고 있다면?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 계기를 어째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생략해버렸을까?
그들에게 있었던 사건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는 도니상이 사탄으로부터 사람들의 삶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셰트(상드린 보네르)의 경우에는 실패에 머무르기는 했지만 영화는 도니상이 구원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이미 우리에게 일러준 적이 있다. 그러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영화의 초반에 도니상이 영성체를 하는 신이 있다. 마지막에 그가 고개를 들어서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본다. 이어지는 다음 숏은 무셰트가 처음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카디냥 후작의 집,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오며 그가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 보인다. 각각의 숏이 속해있는 시공간이 엄연히 다르다는 걸 안다. 하지만 도니상의 시선 끝에 무셰트가 위치하는 순간, 영화는 그가 구원받아야 할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무셰트가 죽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녀가 목을 그으려는 찰나 그 숏이 끝난다. 뒤에 이어지는 것은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쓰러진 그를 발견하는 도니상의 숏이다. 그러니 시공을 뛰어넘어 구원자가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무리는 않을 것이다.
영화는 모든 상황이나 대사들을 그 스스로가 일일이 연결하고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그 대신 인물들에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들을 관찰하는 데 관심이 있다. 종교에 온몸을 바치는 한 인간이 가진 우직한 열정,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맹렬함에 미치지는 못하는 그의 인간적인 무능과 결핍들, 계속되는 의심과 불안, 그로 인해서 자기학대에 가까운 고행을 자처하는 자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그를 마지막까지 똑바로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에는 한 점 연민도 없이 차갑고 건조하다. 카메라 역시 그 외의 일, 그러니까 으레 다른 영화에서 하듯이 제가 서있는 장소와 상황 전체를 조망하거나 정보가 될 만한 숏들을 제공하는 데엔 거의 무관심하다. 그 또한 이 치열하고 불행한 성직자의 내면과 정서에 조응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창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빛조차도 이 영화에서는 때를 일러주지 않는다. 창은 푸르스름하고 사제관은 대체로 어둡다. 노르스름하거나 하얗게 쏟아지는 빛만으로는 도저히 지금이 오후 늦은 시간인지 저녁 어스름인지, 혹은 새벽인지 이른 아침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은 전후 상황과 인물들 간의 대화, 옷차림 같이 이 세계의 세부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을 따름이다.
제라르 드파르디유가 사제복을 입고 작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으면, 그의 커다란 육체는 검은 바위처럼 보인다. 솥뚜껑만한 손이 조그만 책을 펼쳐보다가 이내 그것을 휙 던져버리거나, 나무둥치 같은 몸에 스스로 채찍질을 할 때, 그는 영민함이나 고귀함, 성스러운 성직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렇게까지 스스로에게 혹독할 것 있을까 싶게, 우직하고 미련해 보이는 도니상 그 자체다. 므누 스그레 신부의 심부름으로 어디론가 길을 떠날 때 역시, 손을 앞으로 모은 채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것뿐이건만 그는 고독하고 그늘지고 위축돼 있다. 그 풍채 좋은 제라르 드파르디유가 이 영화 곳곳에서 왜소하고 무력하다. 광대한 들판에서 길을 잃고 휘적휘적 걸어갈 때는 검은 얼룩처럼 하찮고 가엾다. 길을 잃고 고생한 후, 기진맥진해 사탄의 도움을 받을 때에도 그랬고 통나무처럼 누워서 꼼짝하지 못할 때도 그렇다. 우직한 태도로 사탄의 유혹과 도발에도 버텨내지만 그런 모습이 숭고하다기보다는 절박하고, 때로는 두려워 보인다.
<사탄의 태양 아래>는 영화는 신을 믿지 않는 자의 종교극이다. 도니상은 내내 신에게 가까워지려고 애썼지만 그가 만나거나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알다시피 사탄의 존재뿐이었다. 사탄은 신이 계획한 운명을 안다면 당신은 신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자신한다. 신이 존재하는가? 있다면 어째서 죄 없는 아이를 죽게 하고 어머니에게 비할 바 없는 고통을 안길까? 그의 뜻을 받들어야 할 성직자가 아이를 살려낸다면 이는 곧 신을 거스르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들은 도니상이 사탄에게서 받은 능력을 믿으면서, 사탄이 세상의 지배자라는 도니상의 말은 무시한다. 그 혼돈 속에 아이를 살려달라는 도니상의 기도는 사탄과 신, 정확히 누구에게 향해있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따라서 기도를 들어주었거나 목숨을 거두어간 쪽도 모호해져버린다. 영화가 던지는 복잡한 질문들과 모순 앞에, 범속한 자로서 오랫동안 아득해질 뿐 답을 찾기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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