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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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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빔 벤더스 특별전 '극영화에서의 빔 벤더스 감독론'202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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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장소들>; 빔 벤더스의 극영화를 중심으로.
이동윤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빔 벤더스의 영화는 로드무비의 궤를 그려낸다. 이상할 만큼 그는 길에 집중한다. 누군가 나에게 벤더스의 영화를 압축해서 정의해달라는 요구를 한다면 ‘음…사람들이 길을 계속 걷는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벤더스는 리얼리즘적인 영화를 찍는다.’라고 얘기하기도 머뭇거려진다. 그의 영화가 당도했던 지점은 노스탤지어적 낭만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판타지스러운 면모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해 보이는 점은 인물이 발을 내딛는 장소가 지니는 이상한 불문율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 장소는 특정한 목적에 의해 도착했다기보다 이곳저곳 발걸음이 나아가는 흔적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범인이 범행현장에서 증거를 남기듯 벤더스의 영화 속 인물은 발자국의 내딛음과 머무름을 통해 장소라는 증거를 남긴다. 그렇게 오고 가는 물리적 운동은 마치 인물과 장소를 하나의 통일된 집합처럼 보이게끔 하는 착각마저 느끼게 한다. 물론 영화라는 매체에서 배경과 공간은 언제나 중요한 컨텍스트다.
벤더스의 영화 속 장소는 유독 중요해 보인다. 배경과 공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구태여 좁은 범위의 ‘장소’라고 표현하는 것은 로드무비로 대표되는 그의 영화가 해당 장르의 틀 속에서 특정 궤도를 순환하는 측면이라기보다 파편화되고 흩뿌려진 개별적 사례를 연결시킨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길은 전진이라기보단 횡보에 가깝다. 이쪽저쪽을 오가는 배회의 걸음걸이, 혹여 앞으로 나아간다 해도 어떤 이유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도 하는, 인물들의 미완성 행로는 특정한 장소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아다닌다. 인물 역시 뚜렷한 목적 없이 부유하듯 그들이 새긴 궤적은 그 장소를 닮는다. 예컨대 <파리,텍사스>(1984)의 광활히 펼쳐진 텍사스의 사막과 영화의 엔딩에서 트레비스(해리 딘 스랜튼)가 차를 타고 갈 때 그 뒤에 비치는 네온사인 불빛의 도시는 색온도에서 차이를 지니지만, 둘 다 공허하다. 벤더스 영화에서 우리는 이상한 교착 상태와 마주하는데 이는 앞뒤로 꽉 막힌 길과 장소, 혹은 대비를 통한 충격요법이 아니라 카메라가 미세하게 잡아내는, 장소가 뿜어내는 쓸쓸한 아우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땅으로 부딪힌다. 장소는 자연적으로 땅 위에 놓인 풀, 꽃, 나무, 숲과 인위적으로 건립된 집, 상점, 건물, 도시에 이르기까지 결국 땅에 뿌리를 딛고 살아가는 곳이다. 벤더스의 로드무비가 여타의 로드무비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인물이 발을 내딛는 장소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진다는 점일 테다.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히 인물일 것인데, 나는 종종 그의 영화 속 장소가 종종 주인공 같은 인상을 받는다. 좀 더 들여다보면 나는 <베를린 천사의 시>(1987)와 <멀고도 가까운>(1993)으로 이루어진 ‘천사 연작’에서 베를린이 아닌 무대를 상상하기 어렵다. 그 영화는 전후 세대의 독일인과 통일 직전과 직후의 독일인의 그림자를 옮겨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 텍사스>의 마음속 파열이 일어나는 장소가 서부 텍사스가 아니고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벤더스의 영화는 장소가 인물과 함께 걷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까. 그의 영화 속 장소와 풍경들은 영화 속 캐릭터를 채색하며 그 자체로 영화 내 서사를 부여하기도 한다. 결국에 이 질문은 결국 장소로 귀결해야 할 것이다.
<파리, 텍사스>에서 텍사스의 사막은 주인공 트레비스와 닮아있다. 영화가 시작하고 25분이 지나서야 말을 꺼내는 트레비스의 이전 행적에 대해 영화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벤더스는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어디서, 얼마나 걸어왔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트레비스를 황량한 사막 한복판에 마주하게 함으로써 해당 장소가 가지는 쓸쓸함, 고요와 적막을 인물에 녹여낸다. 이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서부의 사나이’의 표본 같은 인상을 주는데 이 같은 설정에 관해 소위 말해 ‘웨스턴’ 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기꺼이 존 포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벤더스가 영화를 만들어 낸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충분히포드의 영향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존 포드, 니콜라스 레이, 오즈 야스지로, 로베르 브레송의 열광적인 팬을 자처했다. 벤더스가 존경한 선배들의 영화 클립이 그의 영화 안에 등장하기도 하며, 포드의 경우 그의 부고 소식을 <도시의 앨리스>(1973)에 삽입하여 영화 안에서 애도하기도 했다. 다시 <파리, 텍사스>로 돌아와서 살펴보면 여기엔 두 가지의 문명이 충돌하고 있다. 나는 <도시의 앨리스>의 뉴욕-암스테르담-‘독일’로 이어지는 여정을 보고 난 이후에 이 영화를 봐서 그런지, ‘아 이번엔 텍사스-파리를 오가겠구나’ 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다 보면 ‘텍사스’주 내 ‘파리’ 마을이었다. 그럼에도 여기엔 미국과 유럽이 충돌한다. 말하자면 웨스턴의 장르를 수혈한 벤더스가 유럽의 방식으로 미국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웨스턴의 풍경과 캐릭터의 뼈대만 남고, 벤더스 자신의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적인 배회의 움직임을 통해 해당 장르를 소격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끌고 나간다.
