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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모리스 피알라 특별전 <우리의 사랑>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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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랑> : 서슬 퍼런 가족의 풍광 속에서
심미성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포스트 누벨바그를 이끈 감독으로 분류되는 모리스 피알라. 재능은 있었지만 유명세는 얻지 못했던 화가 생활을 청산하고 영화계에 뛰어들었던 때는 1955년이었다. 그로부터 조감독과 배우, 단편영화 연출을 거쳐 1968년에서야 첫 장편영화를 찍게 되었으니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모리스 피알라는 평생 10여 편의 장편 영화만을 만든 과작의 작가였다. 하지만 범작은 단 한편도 없다고 알려진 그의 작가성을 구석구석 탐구하기에 데뷔작부터 TV 시리즈까지 한데 모은 이번 기획전이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
10여 편의 비범한 작품들 가운데 <우리의 사랑>(1983)이 점유한 위치는 어떤 독특성으로 소개될 수 있을까. 피알라의 활동 시기에 거친 이정표를 세워 본다면 대략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데뷔작을 포함해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벌어진 입>(1974), 실직에 시달린 외로운 청년들을 그린 <졸업이 먼저>(1978) 등의 작품으로 특유의 염세적인 시선이 무겁게 깔린 스타일을 정립해가던 첫 번째 시기. 빈곤한 불량배와 사랑에 빠진 부르주아 여성의 이야기 <룰루>(1980)와 십대 사춘기 소녀의 위태롭고 무분별한 사랑을 다룬 <우리의 사랑>으로 좀 더 다양하게 일상적인 소재를 포괄하는 주관적 리얼리즘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1980년대 후반, 비평적 찬사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사탄의 태양 아래서>(1987)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었으며 전설에 가린 고흐의 인간적인 면모를 꺼내 놓은 <반 고흐>(1991) 또한 그의 대표적인 후기 걸작이다.
<우리의 사랑>은 말하자면 피알라의 세계가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두 번째 시기를 대표한다. 이 작품에서 발굴된 배우 상드린 보네르의 언급을 피할 수가 없겠다. 그는 <우리의 사랑>에서 보여준 자유로운 10대 연기를 필두로 후기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은 물론 아녜스 바르다, 클로드 샤브롤 등 누벨바그 선배 감독들의 영화에서 역시 빈번하게 협업했다. 마치 카메라에 투명 망토라도 두른 듯 자유로운 신체 언어를 구사하던 상드린 보네르의 보기 드문 에너지는 자연주의자 모리스 피알라가 그리고자 했던 영상 회화와도 완벽히 부합했다. 이 작품으로 보네르는 그해 세자르 신인여우상을 꿰찼고, 이후로도 피알라의 <폴리스>(1985), <사탄의 태양 아래서>에서 함께하며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
다른 작품들과 견주어 보아도 <우리의 사랑>에서의 상드린 보네르는 유독 한 치의 계산된 몸짓 하나 엿보이지 않는 놀라움을 안긴다. 그저 ‘수잔’으로 카메라 앞에 던져진 존재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관능성과 순간성에 매료된 화가 보나르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수잔이 직접 보나르의 오랜 모델이자 연인이던 마르트의 신체를 상기시키는 모습으로 프레임에 늘어진 자태는 훌륭한 예시다. 영화는 이렇게 상드린 보네르라는 제1화자의 살아있는 시선과 몸짓을 경유해 위태로운 사랑의 방식을, 그리고 가족이란 이름의 그리기 힘든 풍속도를 그려 나간다.
피알라의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관계의 단면은 울퉁불퉁하기 짝이 없다. 설령 그것이 추해지더라도, 혹은 그것이 추해지기 전에는 무엇도 드러나지 않는다고 믿는 듯이 모리스 피알라의 카메라는 재앙처럼 번진 물리적 격정과 난투의 현장을 집요하게 좇는다. <우리의 사랑>에 드러난 서슬 퍼런 폭력의 현장은 피알라 내면에 새겨진 사적인 풍경인 동시에 보편의 풍경이다. 서로를 향한 분노, 증오는 끝내 자기 파괴와 분별력 없음의 상태로 내몰리고 이 난투 속에서 가족 구성원의 복잡한 역학 관계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와 수잔, 수잔과 오빠, 오빠와 어머니. 그중 가장 눈여겨봄직한 조합은 수잔과 오빠다. 어머니에 대항하는 여동생을 폭력으로 다스리던 오빠 로베르의 태도는 어딘가 불균질하다. 동생에게 갖는 로베르의 양가감정은 그 널뜀의 정도가 너무 큰 나머지 종종 관객을 당황시키고 만다. 폭력의 수위를 높인 다음엔 “나는 동생을 때리지 않는다”는 가짜 답변이 들려오고, 동생의 살갗 냄새를 극찬하며 주변인에게도 권하는 모양새도 눈에 띈다. 이는 타이틀이 뜨기 전까지 수잔의 뒷모습을 거침없는 불안의 격랑 속에 담던 초반부, 로베르의 첫 대사와도 동그랗게 말린다. “쟤 좀 봐. 내 동생 너무 예쁘다.”
영화에서도 얼핏 언급된 남매의 ‘원시적 유대감’은 사랑을 취하는 수잔의 태도를 매개로 비이성적인 폭발을 거친다. 달뜬 쾌락에 젖은 나날들로 사랑을 수집해온 수잔에게는 진정한 사랑의 잔여물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말대로 누군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랑 받기만을 원해온 것처럼 보인다. 수잔은 종국에 이르러서도 어머니(오빠)의 세계가 아닌 집을 나간 아버지의 세계를 택한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세계는 ‘집 밖’을 의미한다. 결혼을 앞두고는 첫사랑을 만나 그의 사랑을 재확인 받고, 결혼 후에는 보나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연상의 남자와 여행을 떠나는 수잔. 집의 속박에서부터 탈출을 감행한 수잔의 멍한 얼굴을 가득 채운 클로즈업 쇼트가 <우리의 사랑>의 맨 마지막 쇼트다. 어쩐지 마이크 니콜스가 만든 <졸업>(1967)의 엔딩이 수잔의 얼굴에 달리 환생한 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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