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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롤 리드 특별전 <몰락한 우상>202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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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우상> : 캐롤 리드와 소년
강원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캐롤 리드의 <몰락한 우상>(1948)은 스릴러·서스펜스의 대가라 불리는 감독의 명성에 걸맞은 영화다. 대사의 아들 필립(보비 헨리)은 부모가 대사관을 비운 동안 대사관 관리인 베이슨(랄프 리처드슨)의 불륜과 연관된 사건에 휘말린다. 영화는 베이슨 부부 사이의 심리적 서스펜스에서 시작해 베이슨 부인(소니아 드레스델)이 죽자 그녀의 죽음을 다루는 추리 스릴러로 나아간다. 또한 사건들과는 무관한 필립이 불순한 어른들 사이에서 어떻게 고통 받는지, 베이슨이란 우상에 대한 소년의 천진난만한 믿음이 어떻게 파괴되는지 밀도 있게 담는다.
그런데 필립은 정말로 무관한 걸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캐럴 리드의 소년들에겐 독특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올리버>(1968)의 마지막 탈출 신을 떠올려보자. 납치한 소년 올리버(마크 레스터)로 하여금 대들보에 밧줄을 걸게 한 성인 남성 빌(올리버 리드)은 밧줄을 이용해 현재 있는 건물에서 다른 건물 옥상으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재빨리 도망치지 못한 그는 경찰의 총에 맞아 두 건물 사이에 매달린 채 죽음을 맞는다. 또는 <제3의 사나이>(1949)의 다소 뜬금없이 등장했던 공을 든 아이도 있다. 이 아이는 살인 현장에 찾아온 홀리 마틴스(조셉 코튼)를 살인자라고 칭하며, 홀리가 마을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게 만든다.
다소 과장이 있지만, 캐럴 리드의 소년들은 스릴러·서스펜스 영화에 일어나야 할 사건을 위해 어른을 매달거나 누명 씌울 줄 알며,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리고 <몰락한 우상>은 이런 아이와 어른의 관계, 일종의 상하관계를 공간적으로 극화시킨 것 같다.
필립은 수직적 공간으로 이루어진 대사관 상층에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으며, 위에서 아래에 있는 어른들을 내려다보거나 자신의 방과 연결된 소방계단을 이용해 밖에서 어른들을 염탐한다. 그리고 이 악의적으로 공간을 사용하는 소년에게 어른들은 저항한다. 먼저 눈에 띄는 어른은 베이슨 부인이다. 그녀는 필립과의 첫 번째 갈등이 일어나는 지하실 식사 신에서 필립의 “I hate you.”라는 말에 화가나 “Up, up, up.”이라 답하며 필립을 방으로 올라가게 만들지만, 필립이 그의 방에 애완 뱀을 숨기려는 것을 목격한 두 번째 갈등에선 기어코 뱀을 찾아내 죽임으로써 필립을 괴롭힌다.
베이슨 부인의 전략이 위쪽에 위치한 소년의 방에 침범하는 것이라면 베이슨의 전략은 다르다. 필립은 영화 초반에 심심풀이 삼아 거리를 나선 베이슨을 미행하다 그와 줄리(미셸 모르강)라는 여성의 밀회를 목격한다. 그런데 필립은 대사관에서 보여주던 어른들을 향한 관찰력이 무색하게 남녀를 사촌지간이라 믿어버린다. 소년은 자신의 공간인 수직적 대사관에서 벗어난 야외의 수평적 길거리에선 무력하며, 이후 베이슨, 줄리와 함께 동물원에 간 신에서 어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필립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어른들을 다시 주무르며 복수한다. 영화 중반에 베이슨 부인은 자고 있던 필립을 깨워 베이슨의 불륜을 추궁하며, 필립이 입을 열지 않자 밖으로 나가 직접 베이슨과 줄리의 불륜 현장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필립은 그녀를 따라 나와 아래층에 있던 베이슨에게 위험을 알리자, 당황한 베이슨 부인은 필립을 때리고 아래로 내려간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간 순간 베이슨 부인은 필립에게 이미 지고 만 것이다. 아래층에서 부부싸움이 벌어지자 필립은 위층에서 싸움을 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소방계단을 한층 씩 내려가며 싸움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관객을 안내한다. 건물 안의 긴장은 이 서스펜스를 만드는 자의 행위와 시선에 의해 점차 고조되며, 마침내 소년이 1층에 도착하자 베이슨 부인은 그에게 이끌리듯이 2층에서 추락해 죽는다.
그리고 베이슨을 향한 필립의 복수는 곧장 시작된다. 필립은 베이슨 부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시체와 놀란 베이슨을 보고 “He pushed her.”라고 말한다. 이건 추정이 아니라 단정이다. 필립은 이후 어두운 밤거리를 달려 경찰서에 가게 됨으로써 베이슨을 위기로 몰아넣을 것이며, 이후 필립의 모든 행동은 베이슨이 오해받도록 만든다. 필립은 자신이 만든 허구를 현실에 누명 씌우며 영화를 형사들과 베이슨 사이의 추리 스릴러로 만든다.
필립의 노력으로 무죄증명에 실패한 베이슨은 영화 끝자락에 지하실로 내려가 자살할 것만 같이 권총을 바라본다. <몰락한 우상>은 소년에게 저항하려했던 성인 여성과 남성의 잇따른 죽음으로 끝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형사들은 베이슨이 지하에 있는 동안 2층 난간에서 베이슨 부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이를 그녀의 죽음이 타살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로 여긴다. 그러자 필립은 1층에서 2층을 올려다보며 형사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만, 지금까지 필립의 말을 경청하던 형사들은 이제 합심해서 그의 말을 무시한다. 결국 베이슨은 누명을 벗었고 필립은 안도하는 베이슨과 줄리를 보며 탄식한다. 그리고 소년은 계단을 올라 그의 방으로 돌아가려하지만, 하필 그 순간 필립의 부모가 돌아오고, 필립이 계단을 내려가는 숏으로 영화는 끝난다.
소년은 어른을 주무르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부모가 돌아오자 자신의 공간이었던 대사관에서조차 주도권을 잃은 것 같다. 몰락한 우상은 베이슨이 아니라 필립이 되어버렸으며, 그렇다고 이 결말을 소년에 대적한 베이슨 부부의 승리라 보기엔 실상 부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결말은 난센스다. 캐롤 리드는 왜 이런 결말을 만들었을까. 그는 소년의 흉계를 더 이상 지켜보기 어려웠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필립은 베이슨 부부가 아니라 <몰락한 우상>의 또 다른 어른, 자신과 똑같이 영화를 주무르는 캐롤 리드라는 어른과 대적해야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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