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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 영화의 새로운 시대 <더 골드 버그>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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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착각들 : <더 골드 버그>
김민우 (부산영화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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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오감 때문에 빚어지는 ‘착각’은 생명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만큼 매혹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특히 인간에게 착각은 단순히 감각적인 차원에서 끝맺지 않는다. 때로 자신의 감각을 믿지 않기도 하는데, 우리에게 한번쯤은 오인한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인간은 착각을 말미암아 진실이나 진리, 혹은 당연한 사실에 대한 의혹을 품거나 아니면 그 자체에 집중하여 우리가 착각을 하는 이유를 탐구해보기도 한다. 이렇듯 알레호 모귈란스키의 <더 골드 버그>는 연속된 착각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를 다루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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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더 골드 버그>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자면, 영화는 오프닝에서 ‘영화 만들기’의 역학을 10여분에 걸쳐 보여주며 설명한다. 뒤섞인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돈을 끌어오는지 반복해서 말하고(후에 전화기 목소리로 등장하는 피아 스티나 역시 영화 촬영장의 위계를 잘 보여준다) 촬영 일정과 배역에 대한 이야기들은 집단 안에서 정치적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계급의 차이까지 확장되어 나타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내일 촬영을 앞둔 이들에게 라파엘(라파엘 스프레겔버드)의 보물 이야기는 헛소리에 불과해진다. 아이러니 역시 영화의 한 축이기도 하다. 레안드로.N.알렘과 관계있을 줄 알았던 촬영지 ‘알렘’은 그와 전혀 관계가 없고, 라파엘이 파라과이 역사학자에게서 얻은 보물의 단서는 보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영화 만들기의 역학은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지만, 그 결과는 아이러니만 남아있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착각의 행위는 둘 사이에서 반복한다. 그러니 반복된 착각은 <더 골드 버그>를 추동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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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이후, 착각이 등장하며 그들의 일은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알레호(알레호 모귈란스키)와 친구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찍으려는 스웨덴의 페미니스트 작가 빅토리아 베네딕손은 여성이지만, 그녀의 배역을 맡은 이는 남성 월터(월터 제이콥)이다. 영화는 ‘당연히’ 찍을 수 없는 것이 되며 라파엘의 말을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후에(비록 피아 스티나의 요구를 맞춰주기 위해서지만) 남성 정치인 레안드로.N.알렘을 버젓이 여성인 아구스티나(아구스틴 가글리아르디)가 연기하는 것과 비교할 때 이상한 일이다. 그 순간, <더 골드 버그>에서 ‘당연한’ 세계는 오로지 남성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사실임을 폭로된다.
착각은 그들의 선입견과 이중성에 가닿기도 한다. 영화를 찍으러 온 프랑스와 독일인에게 유럽 중심사고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프로젝트 또한 남미에 대한 대상화와 유로화의 지배로 점철되어 있다면서 일갈하는 라파엘만 봐도 그렇다. 그는 스웨덴과 덴마크를 헷갈리고 프랑스와 독일인을 헷갈려 하며, 프랑스인과 독일인이라면 스트로브-위예 부부를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시 유럽인을 자기 식대로 바라보고 마음껏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영화는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스웨덴의 전통 축제 ‘미드소마’와 비슷한 의식이 아르헨티나에도 여전히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서로의 교차성을 드러내는데 말이다.
재밌는 점은 <더 골드 버그>가 시도하는 착각의 영역이 영화 밖 우리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영화의 제목과 오프닝 크레딧의 문구를 보고 에드거 앨런 포의 <황금 벌레>가 연관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 이후 얼마간의 이야기 진행을 보면, ‘당연히’ 소설을 모티브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기에 영화에서 작품 자체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는 대놓고 해당 작품이 보물찾기의 핵심 열쇠로 작용하게 만든다. 그것은 <더 골드 버그>의 세계가 다른 존재로부터 분리되어있음을 뜻한다. 감독이 겨누고 있는 지점이 영화 내적인 것인지, 외적인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에게 있어 착각은 세계의 분리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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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된 착각의 결말은 세계의 분리를 지목하고, 고의적으로 남성의 이야기와 여성의 이야기를 나누어 생각하게 만든다. 남성들의 서사와 여성들의 서사는 ‘영화 찍기’라는 것 빼고는 서로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또한 남성들의 이야기는 여성들의 이야기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의 세계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일들이 여성의 세계에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이야기에서 보물찾기에서 당연히 배제되는, 무능력한 인물처럼 ‘착각’되지만 보물들을 찾는 건 여성들이다. 그런 여성들의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 역시 여성이고. 남성들이 헛된 단서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골머리를 썩는 동안 여성들은 남성들의 이야기 뒤에서 너무나 간단하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해 버린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보물조차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녀들은 보물을 확인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자녀들과 놀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보물찾기’라는, 남성들의 헛된 욕망의 목적을 간단히 달성함으로써 그들의 세계를 일거에 조롱한다.
알레호 모귈란스키에게 있어 인간(남성)에게 ‘착각’은 고의적인 회피 기제가 아니었을까. 자신들의 오만, 독선, 몰이해성을 인정하라는 말과 다름없기에 그들은 부러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더 골드 버그>는 지독한 면모가 있다. 감독은 세계를 착각의 영역에 흠뻑 담군 다음, 그 속성이 드러내는 진짜 세계의 모습을 알 때까지 인물들을 발가벗긴다. 세계의 진실을 똑바로 목도하기에 그들의 권좌는 너무 달콤해서일까. 감독은 스스로 영화에 뛰어들어 그 수모를 감당해낸다. 비록 면죄부와 같은 행위일지라도, 자신은 세계와 동떨어진 채 훈수를 두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진지하거나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헛소동에 가까운 일로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더 골드 버그>가 가진 또 다른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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