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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시네마 2020 - 세계영화사 오디세이 <게르트루드>2020-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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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루드>
김필남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게르트루드>(1964)는 삶 혹은 사랑이야말로 고통이라는 것을 영화적으로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고통이야말로 단절 없이 지속되고 미래를 볼모로 만드는 장치다. 즉 삶의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선 롱 테이크야말로 가장 절절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이 도래할 때 눈을 질끈 감는다고 해도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으며, 세상은 편집되지 않으니, 롱 테이크야말로 고통을 통증으로 전이하는 강력한 영화적 바이러스일 것이다.
칼 드레이어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한다면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드레이어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한 편 꼽는다면 그의 마지막 영화 <게르트루드>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단 90개도 되지 않는 숏으로 만들어졌으며, 카메라의 움직임도 거의 없다. 미장센 또한 최소화하고 있는데, 이를 절제의 미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특히 드레이어가 보여 주는 사랑과 기억이라는 감정을 전달하는데, 영화의 세밀한 연출 방식은 더욱 특별해진다. 그 때문에 이 영화를 극단적인 실험 영화라고도 한다. 5분이 넘는 롱 테이크, 차분한 수평 이동 숏, 극도로 절제된 배우들의 연기, 인물들이 정면을 바라보는 응시는 마치 연극 무대에서 관객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을 자아내며, 공간을 활용하는 연출은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나타나는 인물들의 구도 또한 논란이 가중된다. 드레이어는 영화 속에서 인물들을 나란히 배치하기를 즐겨한다. 오프닝 장면을 보자. 나란히 앉은 게르트루드와 카닝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의 관계가 동등해 보인다는 착각마저 든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있지만, 서로를 보지 않은 채 자신들의 말만 이어가기 바쁘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독백하듯 말이다. 남편은 자신의 미래를 논하고, 아내는 사랑 없는 현재가 슬프다. 남편은 아내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내는 사랑 없인 살 의미가 없다. 이미 그녀에겐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 둘의 대화는 마주치지 못하는 시선처럼 공허할 뿐이다.
게르트루드는 이런 사회의 이중적인 면을 갑갑해하며 벗어나려 애쓰는 여성이다. 물론 그녀는 기존에 우리가 보아 왔던 남성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랑받지 못해 자존감이 낮은 여성들과는 다르다. 그녀는 남성의 소유물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체적인 여성이 남성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 게르트루드 스스로 선택하는 엔딩의 고독(외로움)은 마치 자신에게 벌을 부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영화 속 그 자유 의지로 충만했던 여성의 초반부 모습과 달라 아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드레이어는 관객들이 게르트루드의 감정의 변화를 보다 빠르게 느끼게 하기 위해 어둠과 밝음의 이미지, 과거와 현재의 기억, 시각과 청각 이미지 등을 이용한다. 그녀가 행복했을 때는 극단의 밝은 빛을 사용하며, 남성들과 이별했을 때는 검정색과 촛불, 거울 이미지 등을 등장시키며 영화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영화의 엔딩, 카메라는 언제 꺼져 버릴지 모를 붉은 불길에 잠시 머물렀다 지나친다. 마치 게르트루드의 인생이 화로의 불길처럼 다 꺼져 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어쩌면 <게르트루드>는 대화들만을 포착하는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고, 한 여성의 자아 찾기를 다루는 그저 그런 영화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게르트루드>는 만만한 영화가 아니다. 드레이어 감독은 치밀한 계산에 의해 영화를 만들었음을 소품 하나,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드레이어는 이미 <분노의 날>(1943), <오데트>(1955) 등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난과 희생을 정서적인 면으로 접근하려고 한 감독이다. 그는 남성들의 영역이 권력·규칙 등으로 정의되는 세계라면, 여성들은 사랑·희생 등의 추상적인 세계임을 <게르트루드>에서 롱 테이크라는 연출을 통해서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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