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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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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 특별전 II <필름 소셜리즘>2020-06-17
장 뤽 고다르 특별전 II 2020.6. 11.(목)~7. 5.(일)

 

 

<필름 소셜리즘> : 오래된 욕망

이상경 (부산영화평론가협회)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2010)은 난해하다. 지나가는 관객의 일원이라면 이 난해함은 별미로 한 끼를 해결한 멋진 경험으로 반추될 수 있다. 내게도 이 영화는 그렇게 기억되던 영화였다. 그러나 평자가 된다는 것은 일정 기간 동안 별미가 아닌 주식으로 이 난해함과 씨름해야 함을 의미한다. 곤경에 처한 나는 주위를 살폈다. 당연히 많은 국내외 유수 평자들의 호평들 가운데 눈에 띄는 악평이 눈에 들어왔다. 메타크리틱의 평균 평점이 100점 만점에 64점인데 25점을 주면서 이 영화는 하나의 모욕이다. 그것은 관객에게 논리도 없고 미치게 하고 고의로 불분명하고 부주의한 방법이다.”고 말한 평론가가 있다. 지금은 작고한 로저 에버트의 비평 일부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에 대한 평은 많이 갈린다.

 

  한동안의 주식으로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라면 더 오래 씹어도 보고 혀에서 굴려 보아야 한다. 로저 에버트나 나는 무엇을 이해하지 못해 화가 나 있거나 곤혹스러워 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며 대부분의 난해하다는 영화가 공유하는 부분이다. 즉 서사, 스토리다. 이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스펙터클을 좋아하는 관객들조차도 이야기가 있어야 좋은 작품이라고 하며, 노래 경연대회에서도 출연자들의 스토리를 중시한다. 나는 대중적인, 너무나 대중적인 나의 모습에 실망하여 당황한 것인가.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젊을 때 프랑스 문화원을 들락거리며 프랑스 영화를 겉멋으로 보던 시기도 있었고 나름 전위적 영화에 대한 관심도 있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영화에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할리우드 고전기 영화의 위대성을 알게 되고, 존 포드, 이스트우드, 스필버그처럼 이야기가 더 멀쩡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만신전에 추존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던 것 같다. 이런 변화에 나이가 한 몫 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 영화를 보면서 그간 개간된 깊이에 비해 영화의 영토를 너무 좁힌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없지 않다.

 

