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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장 뤽 고다르 특별전 II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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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n번째 첫 번째를 위하여
김나영(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당신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가 당신의 “두 번째 첫 번째” 영화라고 말했다. 무슨 뜻인가?”
“첫사랑을 하고, 첫 번째 경험을 하고, 첫 영화를 만들 때, 일단 그러한 경험들을 했다면 그것들은 반복될 수 없다. 그 경험이 나쁜 것이라면 그것은 반복이다. 그 경험이 좋다면 그것은 나선형으로 상승할 것이다.”
-조나단 코트와의 1980년 대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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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첫 번째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두 번째 첫 번째가 요구하는 것은 첫 번째 첫 번째의 부정이다. 가령, 첫사랑이나 첫 번째 경험이나 신화 같은 첫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가 특별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일회적이라는 사실, 즉 반복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사랑은 반복할 수 있지만 첫사랑은 반복할 수 없다. 두 번째 사랑에게 당신이 나의 첫 사랑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나의 첫 번째 사랑을 부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은 첫 번째 첫 번째 사랑을 두 번째 첫 번째 사랑이 대체하는 형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두 번째 첫 번째”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고다르의 “두 번째 첫 번째” 영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1980)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은 고다르의 ‘첫 번째 첫 번째’ 영화 <네 멋대로 해라>를 경유하는 것이다. 험프리 보가트를 동경하는 장 폴 벨몽도가 오른쪽으로 총을 쏘면 왼쪽에서 경찰이 쓰러지는 장면들, 훗날 점프 컷이라 명명되며 유명해진 시간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편집, 험프리 보가트와 팜므파탈로 구성된 세계를 향한 매혹, 담배와 자동차와 총이 있는 영화. 이처럼 <네 멋대로 해라>에는 기존 영화의 문법을 과감하게 위반하는 고다르와 험프리 보가트의 세계를 동경하는 고다르가 함께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기존 프랑스 영화를 격렬히 비판한 글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주의 정책을 촉발한다. 이를 통해 작가로 격상된 이들은 당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할리우드 영화감독들이었다. 누벨바그 세대에게 할리우드 영화는 전복의 대상이 아니라 찬미의 대상이었다. 그들에게 히치콕은 위대한 작가였으며, 존 포드, 니콜라스 레이 역시 억압적인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도 작가적 인장을 새겨내는 예술 작가들이었다.
한편으로 이들의 작가주의 ‘선언’에는 명백히 젊은 망나니들(Young Turks)의 영화 찍기를 향한 열망도 담겨 있었다. 이들이 감독이 되기 위해선 먼저 감독의 역량이 중요해야 했다. 그런 다음 이들은 프랑스 영화에는 새로운 역량을 가진 감독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 자신이 격렬히 비판했던 프랑스의 시적 영화 전통 안에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이어나가는 것처럼 보였고, 누벨바그 세대의 출발을 생각하면 이는 명백히 반동적인 행보처럼 보였지만 실상 트뤼포에게 혁명은 그가 첫 번째 영화 <400번의 구타>(1959)를 찍었을 때 이미 완수된 과업이었던 셈이다.
