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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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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빔 벤더스 특별전 '다큐멘터리에서의 빔 벤더스 감독론'202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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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와 오즈 야스지로, 그리고 <도쿄가>
김영광(부산영화평론가협회)
“아이가 아이였을 때 팔을 휘저으며 다녔다
시냇물은 하천이 되고 하천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가 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자신이 아이란 걸 모르고 완벽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세상에 대한 주관도 습관도 없었다. 책상다리를 하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머리가 엉망이었고 사진 찍을 때도 억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베를린 천사의 시>의 인트로
이미지의 논리
벤더스는 후에 자신의 대표작이 된 <베를린 천사의 시>(1987)를 찍기 전에 오즈 야스지로에 관한 다큐멘터리 <도쿄가>(1985)를 찍었다. 스스로 “하늘에서 땅에 이르는 로드무비”라고 평가한 <베를린 천사의 시>는, “모든 전직 천사들에게 바침. 특히 야스지로, 프랑소와, 안드레이”라는 아웃트로를 가지고 있다. 노래가 끝난 뒤 DJ의 익살이라는 뜻을 가진 아웃트로처럼 벤더스 영화의 시작점은 ‘음악’이었다. 벤더스가 예술가의 자의식을 가진 시작점은 ‘회화’였으며, 영화 카메라를 들기 5년 전부터 그는 ‘사진’을 찍어댔다. 7살 무렵이었다.
미리 결론을 말해두고 싶다. 벤더스가 만든 다큐멘터리들은 ‘잘 나가던’ 벤더스의 로드무비들, 극영화들과 차별지점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벤더스가 만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은 얼마간의 성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꼭 성자까진 아니더라도 평범함에서 비범함이 묻어나는, 기인이자 가인이다. 최근에 만든 <프란치스코 교황: 맨 오브 히스 워드>(2018)는 말할 것도 없지만, 후기로 갈수록 벤더스의 다큐멘터리들은 단순해졌다. 점점 보는 것에서 듣는 쪽으로, 경청의 자세를 요구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한때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 ‘유랑의 감독’으로 잘 나가던 벤더스를 떠올리면 그는 ‘로드무비의 왕’이란 칭호를 내려놓은 듯했다. 실제로 그가 만든 근래의 극영화 두 편은 집 근처와 의자 위에서만 성립되는 듯이 보인다(<에브리띵 윌 비 파인>(2015), <뷰티풀 데이즈 오브 아란후에즈>(2016)).
<도쿄가>의 경우 단순하지만은 않다. 벤더스가 이미지에 관한 자의식을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내뱉기 때문이다. 다소 두서없이 즉흥적으로 뱉어내는 벤더스의 목소리는 <도쿄가> 역시 “순례의 길”은 아니라고 말한다. 벤더스는 금세기에 신성한 보고로서의 작품을 남긴 감독은 오즈이지만, 그가 만든 “성물(relic)” 같은 순간조차 영화라는 상상의 세계가 접목된 산물임을 인지하고 있었다(왜 아니겠는가, 본인도 영화감독인데). <도쿄가>에서 벤더스는 오즈가 무(無)로 돌아간 지 20년이 지난 도쿄의 풍경을 보고 ’듣는다‘. 물론 지금 도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오즈가 담아냈던 풍경과 너무나 달라진 도쿄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그 풍경의 질료들이 들려주는 듯한 무언의 얘기들을 경청한다. ‘느끼기’ 위해 경청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벤더스가 자기 영화의 시작점과 자신이 만드는 이미지의 논리를 음악으로 꼽는 것은 영화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을 중요시하는 까닭이다. 벤더스는 자신의 장편 데뷔작 <도시의 여름>(1970)이 “나의 MUSIC TOP 10”을 들려주기 위한 욕망에서 시작되었다고 그의 저서 「이미지의 논리」(1991)에서 밝힌다.