  문제는 감독의 무능력의 결과로 서사의 가독성이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거다. 로저 에버트가 통찰하였듯 감독은 고의로서사의 전달을 방해하였다. 그 때문에 분개하였지만 이러한 간파가 그를 더 나쁘게 하지는 않는다. 무능력이란 표현 대신 고의적 무관심, 능동적 무관심, 무관심에의 의지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서사전달 방해 행위를 통하여 감독이 의도한 바는 무엇이었을까? 내용과 형식, 자유와 평등, 개인과 사회와 같은 서로 의존적이면서 충돌하는 이항대립적 요소들에서 한 항목의 변화는 다른 대립항목에도 영향을 끼친다. 서사의 반대항은 무엇일까? 가장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미지이지만, 소리, 편집, 매체 등의 기술적 요소들을 아우르는 요소로 스타일을 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스타일의 전경화는 서사가 스스로 의도적 행위로서 뒤로 물러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가 시작하고 그의 스타일을 알아차리는(더 정확히는 서사의 길을 잃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흐릿한 화질로 두 마리의 앵무새를 잠시 보여주고 바로 띠- 하는 노이즈가 나온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고서 이 부분이 스타일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 첫 부분의 어리둥절함 속에서 우리는 다소 연결되지 않는 서사와 산만한 이미지와 소리를 어느 정도 견디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복선일 수 있다는 생각에 별 생각 없이 살짝 기억의 저장고에 넣어 두는 행위가 습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다시 보지 않고는 이런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이 첫 부분은 영화를 다 봐도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 수 없고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비로소 이 부분이 영화 스타일의 많은 부분을 표현하는 숏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앵무새를 스페인어로 loro라고 하고 금을 의미하는 ‘el oro’와 연관이 있으므로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와 맥락이 닿는다는 식의 설명은 진부할 뿐 아니라 기껏 서사를 뭉개버린 노감독의 선의를 뭉개버리는 행위라고 믿는다. 영화에 나오는 많은 다른 동물들, 고양이, 라마, 당나귀, 부엉이 등에 그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시도가 가능하고 느슨해진 서사 속으로 파고드는 기호학적 해석의 유혹들이 없는 바는 아니나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설사 고다르가 꿈속에 나타나서 내게 그렇게 일러주어도 그래요, 훌륭하시네요.” 정도의 대답을 하고 말 것이다. 쌍으로 혹은 혼자 화면에 등장하는 이 귀엽고, 무오하고, 고립되고, 연민을 자아내는 동물들이 영화에서 하는 기능에 대해선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돈()을 둘러싼, 탐욕적이고 전쟁을 일삼는 인류의 행적에 대한 고발이 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라면 이들은 그에 대비되는 존재로 비춰지지만 그냥 어떤 중립적인 책갈피 같은 존재로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에겐 이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첫 디지털 영화이며 화면비 16:9의 영화이다. 1990년대 말까지 고전적 4:3의 비율을 고집하던 그가 더구나 <필름 소셜리즘>이란 제목의 영화에서 필름 대신 디지털 카메라를 집어든 것은 변화를 위한 그의 의지로 읽힌다. 주로 HD로 촬영되었지만 앞서 설명한 앵무새 숏은 DV나 그 이하의 화질로 찍힌 듯하다. 뒤에 나오는 어떤 장면들은 핸드폰이나 CC TV 카메라로도 찍힌 것처럼 보인다. 필터사용이나 후반작업을 통해서 채색이나 탈색, 선명도의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다른 영화나 사진 등의 푸티지를 많이 사용한 점도 눈에 띄는데 그의 전작인 <영화의 역사>(1997)의 또 다른 변주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다양한 붓으로 캔버스, 도화지, 화선지에 유화, 수채화, 수묵화, 콜라주를 작업하는 화가로 자신을 규정한다. 이동이 손쉬운 매체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핸드 헬드를 억제하고 삼각대 위에 자신의 작은 카메라들을 얹는다. 그의 실험이 무한대의 자유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미학적 엄밀성 위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관객들은 이야기를 통하여 감동(앞에서 매혹이라 표현했지만 더 일반적인 표현일 것이다)을 얻고자 하는데 그 매개로 영화의 메시지를 갈구한다. 서사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방해하는 다양한 방식의 스타일을 통하여 감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이야기가 사라진 곳에 어떤 메시지가 가능할까. 고다르는 영화의 물질적 표면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다른 매체와 자신을 구분 지울 수 있는지, 어떻게 문학, 회화, 심지어 TV와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그런데 유성영화 시대 이래로 영화의 물질적 표면에서 사운드를 빼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감독은 앵무새 숏의 얌전한 노이즈부터 폭발적 사운드 혹은 노이즈를 삽입하기도 하고 바람소리나 다른 배경음을 허용하면서, 우리가 일반적 영화에서 보듯 선별적 음원으로부터만 소리를 듣는 것이 실제론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끊임없이 영화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관객의 의식을 물질적 표면으로, 표면으로 되돌려 보낸다. 정신 차릴 것! 물론 감독은 모든 장면의 사운드를 그렇게 처리하진 않는다. 그런 객기는 고다르의 것이 될 수 없다.

 

  요즘의 추세까지 포함한다면 이 영화가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좀 특이한 영화적 구성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제작사, 출연진, 제작자 등의 이름이 앵무새 숏 바로 뒤 즉 영화의 초반에 등장한다. 더 특이한 것은 원전(textos)이라 표기해 놓고 발터 벤야민, 한나 아렌트, 자끄 데리다, 비스마르크, 사르트르, 베르그송 등의 익숙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사의 전달에 무관심하다는 영화적 특징으로 이 영화의 대사가 적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원전 표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감독과 유사하게 마오주의자 출신인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영화에서 강의를 하기도 한다. 철학, 역사, 예술, 영화 내적 드라마 삽화들이 뒤섞여 분절되어 있는 많은 내레이션과 외화면의 대사, 서사와 관련 없어 보이는 대사들로 이뤄진 언어의 난입에서 온전하게 평정한 마음을 갖기는 어렵다. 언어가 멈춰진 순간, 그리하여 순수하게 동물들이 나오거나(앞서 책갈피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휴식이다) 바다 등의 자연이 나올 때 관객으로서 안도하는 일은 이 영화에서 드물지 않다. 훌륭한 원전의 인물들에겐 죄송한 얘기이지만 고다르의 원래 의도는 이들의 모든 언어들이 노이즈가 되고 영화의 거친 표면이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뒤이어 만든 영화가 <언어와의 작별>(2014)이었는데 여전히 분절된 서사와 구토까지 유발할 정도의 어지러운 이미지 속에서 그는 언어와의 작별, 심지어 영화언어와도 작별을 암시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필름 소셜리즘>의 제일 마지막 자막 노코멘트는 차기작의 주제의식과 무관하게 보이지 않는다.

