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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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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네마 2020 -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바람의 이야기>2020-05-18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유산, 월드시네마 2020 2020.5.19.화~6.10.수 매주 월요일 상영없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와 떠나는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바람의 이야기>

김지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뤼미에르와 멜리에스 사이, 무인지대에서 일하는 사람. 마르셀린 로리당은 인터뷰에서 요리스 이벤스와 그 자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만큼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바람의 이야기>(1988)는 그런 사람의 에필로그다. 이렇게 쓰고 나면 그 외의 모든 표현은 사족이 된다. 풍차의 나라에서 자란 어린이는 바람을 타고 중국까지 날아가겠다는 꿈이 있었고, 어른이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찍고 싶은 열망을 가졌다. 실제로 요리스 이벤스는 머물지 않는 바람처럼 살았다. 소련, 벨기에, 스페인, 칠레, 베트남, 그리고…… 중국.

 

  그의 이력은 주로 민중과 노동자들의 삶이 격동하는 장소들을 따라 쌓였다. “붉은 심장을 가진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답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투쟁가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도시 교향악이라 일컬어지는 실험적 다큐멘터리 <>(1929)로 일찍이 요리스 이벤스는 영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터를 바라보는 생생하고 아름다운 서정, 그런 마음을 기록하는 자를 시인이라고 하지만, 요리스 이벤스라고도 부른다.

 

  여전히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이 빛나는 노인이 바람을 찾아 떠난 여정은 천연하고 따스하고 때로는 신비롭다. 숨을 쉬는 건 몸속에 바람이 돌아다니는 일이니, 태극권 수련자들을 만나 호흡법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천식이 있는 그는 사부님 말씀대로 가을바람의 운()에 맡기듯 숨을 쉴 수 없다. 세계 각국 바람들의 동향은 라디오로 듣는다. 독특한 암석과 지형들, 오랜 세월 그 자리에 있었을 다쭈 석각과 러산 대불에서도 바람과 물의 흔적을 가늠해 본다. 화려한 연이 수놓은 하늘에서 바람의 존재를 감지하고, 바람을 다스리는 도깨비탈도 얻었다. 산꼭대기에 올라 그 소리도 채집한다. 그 사이 사소한 계기마다 요리스 이벤스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영화와 문학을 넘나들며 각 분야에 대한 사랑을 영화에 새겨 넣었다. 커다란 접시를 닮은 위성 안테나 군집으로부터 후예가 쏘아 버린 아홉 개의 태양 신화를, 화룡점정의 고사(故事)에서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 뒤이어 항아 선녀와 시인 이백까지.

 

  문화 대혁명 이후 중국은 단절된 전통과 역사를 복원하는 동시에 서구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혼란을 겪었다. 요리스 이벤스는 당대 중국이 대면한 변화 또한 바람으로 간주한다. 중국 사회는 기꺼이 스튜디오에서 재연되고, 인민부강(人民富強)을 외치던 연단의 목소리는 얼마 안 가 끊긴다. 팝송 채널을 연결한 손오공의 장난 때문이다. 그는 사회주의의 미래가 중국이 가는 길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확신에 차 조국 찬미가를 부르는 아이들, 흥정을 마치고 씩 웃는 상인, 이국의 노인과 낯선 언어에 겁먹은 아기, 방문자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고 겹겹이 그를 둘러싼 군중 하나하나가 그 변화의 주역일 터. 진시황릉 촬영이 좌절되고 가짜 병용(兵俑)들을 찍는 장면에 이르면 이제 영화는 퍼포먼스 아트 같다. 아니, 이상하게도 <바람 이야기>에선 무엇이든 스스럼없이 영화가 된다. 스태프들이 병사들을 안고 내려가자 장수(將帥)들이 절도 있게 전진한다. 이들은 그가 혐오한 제국주의의 상징이라기보다 한 시대를 닫고 새 시대를 여는 역사의 현장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그 가운데 요리스 이벤스가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람이 만든 모래 언덕 위에 의자를 괴어 놓고 무작정 바람을 기다렸다. 모두가 지칠 무렵 무당이 나타나서 주술과 과학을 기막히게 엮는다. 20세기를 살았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건 과학이 아니었다는 노인의 말은 두 번의 세계 대전에서부터 아슬아슬하게 지나왔을 험지들, 도움을 주고받았던 인연들, 운명이나 우연이라고 자세를 낮추는 그의 카메라가 포착했을 여러 순간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저 멀리서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며 마치 신령처럼 보이는 그는 뤼미에르와 멜리에스의 점유지가 따로 있지 않다는 걸 간단히 증명한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의 경전에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1898년에 태어난 요리스 이벤스는 공히 영화의 역사와 함께 살았고, 세계 역사의 현장과 격전지들을 횡단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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