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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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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름아카이브 특별전: 사트야지트 레이와 아시아 클래식 '사트야지트 레이 감독론'20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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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트야지트 레이의 바깥
이광호 (부산영화평론가협회)
2019년 5월, 봉준호의 <기생충>은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천만 영화라는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기생충>은 전 세계를 휩쓸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최초의 노미네이션에도 불구하고 주요 부문 4관왕을 달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갑작스레 찾아온 이 소식들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그중에서도 나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건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영화'라는 말이었다. 이 표현은 <기생충>이 한국의 지역적인 면을 보여주면서도 세계인들이 모두 공감할만한 이야기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대개 영화에서 동시에 수행되기 어려운 대립적 가치를 모두 잡아냈다는 성취에 대한 찬사다. 이와 더불어 천만 영화와 황금종려상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타이틀의 취득이 증명하듯, <기생충>이 예술성과 상업성을 모두 잡아냈다는 칭찬은 나에게 영화에서 한국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고민하게 만들었다.
인도의 영화감독 사트야지트 레이를 말하는 자리에서 다소 무관해 보이는 잡상을 꺼내놓은 것 같다. 무언가 그의 영화를 보며 느낀 감각이 <기생충>을 보고 생각할 때의 경험을 떠오르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장르적 터치와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컨텍스트의 맥락에서 둘은 완전히 노선을 달리한다. 하지만 아시아 영화라는 영역에 있으면서 자신의 지역적인 속성을 미학적으로 부각시켜 전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봉준호의 고민이 사트야지트 레이에게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일종의 망상적인 궁금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선 문장을 변용하자면, 개인적으로 사트야지트 레이의 영화를 볼 때 신경이 쓰이는 점은 그의 영화에서 인도라는 지역의 특성이 어떻게 관찰될 수 있는지와 관련된다. 세계영화사의 지형도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아푸 3부작'을 비롯하여 레이의 영화들에는 우리가 손쉽게 '인도(india)적'이라고 부를 만한 전통적이고 민속적인 사물, 건축, 풍경, 상황들이 무궁무진하게 프레임을 채우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유려한 카메라 이동과 회화적인 프레이밍, 대개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다루는 이야기 틀의 엄중하고 말끔한 형식 안에 얼마간 구속되고 있다. 물론 이는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의 편집증적인 치밀함과 집착적인 계산이 들어가야만 완수될 수 있는 종류의 고난도 작업이며, 프레임 내부에서 활달하게 움직이는 인물과 사물들의 조화로움을 보고 있으면 사트야지트 레이가 최소한 그 성취에 있어서 실패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특별한 형식적 변주 없이 단지 스크린을 아름답게 구성하려는 의도의 충실함 때문일까? 레이 영화 속의 세부적 재료들이 인도라는 지역을 지시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영화를 구성하는 형식의 층위로까지 힘을 미치며 진정 인도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이 들게 되고, 프레임에 들어차 있는 인도의 모습들은 얼마간 특정 지역의 사회와 문화를 학습하기 위한 영상 교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빈곤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흔히 동원되는 비평적 진술은 레이의 영화에 네오리얼리즘적 영향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일이다. 커다랗고 정교한 가상의 세트를 동원하기보다는 현지촬영을 고수한 점, 노련하고 정확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기성 배우진이 아니라 비전문 배우를 기용한 점과 같은 작업 방식을 통해 우리는 그 자장을 얼마간 인정할 수 있지만, 유럽의 네오리얼리즘과 레이와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서사적 사건의 부재와 관련된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영화의 전체를 놓고 볼 때 주요 이야기와 관련 없는 장면이 등장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라는 데드 타임의 유무 자체가 아니다. 레이 영화 속에서 서사와 무관한 장면들을 몇 가지 떠올려보자. 가령 <불굴의 인간>(1956)에 출현하는 이야기꾼이나 신체를 뒤틀어 공연하는 안무가, 혹은 갠지스 강 근처의 동네 풍경들은 당연하게도 아푸의 이야기와 결부되지 않는 잉여적 존재들이다. 하지만 (심심찮게 등장하는 전통 음악에 힘입어) 그들은 네오리얼리즘이 담지한 공백과 폐허의 속성을 품고 있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인도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추동하는 전시물처럼 기능하고 있다. 그에 따라 레이의 영화 속 풍경은 진귀하고 낯선 장식물들이 보기 좋은 모양으로 다채롭게 들어찬 스펙터클의 집합소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트야지트 레이의 영화는 형식을 고민한다기보다는 미적이라고 여겨지는 시각적 미장센의 구축에 골몰하는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상당한 공을 들여 배치된 듯한 사물과 인물, 프레임의 안정적인 구도, 정확하고 오차 없이 이루어지는 카메라의 이동의 엄격함 등이 자아내는 완벽주의적 성향은 대상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성질의 발현으로 영화에 불균질한 인상이 깃드는 현상을 거부하려는 과도한 경계처럼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레이 영화 속의 풍경과 사소한 디테일이 지닌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은 그것의 본래 속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외부의 지나친 개입에 의해 시적이고 아름답다고 느껴지도록 구성된 가공물에 가까워 보인다. 