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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머스페셜 2020 <보름달이 뜨는 밤>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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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뜨는 밤> :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쓸쓸함에 대해
구형준 (부산영화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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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로메르는 <해변의 폴린느>(1983)를 공개한 뒤 <보름달이 뜨는 밤>(1984)을 만들던 도중 클로드 베일리, 알랭 카르보니에와 인터뷰를 가진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감독을 화가와 건축가, 두 유형으로 분류하며 후자의 감독들이 “영화를 촬영하기 전부터 공간이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말한다. 그리곤 이 건축가적 감독들의 “영화적 목표란, 기존의 공간을 우리 눈앞에 살아 있게 만드는 것, 즉 (영화 속) 사물 간 관계가 실제 세계와 닮은 공간이 되게 하는 것”이라며, 프리츠 랑과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그러하고, 자신 또한 이 그룹에 속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로메르의 영화적 지향점을 분명히 드러내준다. 하지만 오해해선 안 된다. 영화의 공간을 실제 세계와 닮도록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재현의 리얼리즘을 뜻하는 게 아니며, 반대로 영화를 세계와 동일선상에 놓는 존재론적 확장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로메르에게 ‘공간’이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볼 수는 없는 어스름한 것에 가깝고, 그는 다소 보수적인 방식일지라도 단호하게 그 ‘어스름함’을 지키며 세계를 표현해왔다.
조금 우회해보자. 회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로메르는 누구보다 피카소를 좋아했지만, 그 애정 속엔 고전적인 초상화를 그리던 어린 날의 피카소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말아야한다. 그는 “지금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며 경탄하는 이유는 그것이 새롭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재능 때문”이라며 다분히 현대인 같은 말을 하다가도, “잭슨 폴록은 화가가 아니”라거나 “동시대의 추상화들은 끔찍하”다 하고, 그보다 “세잔의 초상화야말로 숭고하다”는 식의 19세기 사람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요컨대 로메르에게 이미지와 공간이란, 원근법적 착시를 일으키는 물리적 재현에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조각나 형체도 없이 해체된 형태를 띠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그에게 ‘공간’은 언제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보고 만질 수 있는 실존의 단면인 동시에 잠시 한눈 판 사이 뒤바뀌거나 사라지며, 다른 면모로 채색되는 아스라한 신기루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로메르의 거리, 집, 건물, 도시 등은 배경적 장식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며 특별한 정취를 형성하면서도, 동시에 결코 인물과 내러티브의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으며 둘 사이에서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조금 과장하자면, 공간에 대한 로메르의 이 세밀한 세공력이 그를 누벨바그의 일원으로 만들어주었지만, 역설적으로 동일한 이유로 누벨바그 멤버들에게 배척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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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르의 이야기와 인물들이 공간과 (물리적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의 인물들이 파리 골목 여기저기를 산책하거나 방황할 때, 집에서 일층과 이층을 오르내릴 때, 시골로 바캉스를 떠나 특별한 계절, 날씨, 온도 속으로 들어설 때. 로메르의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배경이 아니라 그 표면에 서린 감정들과 예민하게 호흡하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해서 <보름달이 뜨는 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희극과 격언’ 6부작 중 네 번째 작품인 <보름달이 뜨는 밤>은 로메르의 필모그래피에서 비교적 소품처럼 여겨진다. 이 영화를 발표한 직후 내놓은 <녹색광선>(1986)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고, 이후 ‘계절연작’을 발표하면서 <보름달이 뜨는 밤>은 조금씩 잊힌다. 이런 평가는 지금까지 이어져, 이 영화는 ‘희극과 격언’에 대해 말할 때 스치듯 언급되고 마는 영화정도로만 기억되고 있다.
물론 이런 평가를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 영화가 사실은 로메르의 영화적 정수를 담고 있다거나, 혹은 그의 대표작으로 재평가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름달이 뜨는 밤>에서 일어나는 인물과 공간사이에 독특한 교류는 다른 로메르의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절묘한 유기적 관계를 가진다.
우선 무엇보다 <보름달이 뜨는 밤>의 특별한 점은 주연배우인 파스칼 오지에가 미술감독을 겸했다는 것이다. 평소 로메르가 매우 소수의 스텝들과 작업하며, 아주 작은 의상소품까지도 직접 선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예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지하고 영화를 다시 보면, 전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 감지된다. 바로 파스칼 오지에라는 복수의 역할이 빚어내는 영화 속 중첩들이다.
