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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빛깔> : 시는 우리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여, 눈 뜨게 한다.
구형준 (부산영화평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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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에둘러 시작해보자. <석류의 빛깔>(1969)은 사실 제목과 달리 석류와 거의 무관한 영화다. 도입부 세 개의 석류와 그 뒤로 새빨간 액체가 스며드는 이미지가 보이고, 그 후로도 간헐적으로 석류가 배경 혹은 소품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석류 자체가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오브제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사실 영화의 원제는 18세기 아르메니아 시인의 이름인 ‘사야트 노바Sayat Nova’인데, 영화도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다룬다. 그런데 이 영화가 자국의 시인을 적절한 방식으로 소개하지 않을뿐더러 불온한 사상을 품고 있다 판단한 당시 소련정부는 일방적으로 작품의 제목을 <석류의 빛깔>로 수정한 뒤 개봉을 금지시켰고, 검열 후 편집을 가하기까지 했다.
작품외적인 일화이지만 이는 당시 소련정부가 문화계를 다루는 방식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며, 아이러니하게도 사상적 대척점에 있었던 1970년대 한국의 분위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세르게이 파라자노프는 영화를 공개한 후 불온한 이단자로 낙인찍혀 동성애, 밀거래, 뇌물수수 등 다양하게 조작된 죄목으로 체포와 투옥을 반복하는 고초를 겪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나면 다소 뜬금없이 느껴지는 제목을 비롯해, 영화 안팎을 둘러싼 이 일련의 일화들은, 역설적으로 파라자노프의 영화세계가 현실의 이해관계들과 타협 불가능한 고유의 문화적, 미적 아우라와 테제를 지니고 있음을 반증한다.
2.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석류의 빛깔>이 정치적 투철함과 사상적 결연함을 통해 스스로를 불살라 마지않는, 불온의 대상으로 정부의 감시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인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이 영화는, 주지했듯이 18세기 아르메니아의 시인 사야트 노바의 삶과 시를 다루는데, 실존인물의 생애를 서사 속에서 사실적이고 영웅적으로 묘사하는 보통의 전기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석류의 빛깔>은 사야트 노바의 시가 품고 있는 은유와 암시, 그리고 시인이 살아왔던 생애의 순간들, 그 시대와 지역의 기록과 기억, 아르메니아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마치 콜라주하듯 뒤섞으며 추상적이지만 그 자체로 강렬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미지를 직조해낸다. 우리는 파라자노프의 영화 ‘사야트 노바’를 보고나서도 실존인물 사야트 노바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그의 시적 세계에 가까이 다가가 교감할 수 있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파라자노프, 특히나 <석류의 빛깔>에 대해 말할 때 많은 평자들이 강조하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카프카스라는 경계지역에서 나고 자라며 형성된 복합적인 그의 문화적, 지역적 정체성, 그리고 비잔틴과 근동에 기반한 기독교적 소재와 분위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화려한 색감과 의복, 건축양식. 그리고 종교적 상징성이 다분한 소품과 음악, 대사와 내레이션, 마치 종교회화를 보는듯한 미쟝셴 구성 등 말이다. 물론 이런 배경요소들이 <석류의 빛깔>을 이루는 주요한 구성원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파라자노프의 표현의 배경과 근원에 대한 세밀한 분석은 이미 무수히 선행되었고, 굳이 이 글에서 그에 대해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이 요소들을 아우르고 있는 형식의 추상성, 말하자면 시적 구성이라 할 만한 것이다. 물론 ‘사야트 노바’라는 원제나 작품 중간의 자막을 통해서 이 영화의 형식이 사야트 노바의 작품들로부터 깊이 영감 받았음을 유추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시는 전혀 번역되지 않아 아직은 감상할 수가 없기에 <석류의 빛깔>과 사야트 노바의 시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기 난감한 면이 있다.
3.
하여 다소 감상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으로라도 작품이 품고 있는 시적감흥에 대해서 말해보려 한다. 우선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석류의 빛깔>에는 서사가 거의 없다. 거칠게 봤을 때 시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수도승 시기로 나눌 수 있긴 하겠지만 이런 연대기적 구분은 감상에 아무런 단초도 제공하지 못한다. 씬의 구분이 무용할 정도로 장소를 오가며 아무 예고 없이 조각난 서사의 상태로 시작하는 영화는, 통합되고 선형적인 정서를 그리는 데 전혀 관심이 없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이를 <석류의 빛깔>의 독창적 성취라 말하기는 힘들다. 서사의 해체는 모던시네마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무수한 영화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맨들맨들한 세계에 구멍을 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라자노프는 이 조각난 세계들을 조각난 상태로 두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산문적 서사에 기대지 않았을 따름이지, 이미지와 이미지를 이어주는 비서사적 요소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목을 자른 흰 닭과 수도승, 어린 사야트 노바가 성당 앞 잔디밭에 서있는 초반부 장면을 보자. 화면을 정직하게 마주보고 서있는 인물들 앞으로 말을 탄 사람이 지나간다. 그런데 말의 걸음걸이가 삐그덕거리며 경직된 리듬으로 걸어간다. 우리가 ‘저 말이 이상하게 걷네.’라고 생각할 때쯤, 이 장면이 마치 영사오류처럼 한 번 더 반복된다. 그리고 똑같은 장면이 짧게 두 번 반복되고 나면, 가만히 서있던 어린 사야트 노바가 말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삐걱삐걱 걸어 나간다.
우리는 이 세 번의 반복(혹은 두 번의 반복과 한 번의 변주) 속에서 별다른 함의나 의미를 이끌어낼 수 없다. 다만 영화는 아무런 서사적 연결고리 없이 이루어지는 반복행위 속에서 독특한 리듬감을 이끌어낸다. <석류의 빛깔>은 이런 방식으로 서사를 탈각한 채 숏과 숏 사이에 모종의 운율을 형성하고, 이 외에도 발화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내레이션,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의 자막, 무성영화적 운동감각과 회화적 정지감각을 유비하며 지속적으로 운율을 변주해 나간다.
파라자노프의 시-이미지는 이런 방식으로 조각난 서사 위에 문학적 운율을 불어넣고,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 아르메니아의 전통문화적 소재들, 장엄한 종교적 음악과 내레이션들과 결합하여 작품을 마치 예배를 하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그는 제의에 가까울 정도로 순도 높은 종교적 이미지들을 어떤 이야기와도 연결 짓지 않고 가능한 단독적인 형태 그대로 우리에게 내던진다. 우리는 지금 시를 읽고 있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기도를 하는 것일까. <석류의 빛깔>은 그 사이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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