트뤼포보다 ‘정식’ 감독으로서의 데뷔가 늦었던 고다르에게 영화 만들기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에 비해 첫 장편영화 제작이 지연되고 있던 고다르는 트뤼포가 진행하기로 되어 있던 시나리오를 넘겨받아 마찬가지로 트뤼포로부터 소개 받은 제작자 조르주 보르가르에 의해 <네 멋대로 해라>의 연출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샤브롤과 트뤼포가 흥행에 대대적으로 성공한 상황에서 고다르에게 영화 만들기의 당위는 영화 문법의 혁신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 시기까지 고다르에게 미국 영화로 대표되는 주류 영화의 문법은 미학적 갱신의 대상이었지 정치적 비판의 대상은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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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첫 번째를 이야기하기 전에 첫 번째 첫 번째를 이야기한 것처럼, 고다르의 ‘첫 번째 두 번째’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로부터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올린 것처럼 <네 멋대로 해라>로부터 <미치광이 피에로>(1965)를 떠올리는 것은 이 영화가 <네 멋대로 해라>를 고다르 스스로 다시 찍은 것과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고다르의 ‘첫 번째 두 번째’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는 <네 멋대로 해라>에서처럼 장 폴 벨몽도가 등장하고 진 세버그가 맡았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안나 카리나가 연기하고 있으며 총과 자동차도 등장하지만 <네 멋대로 해라>에 없는 감정이 있다. 1960년 장 폴 벨몽도의 죽음에는 얼마간의 낭만성이 있지만 1965년의 장 폴 벨몽도가 연인을 죽이고 그 자신의 머리에도 폭탄을 두른 채 폭발해버리는 순간 보게 되는 것은 바다를 뒤덮는 거대한 멜랑콜리다.
이후 고다르는 <주말>(1967)을 본 한 기자가 “당신의 영화에 피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항변하자 고다르는 “당신이 본 것은 피가 아니라 붉은 페인트”라고 답한 것처럼, “정의로운 이미지가 아니라 단지 이미지”라고 말한 것처럼 고다르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라는 태도로 말하고 있다. 이는 고다르가 당시 견지했던 정치적 미학의 프로그램과 일치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에 고다르가 영화 작업을 자신을 바깥으로 투사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멜랑콜리의 감정이 이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 미치광이 피에로>의 테마는 양립 불가능한 일과 사랑이다. 여기서 일과 사랑을 고다르 자신의 사생활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을 고다르가 사랑하는 영화의 원형으로, 일을 영화의 정치화 차원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68혁명 이전인 67년에 고다르는 이미 마오이즘에 경도된 프랑스 대학생들에 대한 영화 <중국 여인>을 만든다. <미치광이 피에로>에는 베트남전에 대한 고다르의 비판적 입장이 얕은 수준에서지만 분명히 담겨 있다. 60년대의 문화적, 지적,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영화의 미학적 갱신을 거듭하던 고다르는 영화와 정치가 갖는 불가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정치화는 그가 사랑하는 영화와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영화의 멜랑콜리는 이로부터 비롯된다.
미국 영화에 대한 고다르의 태도는 스타에 대한 그의 입장과도 비슷해 보인다. 이를테면, 지가 베르토프 집단 시기 제작된 <만사쾌조>(1972)에 제인 폰다와 이브 몽탕이 출연한 것은 스타와 영화, 스타 시스템과 상업 영화 시스템에 대한 그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예다. <만사쾌조>의 오프닝은 영화와 자본이 맺는 관계를 자기반영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이 영화를 위해 스타를 동원하고 있다. 고다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스타가 아니지만 여기에는 영화에 스타가 등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 자본 논리에 따라 스타를 통해 영화를 상업화하려는 요구에 대한 비판이 있고 <만사쾌조>은 그에 적합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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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는 68년 5월 혁명으로부터 촉발된, 모든 일상 영역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당대의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부응한 감독이었다. “영화의 정치화”를 위해 상업영화 시스템 바깥으로 나간 고다르가 선택한 것은 집단 창작이라는 제작 형태였다. 그는 소비에트의 위대한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의 이름을 따 장 피에르 고랭과 함께 창작 집단을 결성한다. 이들은 기존의 영화 배급 시스템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영화가 한 사람의 작가의 예술이라는 작가주의까지도 부정한다.