루이즈(파스칼 오지에)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 연인의 집에서 시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이사 오며 혼자 가구를 사고 페인트를 칠하는 등 인테리어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몇 가지 존재적 중첩이 발생한다. 배우 파스칼 오지에가 연기로 만들어내는 인물과 미술감독 파스칼 오지에가 만들어내는 공간, 그리고 영화 속의 루이즈가 만들어내는 아파트가 영화의 안팎에서 겹겹이 쌓이며 영화적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요컨대 한 사람에게 배당된 복수의 입장.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영화 안팎의 실존과 허구가 교착된 상황.
루이즈는 자기만의 시간을 원하며 파리 시내로 떠나오고, 그 욕망을 한껏 투영한 공간으로 아파트를 꾸미지만, 작고 소박한 아파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오히려 공허함만 늘어간다. 이 공간에 서린 고독은 루이즈를 한없이 침잠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영화 속 루이즈의 우울과 공허는 배우 파스칼 오지에가 만들어 낸 것인가? 아니면 미술 감독 파스칼 오지에의 것인가?
물론 이 질문에 답은 없다. 그리고 이 고독의 감각 속에 로메르의 각본과 연출, 그리고 다른 인물들이 구성한 서사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루이즈와 파스칼 오지에라는 영화 안팎의 존재들이 공간과 인물들 사이를 교류하며 만들어내는 긴밀한 관계성은 강력한 영화적 자기장을 형성하며, 공간과 인물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느껴지도록 만든다.
앞선 질문에 답이 없다 말한 이유는, 파스칼 오지에의 공을 명징하게 가려내기 어렵다는 뜻인 동시에, 그 모든 감정과 구성이 파스칼 오지에라는 인물-공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이기에 답을 내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기도 하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서 인물과 공간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빈번히 일어난다. 초반부 파티를 즐기고 밤늦게 돌아온 루이즈에게 화가 난 레미는 자유로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한다. 투박하고 장대한 골격의 사내가 지질하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언사를 내뱉으며 스스로를 규율 속에 가두는 바로 그때, 레미의 머리 위엔 몬드리안의 그림이 걸려있다. 여기서 주말 아침엔 항상 테니스를 치고, 자신이 일하는 곳에 살아야한다는 케케묵은 철칙에 갇혀 사는 레미가 조형적인 몬드리안의 그림과 동거하는 것은 마치 영화적 운명처럼 보인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선 이처럼 인물이 공간화되고 공간이 인물화되며, 서사는 그 사이를 배회하듯 떠다닌다. 서두의 인터뷰와 동일한 지면에서 로메르의 “공간이 인물의 자아 혹은 정체성과 연결 되어있”다는 직접적 언급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 공간들의 구조, 공기, 온도 속에 인물의 감정과 상태가 깊숙이 결부되어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니 루이즈가 레미를 떠나 파리 시내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연인으로부터의 물리적 자유가 아니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스스로의 기질을 담을 수 있는 정신적 안식처였던 것이다. 하지만 변덕이 어딘가 정착하면 그건 더 이상 변덕이 아니다. 결국 루이즈는 스스로를 깊은 고독에 빠뜨린 파리의 아파트에도, 조형적이고 규칙적인 레미의 집에도 자리 잡지 못한다. 그렇게 영화는 목적지도 없이 떠나는 루이즈의 뒷모습으로 끝난다. 공간을 만든 파스칼 오지에의 루이즈는 결국 그 어떤 공간에도 머물지 못한다. 이처럼 적절하면서도 쓸쓸한 엔딩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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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글을 쓰는 지금은 로메르의 탄생100주년이면서 10주기이고, 다른 한편으로 <보름달이 뜨는 밤>은 파스칼 오지에의 유작이다. 우연의 일치일 따름이지만 이 삶과 죽음들 사이에 서서 공간과 일체가 된듯했던 로메르의 인물들, 그러나 결국은 거기에 머물지 못하고 배회하거나, 산책하며 방랑하고 마는 인물들을 생각하며 내가 서있는 도시와 집과 건물을 둘러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루이즈의 쓸쓸하고도 담담한 걸음걸이 속에 서려있는 쓸쓸함이 한없이 외로워 보이면서 동시에 나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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