독일인인 벤더스가 미국이라는 지형과 풍토에 대해 고민한 흔적은 <파리, 텍사스> 뿐 만 아니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벤더스가 태어났던 시기와 맞물린다. 1945년생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조국이 스스로의 본성을 지워내고, 파괴하고, 재건하는 것을 보며 자란 세대다. 그 속에서 라디오를 통해 미국 문화인 팝과 락을, 바다가 건너 ‘저쪽 나라’에 대한 동경을 마음속에 싹 틔웠다. 그는 이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초청을 받아 만든 <해밋>(1982)을 연출하게 되었지만 제작자인 코폴라의 갈등으로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된다. 아마 이 경험을 통해 <사물의 상태>(1982)와 같은 영화 제작 현장을 다룬 영화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겠지만, 이 과정들에서 벤더스는 무엇보다도 미국과 유럽이 가지는 공간의 근본적 차이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리스본 스토리>(1994)는 어떤가. 이 영화의 서사는 리스본에 도착한 사운드 엔지니어 필립(루디거 보글러)이 사라진 영화감독 프리드리히(파트릭 보쇼)를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돌아다니며 좋은 소리를 입혀나가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벤더스의 영화에 꾸준히 등장하던 보글러는 이 영화에선 무성영화의 대선배인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이 선보인 슬랩스틱을 선보이기도 한다. 거구의 인상 좋은 중년의 사내가 소리를 찾겠다며 마이크 선을 돌돌 말아 허리에 감싸고, 그 큰 붐 마이크를 어깨에 짊어진 채 리스본의 골목을 천진난만하게 달려가는 모습과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사이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다소 뷸균질적으로 보인다. 이 불균질함은 천혜의 항구도시로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이지만 카네이션 혁명으로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리스본의 근현대사와 조응하며, 인물의 성격적 특색이 해당 장소로 흡수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반면에 ‘포스트 9·11’을 다룬 <랜드 오브 플렌티>(2004)의 경우, 미국을 굉장히 낯설게 그리고 있다. 종종 미국 국기가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유럽 어딘가에서 찍혔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선교활동을 하던 라나(미셸 윌리엄스)가 중동인 하산(션 터브)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자 “장소를 따라오지 않고 사람을 따라 왔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의 이전 영화에 등장한 맥락들과 배치된다. 하지만 9·11 당시의 기억으로 경기를 일으키고, 특정 인종의 사소한 행동마저 경계하는 모습들을 폴(존 딜)을 통해, 미국인으로서 마주하고 살아가게 될 장소에 대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색적 질문을 미국인이 아닌 제3자의 시점에서 전개시킨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만 영화는 미국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견지하기보다는 라나와 폴이 차를 타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장면과 무너져 내린 쌍둥이 빌딩의 재건을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전후 독일과 베를린이 폐허 속에서 회복한 것처럼) 미국과 뉴욕을 재성장의 위치로 복원한다.
그렇다면 타임라인을 조금만 앞으로 당겨 <도시의 앨리스>를 떠올려보자. 작가인 독일남자 필립(루디거 보글러)은 뉴욕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공항에서 앨리스(옐라 로트렌더)라는 소녀와 아이의 엄마 리사(리사 크루저)를 만난다. 이들이 다시 독일로 가려면 암스테르담을 경유해야 한다. 하지만 엄마는 엘리스를 필립에게 맡겨둔 뒤 떠난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둘은 기약 없이 엄마를 기다리거나, 엘리스의 할머니 집을 찾아 이곳저곳을 오간다. 이 영화에는 미국과 유럽이라는 두 개의 물리적으로 다른 장소가 존재한다. 필립이 사진을 찍어내며 장소를 포착하는 것처럼 뉴욕의 시간은 필립의 느슨함과 머뭇거림으로 그 관념 자체가 정지되고 있는 것 같다. 반면에 필립과 앨리스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유럽의 장면부터는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뉴욕에서 뚜렷한 목적지가 없던 필립은 전혀 다른 세계의 접촉자를 우연히 만나며 변모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자신의 맡은 기행문을 쓰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풍경을 찍곤 하던 필립은 유럽으로 넘어가며 사진을 아예 찍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진기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앨리스가 카메라를 언급하며 그를 찍어준다. 사진을 찍던 필립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사진을 찍히게 된다. 대비되는 공간에 대한 연출 양식의 차이는 이후에도 이어진다. 오프닝에서 비행기를 앙각으로 찍어낸 영화는 엔딩에서 기차를 부감으로 찍는다. 극단적인 숏의 시점을 대비시키는 이 두 장면은 어디론가 향해야 하는 벤더스 영화의 공통분모로 이행할 뿐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숏을 선택함으로써- 물리적인 반경을 단숨에 초월하여 필립과 앨리스가 나아가는 방향과 길을 조망한다. 배경과 공간을 보여주는데 특화된 익스트림 롱숏은 벤더스가 공간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숏이다. 익스트림 롱숏의 극단적인 사용을 보여주는 <베를린 천사의 시>(이하 베를린)와 <멀고도 가까운>에 대해 언급해보고자 한다.