역방향의 논리
<도쿄가>의 흥미로운 부분은 벤더스의 자세가 변모하는 지점이다. 벤더스는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내 상영 중인 영화를 보게 된다(“꾸며진 공허한 이미지”). 그 바람에 창공을 가르는 비행기의 날개에 매료된다(“부족함이 없는 이미지”). 그런데 도쿄에 착륙하여 유랑을 하던 벤더스는 욕망의 좌표를 재설정하게 된다. 벤더스는 “진실한 실체”를 담아냈던 오즈의 성물을 다시 목격하는 것, 달라진 성물의 질료들에게 푸념하는 것을 단념하기로 한다. 대신 그 성물을 가능케 했던 질료들을 고유한 ‘회화’처럼 감상하는 것, ‘음악’처럼 듣고 느끼는 것, 그 느낌들을 똑같은 촬영이 불가능한 ‘사진’처럼 기록하고 보존하는 소기의 목적에 집중한다. 관람자가 벤더스의 소기의 목적, 재설정된 욕망의 좌표를 인지했을 때 불현듯 환기되는 것은 <도쿄가>의 도입부에서 벤더스가 뱉은 소외 효과성의 말들이다. 벤더스는 “83년 봄에 도쿄에 왔지만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며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면 더 기억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후로 등장하는 선물 같은 순간들도 일반형의 편집을 거친 결과물이며, 이 다큐멘터리 또한 질료의 가능한 한 보존과 공유라는 일반영화의 존재방식임을 전제하는 것이다.
벤더스의 욕망이 재설정된 이미지의 논리는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보존하고 공유하는 것’에 불과하다. 벤더스가 「이미지의 논리」에서 밝히고 인용하는 논리들도 그렇다. 영화이론가 벨라 발라즈의 영화의 사진적 존재론(“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은 사물을 구한다.”), 발라즈가 인용한 화가 세잔의 자의식(“사물들은 사라진다.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서둘러라.”). 결국 ‘존재의 보존이며 보전’이란 예술 일반의 존재론, 영화 매체의 기본자질에 불과한 것이다.
<도쿄가>에서 벤더스는 ‘지고의 이미지(창공을 가르는 비행기의 날개)’를 얻고 싶어 했으나, 도쿄를 유랑하며 그 ‘욕망의 날개(지고의 이미지)’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배움을 얻는다.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술 일반의 존재론, 영화 매체의 기본자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단순한 배움을 얻는다. 도쿄를 유랑하며 만나게 된 뉴 저먼 시네마의 동료 베르너 헤어초크가 얻는 배움과는 반대 방향이지만 말이다. 헤어초크는 “됴코는 빌딩 숲밖에 없고, 참다운 이미지를 얻기 위해 전쟁의 한복판이나 8000m 산정에라도 올라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문명과 내적 자아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화성이나 목성에라도 가겠다.”고 강변한다. 벤더스는 그의 말이 공감은 되지만 “내가 찾으려는 이미지는 오로지 이 아래에 있다.”고 독백한다.
벤더스의 데뷔작은 독일을 떠나 미국행을 꿈꾸는 ‘비행기의 날개’에서 끝났었다. <도쿄가>에서 매료된 ‘지고의 이미지’와 똑같은 모양새였다.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굴지의 감독들을 모아놓고 “영화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묻는 벤더스의 다큐멘터리 <방 666>(1982)을 보면 <도쿄가> 없인 <베를린 천사의 시>도 없을 거라 느낄 수 있다. 알려진 대로 <베를린 천사의 시>의 원제는 <욕망의 날개>이다. 평범한 사람들을 보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천사가 ‘느끼기’ 위해 날개를 내려놓는 얘기다. 벤더스의 말대로 “하늘에서 땅에 이르는 로드무비”이자, 한편으론 파시즘을 가능케 했던 질료들을 피해 텍사스의 사막까지 유랑했던 벤더스가 조국 땅으로 돌아오는 ‘역방향의 로드무비’이다. <파리, 텍사스>(1984)는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돌아올 수 있는 논리가 없어 도로 떠나가는 유랑자의 얘기다. <도쿄가>는 벤더스에게 ‘역방향의 논리’를 선물했다. 그 논리도 벤더스는 유랑으로 획득했다.