뜨거웠던 시작과 달리 미지근하게 끝나버린 68혁명을 두고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도 그의 정치 영화 작업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기 고다르의 작업이 그가 변화시키기를 원했던 세상과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 것은 시스템 바깥으로 존재하기를 자처하며 외부에서 시스템을 공격하는 그의 전략이 맞이한 한계 때문이었다. 정치와 영화가 분리되지 않았던 그가 70년대 비디오시기를 끝내고 내러티브 영화로 돌아왔다는 것은 단지 익숙했던 제작 시스템으로의 회귀만이 아니라 정치적 실패의 인정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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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가 고다르의 후퇴며 회귀라면 ‘두 번째 첫 번째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라는 처음의 질문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가 어째서 ‘첫 번째 세 번째’ 영화가 아니라 “두 번째 첫 번째” 영화인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답할 수 있는 문제가 될 것이다. 퇴각의 이미지에는 ’두 번째 첫 번째‘가 부여하는 새 출발의 이미지보다 ’첫 번째 세 번째‘가 함축하는 불가피한 반복의 이미지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에서 미학적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던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로부터 정치적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던 ‘영화’는 그가 매혹됐던 세계이기도 했다. 그가 시스템 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가 사랑했던 영화는 70년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제외하면 80년대 블록버스터 시대의 시작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쇠퇴의 시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은 고다르에게 혁신의 대상 자체가 중병을 앓고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미치광이 피에로>에서와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서도 일과 사랑의 테마가 있지만 페르디낭과 달리 폴 고다르는 이미 한 번의 이혼을 경험한 상태며, 애인과도 삐걱대는 중이다.
즉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가 고다르의 ‘첫 번째 세 번째’ 영화가 아닌 것은 첫 번째를 세 번째로 반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 ‘두 번째 첫 번째’라는 새 출발은 역설적으로 ‘첫 번째 세 번째’의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했던 셈이다. 물론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멜랑콜리 역시 이 때문에 발생한다. 첫 번째 첫 번째 사랑과의 깨어진 약속으로 인해 두 번째 첫 번째 사랑의 선언이 그 충실성을 의심 받는 조건 속에서 장 뤽 그리고 폴 고다르는 불안과 신경증,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서 감각되는 감정들은 <미치광이 피에로>의 개인적 파토스와 다른 층위에서, 그 자체로 ‘영화’가 위치한 현실을 드러내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고다르가 스톱모션을 통해 낯설고 상이한 속도의 움직임을 만들어낼 때 장면의 선택 논리 역시 그 자신의 주관적 감정의 반영에 있다. 따라서 각각의 장면에서 스톱모션이 이용된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수고가 될 것이다. 그는 자전거 페달을 밟는 움직임과 두 사람의 격렬한 부딪힘은 다른 움직임들과 다른 속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다르에게 문제는 상업 시스템 속 영화들이 균일한 속도로만 진행됨으로써 감정의 재현이 균질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다르의 주관적 차원의 감각의 재현은 당대 영화들 전반의 속도에 대한 사유로 확장된다.
<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서의 주관적 감정의 투사가 정치적 차원으로의 매개로 기능하는 측면은 사운드 운용에서도 드러난다. ‘보스’로 불리는 매춘 구매자의 변태적이고 복잡한 요구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시각과 사운드를 동기화할 것’이다. 이상한 소리의 연속, 전화벨소리의 소란을 중단시키는 것은 보스의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던 이자벨의 내면의 목소리다. 이자벨이 그의 얼굴에서 보는 것은 “자부심과 야만적인 힘, 비참한 공포, 그리고 절망”이다. 나는 ‘시각과 사운드의 동기화’ 장면에서 시각과 사운드의 불일치만이 드러낼 수 있는 두 가지 감정을 함께 느낀다. 혐오와 “치유할 수 없는 한없는 절망”.
폴 고다르가 자동차 사고를 당한 뒤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보기 전 황당하게도 카메라는 그의 전처를 따라 자리를 떠나 버린다. 그의 딸이 걷는 화면 위로 음악이 흐르고 곧 디제시스 안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이 나타난다. 장 뤽 고다르는 관객들이 극적인 상황에서 음악을 ‘보고’싶어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장면을 구성했다고 밝힌다. 사운드와 시각의 진정한 일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눈치 채기 어렵지만 ‘영화’들이 절정의 내러티브에 합치되는 감정을 고조시킬 때야말로 시각과 사운드가 불일치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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