앞서 밝힌 대로 해당 연작의 공간이 베를린이 아니라면 가능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오로지 베를린 이여야만 가능한 영화다. 사실 연작이 다루고자 하는 깊이는 쉬이 가늠하기 어렵다. 이는 내면의 고통, 자기연민과 합리화 같은 사적인 고민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벤더스는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베를린의 풍경을 끌고 들어온다. 이 점이 나를 멈칫하게 한다. <베를린>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내적 고민을 겪는 인간 세계를 두루 살피던 다미엘(브루노 간츠)과 카시엘(오토 샌더)이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촬영장을 방문한다. 촬영장 이곳저곳을 오가는 카메라의 움직임 가운데, 수용소 세트장이 등장한다. 엑스트라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영화 스태프들은 이들의 의상을 고쳐주기도 한다. 카메라는 달리숏으로 천천히 세트장을 선회한다. 40년대 2차 세계 대전의 설정을 80년대 현재로 옮겨오는 것은 그리 대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천상의 천사들이 지상의 인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설정을 이 장면에서 다시금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엑스트라들은 “아침부터 계속 이러고 있어. 추워 죽겠어”, “난 변치 않을거야”, “옛날 동료는 훌륭했었는데” 등의 대사를 마음속에서 읊조리고, 그것은 천사들에게 속속들이 들려온다. 나는 이 장면이 재현된 사건을 통해 사람들의 심정을 듣던 영화의 에피소드 중 하나가 아니라, 지금 현재 2차 세계 대전을 겪는 인물들처럼 느껴졌다. 더욱이 2차 세계 대전을 실제로 겪은 엑스트라 할머니의 속마음 뒤로 전후의 베를린이 무너지는 실제 영상클립이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는 유독 익스트림 롱숏과 달리숏이 많이 등장하는데, 높은 고도 위에 떠다니는 천사의 시점인 익스트림 롱숏은 그렇다 치더라도 베를린 시민을 추적하는 그 느긋한 달리숏이 이 영화의 허무한 정서를 배가한다. 또한 <베를린>에서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인물들의 내면은 소리로 들려온다. 이 개별적 내레이션은 영화 속 배경 음악과 동일한 효과를 주기도 하는데, 이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폐허와 부서진 이미지들과 더불어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진 물리적 단절처럼 정서적으로 단절된 당대 독일인의 정서를 투영한다.
벤더스는 그의 필모그래피의 성격과 다소 대치되는 천사의 설정을 끌고 와서라도 이들의 이야기를 내밀하게 들어보기를 권유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허무에 대해 마냥 끌어안고 있지는 않은데 “독일을 지배했던 건 자기만의 암호로 나라를 정복하고 통치하던 놈들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놈이 없다. 그러나 국기를 흔들면서 외국으로 나갈 생각만 하는 사람은 많다”라고 말하는 택시 기사의 내레이션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또한 시종일관 관찰자이자 하늘 위에서 조망하던 다미엘이 서커스 단원인 마리온(솔베이그 도마르틴)을 만나고, 처음으로 사람을 낮은 높이에서 올려다본다. 자신이 맡았던 임무인 조망과 관찰에서 상하의 위치가 바뀐 카메라의 시선 변화는 동경의 대상으로 기능한다. 이후 “세상으로 파고들어야지” 라는 말과 함께 인간으로 변하는 다미엘의 모습은 영화의 서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장면은 내적인 관념에서 그칠 것이 아닌 실천적 태도로 이행한다는 벤더스의 사적 고백이 담겨 있다. 아마도 벤더스는 자신의 유년기가 투영된 전후 상황의 물리적 파괴와 분리 잔존이 당대까지 이어짐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감정들을 표현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후속작인 <멀고도 가까운>의 주인공 카시엘이 비교적 빠르게 천사에서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은 베를린 공간의 분리 불안적 요소가 이미 해소되어있음을 선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두 영화가 지녔던 완고한 형식에 비추어 볼 때, <멀고도 가까운>이 다소 안전하고 평범한 구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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