유랑의 논리
벤더스는 <도쿄가>의 시작과 끝을 오즈의 대표작인 <동경이야기>(1953)의 오프닝과 엔딩으로 장식하고 있다. 오프닝은 노부부가 자식들을 만나러 도쿄행을 준비하는 모습이고, 엔딩은 아내를 여윈 남편이 부채질을 하며 혼자서 멍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다. 다소 울적한 음악이 흐르다가 곧이어 애잔한 음악으로 탈바꿈한다. <도쿄가>에서 벤더스의 유랑에 해당하는 <동경 이야기>의 몸체는, 노부부의 도쿄 유랑기다. 자식들을 언제 또 볼 수 있겠냐는 마음으로 도쿄에 왔으나 어쩔 수 없이 떠돌게 된다는 처지에서 그렇다. 자식들은 노부부를 귀찮아하고, 미망인 며느리만 노부부와 함께한다.
<동경 이야기>의 도쿄 유랑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세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하나는 노부부와 미망인 며느리가 공유하는 ‘동심의 태도’ 같은 것이다. 이 영화에서 자식들은 상처를 주는 언동을 계속하는데, 노부부와 며느리는 ‘그래도 함께하는 것’이 좋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특히 자식들의 집에서 떠밀려 유랑에 나선 노부부와 휴가를 내고 달려온 며느리가 고층 건물에서 나누는 대화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대도시로 놀러 온 친구에게 다른 친구들의 집을 알려주는 것처럼 다정다감하다(“오빠네 집은 이쪽이구요”, “언니네 집은 이 주변이에요”, “제 집은 이쪽이에요”).
다른 하나는 동심의 태도와 관련된 몸가짐이다. 노부부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와중 아내의 병세가 위독해지고 고향 땅에 당도해 숨을 거둔다. 고향에 도착한 자식들은 안타까워하지만 이내 도쿄로 돌아간다든가, 혼자 남을 아버지가 처치 곤란이라는 둥의 말을 서슴없이 나눈다. 아버지는 “바쁜 와중에 와줘서 고맙다.”며 은은한 미소를 잊지 않고, 며느리는 모두 이기적이라고 상심한 노부부의 막내딸에게 미소를 잃지 않고 공감을 해준다(“그래, 싫은 것 천지야”).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쓰미 시게히코가 오즈 영화에서 지적하는 위험을 동반하지 않은 유희는, “상대가 적의 없는 표정으로 미소 짓는 것을 보았을 때 누구든 ‘휴’하고 안심”하는 교화적 기능을 뜻한다. 그것은 서로에게 상처를 더하지 않는 ‘동심의 몸가짐’, 유희의 마음가짐일 것이다(“그런가, 그런 건가”, “그래요, 그런 거예요”, “아무래도 그런가”).