물론 그러한 양식의 선택에는 단순히 서구의 인정을 바라는 제3세계의 예술가의 고집만이 전부인 것은 아닐 것이고, 얼마간 세계적인 위치에서 자국 영화의 위상을 고민했던 부분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레이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미적 양식에의 집착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난해하거나 어렵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의 데뷔작으로 '아푸 3부작'의 시작이 된 <길의 노래>(1955)는 인도 전 지역에서 상영되며 큰 흥행몰이를 했다. 해답은 스토리텔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골과 도시를 오고 가며 큰 변화를 겪는 소년 아푸의 성장기를 다룬 <불굴의 인간>, 살림 생활의 위기를 느끼고 직업을 구해 사회생활에 뛰어드는 여성 아라티의 이야기인 <대도시>(1963), 가정에 무심한 남편과 시인 사이에서 스스로의 주체성을 고민하는 여성 차루의 심정을 묘사한 <외로운 아내>(1964)처럼, 레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중들이 친숙해지기 쉬운 평범한 사람들로 정해지며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법한 서사를 채택하여 서민들의 보편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주변 환경의 변화에 놓인 인물들이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묘사에 충실했던 사트야지트 레이와 달리, 영화의 화면과 편집을 거친 방식으로 운용하며 근대와 서구 문명에 대해 직접적이고 정치적인 비판으로 응대했던 인도 감독 리트윅 가탁보다 먼저 세계 무대에 진출하여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레이의 필모그래피 중후반 시기에 놓인 <성인>(1965), <겁쟁이>(1965), <영웅>(1966), <코끼리 신>(1979) 등은 잘 말해지지 않는 편인 것 같다. 미국의 블루레이 제작사인 크라이테리온 컬렉션은 '아푸 3부작'을 대표로 하는 레이의 초중기작들을 충실히 복원했지만, 그 외의 작품들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며 그의 말년 세 작품(<사람들의 적>(1990), <가정과 세상>(1984), <이방인>(1991))을 담은 패키지 타이틀 'Late Ray'은 어쩐지 감독 레이에 대한 영향력을 관습적으로 의식한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이는 고화질 블루레이가 아닌 일반 DVD 화질로만 출시되어 있다). 그런데 언급한 영화들의 목록 중에서 <영웅>은 블루레이와 DVD 모두 단독 타이틀로 출시되어 있다. 사소하지만 이 선별 과정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영화배우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삶을 회고하는 이야기인 <영웅>과 다르게, <성인>, <겁쟁이>, <코끼리 신>은 레이의 영화 중에서 다소 이례적인 편에 속한다. 좀 엉성한 구분이긴 하지만 이 영화들은 삶에 관한 보편적인 면을 주제로 삼고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적 삽화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진술과 행위가 하나둘씩 쌓이며 결론으로 향하는 이야기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인도적"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인상적인 영화가 <성인>(1965)이다. 이야기 안에서 종교적 소품을 잔뜩 두르고 있는 남자를 의심 없이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레이의 영화에 미학적 스타일로 포장되어 등장하던 인도의 이모저모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자신이 성스러운 힘을 가졌다며 대중에게 연설을 일삼는 남자의 정체가 사실 사기꾼으로, 그에 따라 초자연적인 힘과 주술적인 종교의 힘을 부정하고 우스꽝스럽게 퇴장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결말은 여태껏 레이의 영화를 수놓고 있던 "인도적" 이미지들의 장식성이 가져다주었던 숭고미와 비장함의 이면을 들춘다. 여기서 레이는 그 목적이 단순히 코미디 장르 서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관계없이 자신의 이름을 세계영화사에 올리며 영화적 가치로 인정받게끔 했던 이미지에 조소를 보내는 자기반성적 제스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가 단순하게 레이의 필모그래피 중 휴식 단계에 놓인 소품 정도로 치부되는 일은 매우 부당한 것이며, 오히려 이 영화는 사트야지트 레이라는 감독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준다는 점, 혹은 그 고정되어버린 듯한 지위를 흔들어 놓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레이의 필모그래피에서 주목받지 못했으며 이야기와 표현에서도 사뭇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성인>이 고도로 인공적인 미적 양식 아래 특권화됨으로써 동시에 타자화되어버린 자학적 "인도성"에 나름의 진술적인 반항을 하고 있다면, 비슷한 지점에서 방식은 완전히 다르지만 주목할 만한 영화는 바로 레이의 미학적 야심이 최고조에 이른 <뮤직 룸>(1958)이다. 평단에게 있어서는 아시아 영화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 영화는 이야기가 벌어지는 내내 몰락한 영주 로이가 살고 있는 거대한 성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인도의 전통문화를 스크린 위에 즐비하게 늘어놓는 사트야지트 레이의 연출적 습관이 여전하지만, 단순히 그것을 같은 방식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인도적" 이미지의 대다수는 네오리얼리즘 하에 놓여 있는 잉여적 이미지가 아니라, 로이가 돈을 주고 여는 파티에서 출현한다는 점에서 이미 내러티브와 끈끈한 관련을 맺고 있다. 춤과 노래를 목격하기 위해 로이가 값비싼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경제적, 정신적 손실을 겪는 서사적 조건은, 거꾸로 <뮤직 룸>을 보는 관객에게 스펙터클의 이면을 지시하며 자기반영적으로 기능한다.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들이 모두 로이의 몰락을 돕는다는 이야기의 결말은 감각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아도 얼마간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는 일에 대한 부정성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레이의 영화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장소의 이동이 거의 없는 이 영화는 그 파티 장면에서의 춤과 노래의 순간들에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편집 없이 오래 머무르는데, 아무런 사건과 대사 없이 지속되는 춤과 노래를 바라보는 일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스펙터클이 아니라 스펙터클의 무익함 내지 어색함을 폭로하며 훨씬 영화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사트야지트 레이를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해 준 이미지들 속에서, 오히려 그 이미지를 부정하고 지적하며 돌출하여 결과적으로 그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 바깥의 순간들이 레이에 대한 섣부른 판결을 유보하고 이해의 지평을 더욱 넓혀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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