 

앞서 설명한 엔딩크레디트의 전치는 이 영화구조의 또 다른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 이 영화가 만약 미국 영화 비디오라면 마땅히 가장 마지막에 위치할 것이지만, ‘노코멘트앞에 복제금지의 FBI 경고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경고문의 용법은 괄호 밖이 아니라 괄호 안에 내포되어 있다. 어리둥절할지 모를 관객에게 이 경고에 덧붙여 법이 잘못되었을 때 정의가 법에 우선한다.”는 자막은 이 내포를 더 정확하게 부연한다. 적어도 협의의 필름 소셜리즘은 이미지의 지적재산권을 부정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이 영화 안에 포함된 수많은 타자의 이미지, 몽타주, 푸티지는 그의 이러한 실천의 산물일 것이다. 원전에 기술된 사상가들의 언어들도 동일한 범주에서 다루어진 듯하다. 그리하여 언어와의 작별은 먼저 그 소유자로부터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제목이 뜨고 앞선 앵무새 숏에 이어져 대비되는, 바다 표면의 HD 화면은 하이퍼리얼리즘의 그것처럼 선연하고 뒤의 연속되는 숏에서도 발생되는 이러한 효과가 고다르의 손에 들려 있는 다양한 붓으로 인한 대비효과 때문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물을 배경으로 외화면의 남녀는 돈은 공공재야, 물처럼.”이라는 주제를 암시하는 대화를 나누나 우리의 서사적 이해는 여기까지다. 언급했듯 이 뒤부터 이미지와 언어의 난장이 연속된다. 이 영화는 3부의 구성을 가지고 있고 방금 말한 부분은 이러한 것들이라는 소제를 갖는 1부의 시작이다. 1부의 무대는 코스타 콘코르디아라는 초호화 유람선이고 마치 3부의 주제인 위태로운 유럽 혹은 세상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놀라웠던 것은 영화 중간에 퇴선하세요.”라는 경고방송이 나오는데 실제 이 배는 2012년 침몰하여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세월호 악몽과 비견되었던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위태로웠던 것은 결국 침몰하였다. 고다르의 위기에 대한 예언력은 그 배로 끝나야 할 것이다.

 

  1부는 앞서 설명했던 서사의 단절과 스타일의 전경화가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가 마치 이미지의 위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급했듯 바다나 풍경은 쨍한 HD로 촬영되어 있고 굉음의 나이트클럽이나 승객들의 모습은 때때로 DV나 저급한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고다르가 다양한 붓으로 피사체의 위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인데 예외적인 경우도 꽤 있고 그의 전복적 실험이 교조적으로 환원되는 것 같아 이에도 거리를 두고자 한다.

 

  2부는 우리 유럽이라는 소제로 어린 남매가 부모에게 자신들의 성을 쓰지 않겠다고 하며 참정권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1부에 비해 덜 분절적이고 꽤 이해 가능한 드라마 형식을 띄고 있어서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종종 음악에서의 수직적이거나 수평적인 관계의 유비관계로 표현되는데 1부는 화성과 대위법의 견지에서 불협화음과 분절적 선율을 구성한다. 2부는 전체적으로 수평적 진행은 1부에 비해서 밀접하여 연결되어 있으나, 수직적인 부분에서는 불협화음을 이룬다. 이를테면 동생인 남자 아이가 계단에 앉아 있을 때 재즈 풍의 음악이 나오고 외화면의 보이스오버로 어떤 정치인의 공허한 얘기가 흘러나온다. 화면에 보이는 아이의 서사와 음악 사운드, 목소리가 완벽한 분절을 보이나 이런 숏들의 수평적 접합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어 서사의 연속성을 크게 위협하지는 않는다.

 

  ‘우리 휴머니티란 소제의 3부는 가장 적극적으로 푸티지와 몽타주를 활용하며 유람선이 기항하는 6개 도시의 역사와 관련된 폭력적이고 암울한 역사를 짚어간다. 1부가 바르셀로나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던 금이 탈취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극화라면 3부는 다큐멘터리적 에세이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3부는 영화 전체 제목과 부합되는 고다르의 정치적 웅변을 가장 직접적으로 듣게 되는 부분이지만 감독의 영화적 실천이라 부를 만한 1, 2부에 비해 오히려 참신한 부분은 떨어진다. 두 화자가 다소 독립된 내용의 내레이션을 구사하는 3부의 형식도 어느 정도의 눈길을 끄나 고된 코스타 콘코르디아의 항해는 이제 마칠 시간이 다 되었다.

 

  영화를 몇 차례 더 반복해서 보면 서사는 조금 더 분명한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버트의 지적대로 고의적으로 흐릿하게 그려진 윤곽에 내가 연필로 선을 그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선은 영화의 통일적 서사 내부와 카오스의 외부를 분획하면서 서사로 획정된 영토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오래되고 강력한 이 욕망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것 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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