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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앙코르,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2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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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 돌아보기와 나아가기
김나영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은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두 힘을 긴장 속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 가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노년과 망명으로 인해 신중한 확신을 얻은 예술가가 가진 성숙한 주체성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중에서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2008)은 2019년 3월 타계한 아녜스 바르다가 마치 유언처럼 내놓았던 유작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2019) 이전에 이미 자신의 영화 세계를 스스로 한차례 결산했던 작업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을 만들 당시 팔순을 앞두고 있던 바르다로서는 더 늦기 전에 50여 년간의 영화 여정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로 바르다의 삶과 영화는 10년이 더 이어져 다시 한번 정리가 필요해진 셈이니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속성 덕에 이루어진 다소 이른 작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일종의 마스터 클래스 형식으로 비교적 연대순으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며 마치 작별 인사와도 같은 마무리로 끝나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와 바르다의 기억과 생각을 자유롭게 따라가면서 작품의 초점이 결산과 정리로부터 새로운 시도와 창작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완전히 다른 형식의 작품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굳이 비교한다면, 바르다가 평생의 배우자이자 위대한 뮤지컬 영화감독이었던 자크 드미에 관해 만든 <낭트의 자코>(1991)와 <자크 드미의 세계>(1995)를 각각의 영화에 대응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낭트의 자코>가 자크 드미의 기억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픽션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면, <자크 드미의 세계>는 동료 감독들의 인터뷰와 드미의 영화 클립으로 이루어져 한 영화감독의 세계를 조망할 때 흔히 채택되는 일반적 형식을 갖추고 있는 작업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을 이야기하며 <낭트의 자코>를 떠올리게 되는 데는 또 다른 계기도 있다. 영화 전체가 <낭트의 자코>처럼 일관되게 재구성의 형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지만, 드미의 기억을 어린 배우들을 기용해 재현하는 <낭트의 자코>의 주요한 방식이 <아녜스의 해변>에서도 반복되기 때문이다. 두 영화의 차이는 드미가 카메라 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았다면 바르다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배우들과 함께한다는 점에 있다. 어쩌면 이 차이 속에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이 가지고 있는 창조적 긴장의 원천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을 채우고 있는 것은, 두 번째 장편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1962)를 바르다 자신이 설명했던 말에서 빌려오자면,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 사이의 대비”다. 이는 일차적으로 한 사람의 일생과 영화 세계를 서술하기 위해 채택된 영화의 방식이 서술 대상이 되는 이가 직접 내레이션을 하고 현재 진행 중인 촬영 과정을 드러내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과거를 서술하고 있지만, 작품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현재화된 시간이기에 발생하는 “반대 방향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두 힘”이 있다. 이와 같은 긴장은 현재의 바르다가 자신의 과거를 연기하는 아이들 앞에 섰을 때 부드럽게 전면화된다.
또 한편으로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시간에 대응하는 두 개의 모티브에서도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과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에서 젊고 아름다운 클레오는 자신이 암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움에 빠져있다. 영화의 서사적 시간은 영화가 상영되는 실제 물리적 시간인 러닝 타임과 거의 일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클레오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난 후 그녀가 통과하는 1시간은 영화의 객관적 러닝 타임인 1시간과 질적으로 다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가 대비시킨 두 항을 뒤집어서 보여준다. <5시에서 7시까지의 클레오>가 클레오의 아름다운 젊음과 죽음의 관념 속에서 헤매는 시간을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으로 짝지을 수 있다면,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노쇠한 바르다의 육신을 카메라 앞에서 체현함으로써 드러나는 죽음과 망각을 향해 흘러가는 객관적 시간과 창조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영화의 주관적 시간을 짝지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창조 작업으로부터 가장 먼저 탄생하는 것이 바로 바르다 자신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바다를 배경으로 선 바르다는 자신이 “늙고 통통하며 키가 작은 여성을 ‘연기‘”한다고 말한다. 카메라 앞에 선 아녜스 바르다는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를 연기하는 중이다. 영화감독 바르다는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이라는 영화를 통해 창조된 캐릭터다. 바르다 캐릭터는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삶을 대신 증언하고 재현하는데, 미리 전제되어 있던 작품의 구상에 배우는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다. 놀이하던 어린 시절을 재현할 때면 이걸 꼭 해야 하는지 질문하기도 하고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을 찾아가선 기차광 집주인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불분명해진 기억 앞에선 뭐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이는 기억과 신체의 통제가 전처럼 쉽지 않아지는 노년의 특성과도 닮았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바르다는 이로부터 발생하는 우연 속으로 즐겁게 뛰어든다. 물론 그 속에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때 빛났던 동료들의 모습을 기념하기 위한 사진들은 거대한 묘지가 되어 바르다의 가슴을 짓누르기도 한다. 영화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원래의 궤도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바르다가 이처럼 영화를 활짝 열어둘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완결되어 닫힌 하나의 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한편 영화를 방만하기만 한 기억의 더미로 만들지 않는 것 역시 영화감독 바르다가 수십 년 동안 쌓아왔던 영화 세계라는 중심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한 사람의 시네아스트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기 위해 새로운 길을 걷는 작업이다. 혹은 새로운 길을 향해 가기 위해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작업이다. 바르다는 여전히 창작을 향한 즐거움 속에 있었으며,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다면 변함없이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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