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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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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는 사람들: 전염되기, 절연하기2021-05-26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 이미지

 

 

<혼자 사는 사람들>(2021) :전염되기, 절연하기

 

이보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는 콜 받는 게 더 편한데요” 카드회사 콜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하는 진아(공승연)는 일주일 동안 신입사원을 교육하라는 팀장(김해나)의 주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영화의 오프닝은 일찌감치 혼자 살며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담배를 피우는 진아의 일상을 비춘 바 있다. 진아의 모습은 무미건조해 보이기는 해도, 메마른 1인 가구 청년을 그리는 일반적인 초상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영화에서 (부재함으로써)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소셜 미디어다. 직장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 점심시간 식당에서 진아는 내내 이어폰을 꽂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보고 듣고 있는데, 어째서 작금의 필수적인 소통공간이라 할 수 있음 직한 SNS의 세계는 과감히 소거되어 있을까. 이는 영화의 내적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제로 ‘대면하는’ 물리적 조건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태도는 아닐까.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

 

진아는 고독해 보이지만 유난히 공허함을 느끼거나 침잠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 그저 그게 편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니 타인과의 소통을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그녀가 ‘콜 받는 게 더 편하다’라고 말할 때 이 대답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상대방이 아무리 살갑더라도 낯선 이를 직접 대면해야 하는 불편함에 성가실 바에야, 험한 말을 듣더라도 기계처럼 매뉴얼을 반복하는 게 나으니 말이다. 진아의 평정은 그런 데서 온다. 타인과 불필요한 유대를 섞지 않는 것.

 

그러나 제목이 복수형(‘사람들’)을 드러내고 있는 대로, 영화는 각자 개별적인 단독자로 존재하면서도 은밀하게 결부된 삶의 조건을 탐색한다. 복도형 아파트와 사무실의 파티션이라는, 연결과 단절의 이중성을 내장한 공간들은 진아를 둘러싼 환경을 선명히 드러낸다. 분리되어 있지만 약간의 경계만 넘으면 이윽고 연결되는 이 공간들은 부득이하게 타인을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의 초반부에 이미 느닷없이 제시된 바 있었다. 퇴근한 진아가 TV를 보며 편의점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울 때 별안간 무언가 쾅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집안으로 들이닥치는 바깥의(혹은 옆집의) 소리. 놀란 기색이 역력한 진아는 다시금 밥을 입으로 욱여넣는다. 이것은 단독가구가 재난을 마주할 때의 곤혹스러운 풍경을 묘사한 것일까. 그런데 몇 신이 지나 옆집 남자가 얼마 전 성인잡지 더미에 깔려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 그 소리는 다름 아닌 누군가의 마지막을 증명하는 섬칫한 비명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발설한다. 옆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일상에 끔찍한 사태가 무심코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진아가 집을 나서며 맡았던 악취는 그녀의 옆에 서서 “인사 좀 해주지”라고 무심히 말하던 그 남자의 시신에서 연유한 냄새이리라. 진아는 아침에도 그 남자를 봤다고 말하지만, 떨어질 집값을 걱정하던 집주인은 그럴 일이 있냐며 코웃음을 친다. 진아의 병리적 증상은 며칠 전 죽은 남자를 보는 것으로 촉발된다(이는 죽은 엄마의 휴대폰으로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오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여하간 진아를 둘러싼 모종의 사태들은 분명한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 나의 자리 옆에는 타인의 (빈)자리가 있다.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

 

경계를 넘어오는 사태란 당연히 진아가 수진(정다은)의 교육을 맡게 되면서 전면화된다. 어린 나이의 신입사원 수진은 시종 밝은 얼굴로 진아에게 접근하지만, 진아는 그녀의 행동이 불편하기만 하다. 함께 밥을 먹자고 따라온 수진에게 진아는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수진은 진아의 ‘선을 넘는다’. 이 예기치 못한 선 넘기의 연속 가운데 진아는 이제껏 고려해보지 못한 바를 고민하게 되는 사건과 마주한다. 무례한 고객이 다짜고짜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자 진아는 수진에게 일단 사과부터 하라고 말하는데, 내내 활달하던 수진이 일순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죄송하다고 해야 하느냐’며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 것이다. 기계처럼 일관된 톤으로 고객을 응대하던 진아에게 수진의 그 말은 당황스럽다. 이 말로 인해 수진은 진아의 일상에 더 성큼 균열을 낸다.

 

혼자 사는 사람들 스틸

 

고립된 진아의 일상에서 연결의 기회를 마련하는 기제로서 영화는 전염의 방식을 착안한 듯하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연결이란 특별한 환영이나 따뜻한 손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어떤 현상을 공통적으로 감각함으로써 혹은 그가 감각하는 것이 내게로 옮겨옴으로써 가능하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상대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감수성은 같은 병증을 겪는 것으로 표상된다. 이 점에서 유의미한 대목은 바로 수진이 무단결근한 하루의 시퀀스로 선명히 제시된다. 오랜만에 혼자 자기 자리에 앉은 진아는 고객 응대 중 갑자기 목이 잠겨오자 수진이 쓰던 스프레이를 뿌린다(일전에 수진이 진아에게 스프레이를 권유하다 실수로 진아의 얼굴에 분사해버려 둘이 어색해진 적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점심을 꾸역꾸역 그러나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돌아온 진아는 자기 책상에 남아 있는 수진의 소지품을 황급히 치워 버린다. 그러나 사람이 사라지고 물건들을 없앤다고 그의 존재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제 진아에게 수진의 흔적이란 같은 ‘증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남게 된다. 진아는 수진이 잠들 때도 귀에 맴돌았다던 그 통화연결음을 반복해 들으며 혼란스러워한다. 줄곧 감정을 배제한 채 고객을 응대하던 진아에게 이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으로, 진아로 하여금 갑작스러운 감정의 파고를 겪도록 이끈다.

 

혼자 사는 사람들

 

감정적 격동을 내처 경계하던 영화는 잠깐의 클라이맥스 뒤에도 다시 본연의 자리로 초연히 돌아온다. 더 믿음직스러운 것은 영화의 결말이다. 균열이 인다고 이전을 완벽히 꺼뜨린 채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란 힘든 일이므로, 성훈(서현우)은 이미 들어온 집에서 죽은 자를 위해 (사실상 그를 떠나보내는) 제사를 지낸다. 이는 우리가 만나서 반갑다는 말조차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을 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가 아닌가. 그러니 진아가 수진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그녀로서 지금 가능한 최대한의 환대일지 모른다. 거기에 못 미더운 아버지와는 홈캠을 통해 자신이 일방적으로 감독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거리만을 유지하겠다는 (절연 아닌 절연으로의) 선언까지,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 제대로 된 인사는 모두 상대와 대면하지 않은 자리에서 수행된다. 그러니 이 영화의 성취는 타인과의 소통을 결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차라리 선을 긋더라도 잘 긋겠다는 마음에 기인한다. 타인의 (빈)자리를 응시하면서도, 섣부른 연대나 우정은 도모하지 않는 것. <혼자 사는 사람들>은 지금의 ‘세태’를 말하기에 더없이 필요한 영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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