마지막은, 이 도쿄 유랑기가 환기하는 ‘유랑의 논리’다. 노부부는 도쿄 유랑을 마치기 전에 교화적인 대화를 나눈다. “우린 운이 좋은 편이지”, “우리는 잘 된 거예요”, “그렇지, 행복한 편이지”. 그렇게 도쿄를 함께 유랑했던 아내는 생을 마감하고, 고향에 홀로 남겨진 남편도 사라져 가야 한다. 이 ‘사라져 가야 함(無)’이 애잔한 느낌으로 공유되는 것이 <동경 이야기>의 결말이자 오즈 영화에서 말해지는 필로우 쇼트(無)다. 이러한 결말을 직감하고 슬퍼하는 이는 미망인 며느리밖에 없고(“이상하지, 자식들보다 타인인 네가 더 잘해줬단다”), 아내를 여윈 남편은 이웃과의 대화를 핑계 삼아 소회를 밝힌다(“좀 더 잘해 줄 걸 하고 후회가 되네요”). 이상하지, 그래도 ‘함께하는 것이 좋다’는, 그러려면 ‘서로에게 상처를 더하지 않는 몸가짐’이 필요하다는 ‘유랑의 결과물’이 가장 아이 같던 세 사람의 작별이라니. 이들이 함께한 유랑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마음에 걸리는 건 “타인인 네가”, “좀 더 잘해 줄 걸” 같은 겸연쩍은 말인데, 아마 그 겸연쩍음에 벤더스가 본 유랑의 논리가 있을 거다. 겸연쩍게도 그건 함께하는 것과 함께 유랑하는 것에 논리가 필요 없는 논리, 헤어져야 하고 누군가 사라져가야 하는 것이 그저 애달픈, ‘동심의 논리’일 것이다. 당연히도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동심에는 논리가 없다. 동심의 논리가 필요한 것은 동심에도 논리가 필요한 어른들뿐이다. 어른들에게 동심이란 <베를린 천사의 시>의 인트로처럼, 시처럼, “아이가 아이일 때”를 무한히 읊어대야 느낌으로만 가질 수 있는 무형의 논리다. 이 논리를 소유하려면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필요 이상의 것이라면 가질 필요가 없고, 필요 이상의 것이라면 무형의 것들(지고의 이미지, 욕망의 날개)조차 내려놓아야 한다. 되도록 일반형의 인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때 ‘새로운 유랑’이 가능해진다. 유랑은 유랑을 하는 자라는 ‘유랑자의 논리’가 가능해진다. 애초에 가져갈 것도, 소유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유랑을 계속하려면 더 내려놓고, 잘 느끼고, 또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유랑자의 논리
벤더스가 만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유랑자다. 그들의 존재와 예술은 ‘유랑의 결과물’로 얻어진 것들이다. 유랑 끝에 ‘자기 일’을 찾고 새로운 유랑을 시작했다. 벤더스도 다르지 않다. 스탭들과 유랑을 하며 로드무비를 만들었고, 유랑자들의 결과물을 다큐멘터리로 공유하며 ‘자기 일’을 갱신했다. 그래서 벤더스의 영화들은 차별지점을 가지지 않는다. 벤더스의 사진집 「한번은」(2011)은 평생 오즈 옆에서 ‘자기 일’을 한 유하루 아츠타에게 바쳐졌다. 유랑자의 논리다.
어떤 면에서 집의 안팎을 겉도는 오즈의 남자들도 유랑자였다. 집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는 여자들도 그랬다. 오즈가 부초(浮草)에 관한 이야기를 두 번 찍었듯이 오즈는 계속해서 작은 유랑을 다뤘다. 내려놓고 돌아오길 반복했고, 끝에는 늘 애잔함을 공유했다. 작은 유랑자의 논리를 다뤘다. 오즈의 필로우 쇼트의 정수는 무(無)를 소유하려는 것이다. 자신도 ‘사라져 가야 함(無)’을 소유하려는 노력 끝에 죽음으로 완수될 수 있는 ‘아와레(슬픔의 감동사)’를 공유하는 것이었다. 무상함이라는 일말의 비극성도 내려놓으려는 일반형의 죽음이자, 수없이 무(無)로 돌아간 것들과 함께하려는 작은 예쁨 하나만 가져간다. 그 어여쁜 느낌 하나, 덕분에 애잔하다.
벤더스가 사라져간 뮤지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여러 편, 제작 중에 타계한 무용가 피나 바우시에 관한 다큐멘터리 <피나>(2011)를 3D로 만든 것은 단순한 연유이다. 사라져간 그들의 존재를, 예술을, 몸가짐을, 한번 ‘느껴보시라는 것’이다. 때로는 지금 무(無)를 소유하려 노력하는 가인들의 몸가짐을, 기인들의 유랑기를, ‘한번은’ 느껴보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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