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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아르헨티나 영화의 새로운 시대 <클랜>202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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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미시 권력 집단의 비극 : <클랜>
심미성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시작과 동시에 영화는 두 개의 시간대가 섞이고 있다. 하나는 경찰들이 급습한 푸치오 일가의 아수라장이며, 다른 하나는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까지의 장구한 범죄 과정이다. ‘씨족’이라는 뜻을 가진 영화 <클랜>은 아르헨티나가 7년의 독재를 깨고 민주주의를 탈환한 직후, 이른바 ‘납치 사업’이 가족 단위로 자행되고 있었던 끔찍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푸치오 가족의 가장 아르키메데스는 지난 독재 정권의 믿음직한 수족이자 수혜자였다. 그동안 그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를 납치해 돈을 갈취했고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자금을 대 왔다. 그러나 정권이 함락한 다음엔 얘기가 달라진다. 그가 국가와 가족을 위해 해 왔던 비정상적인 일들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정권의 불씨를 잠깐이면 사라질 유행쯤으로 치부하며 납치 사업을 계속한다. 정말로 그가 민주주의의 도래를 일시적인 흐름으로 믿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불온한 사업을 지속하는 근간에는 일정 부분의 박탈감과, 나라와 가정을 지키고 있다는 착각에 놓지 못하는 권력의 맛이 존재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내와 아들딸이 머무는 집안에서 태연히 자행될 수 있었던 납치극의 경위이다. 특히 푸치오의 자택을 거쳐 간 인질들은 막내딸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창고에서 몇 달씩 고문을 당했다. 막내딸을 비롯한 가족들은 집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결코 모르지 않았다. 인질의 비명과 울음을 매일같이 들어야 했던 것도 모자라 장성한 아들들은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는데, 그러므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이 일련의 납치 행위들을 묵인, 방조, 협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의 사업으로 확장된다. 감독 파블로 트라페로는 아르키메데스를 연기한 배우 기예르모 프란셀라에게 가급적 눈을 깜빡이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유독 밝고 푸른 눈을 가진 이 배우가 눈을 깜빡이지 않는 섬짓한 표정으로 납치, 고문, 살인을 자행하는 동안 관객이 느끼는 공포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엄격하고 차갑지만 가족을 끔찍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조명하기도 하면서, 이 납치극이 얼마나 일상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행위로의 부적절한 결합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말한다.
한 대목은 이 양면적 결합을 공포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 곁에서 아르키메데스는 아내의 결린 어깨를 주무르고, 아내는 남편의 손길 덕에 호강한다 말하며 만족을 느낀다. 그런 다음 “이 정도면 돼?”라며 음식을 담는 아내, “배고플 거야”라고 답하는 아르키메데스. 그는 곧 푸짐해진 접시를 들고 아들딸들 곁을지나 문제의 창고로 올라간다. 창고에 가까워질수록 (가족들에겐 익숙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하는데, 막내딸은 헤드폰 너머의 음악으로 귀를 피해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다. 창고의 문이 열리면 접시의 주인이 감금된 인질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일련의 과정은 하얗게 눈을 뜬 아버지의 걸음을 따라가는 롱테이크로 표현되었고, 이 비정상적인 일들과 일상적으로 부대끼며 생활을 영위하는 집단의 얼개가 그려진다.
아버지 아르키메데스가 정해진 납치극의 단계를 밟아 나가듯 무미건조한 태도로 일을 진척해가는 일련의 과정이, 아들 알렉스가 여자친구를 만나 벌이는 정사의 처음과 끝을 맞추고 있는 대목도 나온다.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타임라인으로 벌어진 두 행위를 마치 동시적으로, 명쾌하리만큼 간단히 맞아 떨어지도록 구성한 교차 편집이다. 당대 유행한 팝 음악과 함께 배치한 이 속도감 있는 장면에서 몇 가지 감상이 도출된다. 우선 감독은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돈을 갈취하는 행위와, 남녀가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짧은 정사를 동일한 시간 안에 욱여넣으면서 비견될 수 없는 두 행위를 같은 무게로 다룬다. 그러나 이 시선은 감독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아르키메데스가 납치를, 알렉스가 아버지를 용인하는 태도와 관련된 것이다. 결코 동일한 무게일 수 없는 사건을 병렬로 늘어놓아 얻게 되는 아이러니의 효과다. 하지만 동시에 흥겨운 팝 음악과 범죄 현장과 외설적 이미지 사이의 혼합이, 성찰의 기회를 주지 못했던 진부한 대중영화의 터치를 어쩔 수 없이 상기시키는 점은 아쉽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아르키메데스를 불가해한 캐릭터로 놓아둔 채, 아들 알렉스가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과정에 현미경을 댄다. 미식축구의 영웅적 존재로 마을의 자랑이었던 알렉스는, 부족한 것 없이 충만한 자신의 삶에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무거운 죄의식에 짓눌린다. 그러나 이 감정은 아직 죄의식이라고 인지되지 않은, 이전 단계의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의 규칙대로 굴러가는 엄연한 ‘가족의 일’을 정면으로 거부하기에는 미처 여물지 않은 감정의 상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이 일에 깊숙이 들어갈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요청한 도움(납치 과정에 하나의 역할을 하는 것)을 무거운 마음으로 완수한 다음에는 보상이 내려진다. 엄격한 아버지로부터 ‘네가 자랑스럽다’는 찬사를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거액의 몫을 배당받게 된다. 그로 인한 아버지의 인정과 물질적 보상이 그에게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그 뒤에 덧댄다. 서핑숍을 운영하는 알렉스는 늦은 밤 가게에 홀로 남아 새로 산 가스통을 점검한다. 당연히도 가게는 그간의 납치 사업으로 일군 목돈으로 지어진 것이면서, 높은 매출에 기뻐하기도 했던 알렉스다. 그런 그가 아버지를 도와 얻게 된 돈다발로 구입한 것은 다름 아닌 여러 개의 산소통이다. 그는 호흡기에 입을 댄 채 쉬어지지 않는 숨을 몰아쉰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알렉스의 눈은 아마도 이제 심해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한 자의 최후의 징후인지도 모르겠다.
<클랜>은 멀리서 보면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발생 되었던 믿을 수 없이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그것이 허구가 아닌 실제 이야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맥락의 위험성을 경고하기에 최적인 셈이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미시 권력이 이행한 한 위험한 가정의 내부를 파고들면서 이토록 믿을 수 없이 끔찍한 일들이 태연자약하게 벌어진 과정을 탐구한다. 정권 교체 이후, 자신을 비호할 세력이 일순간 사라진 아버지는 납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납치 대상의 도덕적 흠결을 덧대기도 한다. 그것으로 인해 얼마만큼 무마된 죄의식은 다시, 욕심 많은 부호를 처단하는 일종의 자경단으로서 혹은 애국에의 발로로 자신의 행위를 재정립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 집단의 납치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무마되기 어려운 패악이었고, 가족 구성원들은 팔다리가 잘린 피해자이면서 묵인과 방조와 협력으로 구성된 적극적인 가해자로 규명된다. 후반부, 수감된 부자(父子)가 서로를 비난하며 벌이는 격렬한 싸움은 아버지를 향한 적개심과, 스스로에게 퍼붓는 증오가 뒤섞인 알렉스의 감정의 표출이다. 그러나 바로 직전의 장면에서 알렉스는 아내에게 사건과의 무관함을 맹세한 바 있으며, 사건 이후 가족 구성원의 삶을 요약한 마지막 글자들은 이 모든 과정의 덧없는 귀결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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