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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최선의 삶> : 고양이를 부탁할 수 없어2021-09-07
최선의 삶 스틸 이미지

 

 

<최선의 삶> : 고양이를 부탁할 수 없어

 

 

김나영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단)

 

 

(영화의 결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최선의 삶>에 고양이를 줍는 장면이 등장하자 강력하게 상기된 영화는 올해 개봉 20주년을 맞은 정재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2001).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20년 전 영화 속 고양이는 주고받는 이들 사이에서 선물이 되었다가 짐이 되었다가 떠나기 전 부탁해야 할 존재가 된다. 여상을 갓 졸업해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다섯 여성의 우정과 성장통을 주제로 하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고양이는 돌보아지던 존재에서 스스로를, 혹은 자신보다 더 약자를 돌보는 존재로 이행해가는 시기를 표상하기도 한다.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서 인물들은 낯선 삶을 향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다.

 

   비교적 충실하게 동명의 원작 소설을 따르고 있는 이우정 감독의 <최선의 삶> 역시 청소년기의 마지막 시기를 다루고 있다. 원작에선 중학생으로 그려지던 인물들이 영화에서 고등학생으로 그려지지만 약간의 대사를 수정하는 것을 제외하면(가령, "농고로 진학할까?"라는 말이 "농고에 진학할 걸."이라는 대사로 바뀐다.) 대부분 원작의 사건과 대사를 특별한 변형 없이 따르고 있다. 인물들의 나이가 16살이든 19살이든 별다른 서사적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교하자면 <고양이를 부탁해>가 스무 살이라는 특정한 나이가 가지는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영화라면 <최선의 삶>은 삶의 더욱 사적인 국면을 그려내는 영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이 현재와 20여 년이라는 시차를 가진다는 점 역시 영화의 전개에서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작가의 사적인 기억에서 출발한 원작과 비교했을 때, 영화가 원작보다는 조금 더 보편적 위치에 서 있다는 점 역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최선의 삶><고양이를 부탁해>에 비해서는 사적인 영역에서, 사적 경험이 뿜어내는 파토스로 충만한 원작 소설과 비교해서는 조금 더 보편적 영역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삶의 보편적 형태를 그려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넓은 차원에서 통찰할 수 있는 인간적 형태의 한 부분이고, 한 개인의 사적인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보편적 시선만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 잔여라면, 두 개의 차원 사이에서 <최선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아이들의 세계가 지닌 단순성과 연약함으로 인해 일어나곤 하는 비극적 사건이 반드시 사회적 차원으로 환원할 수도, 개인적 특성의 한 부분으로 치환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최선의 삶 스틸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많은 영화가 아이들이 어른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좌절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만, <최선의 삶>에서 부조리해 보이는 것은 아이들의 세계 그 자체다. 아이들이 집을 나가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기차가 지나갈 때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본능적인 일이다. 소녀들의 세계를 재현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아이들이 일으킨 문제의 원인을 어른들의 시선에서 일반화한다는 것이다. 성적 지상주의나 부모와의 불화로 인한 일탈이 청소년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에게 집을 떠나는 이유를 묻는다면 기대했던 대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선의 삶 스틸

 

  

  아이들의 세계가 부조리해 보이는 것은 그곳에 어떤 윤리적 기준도 합리적 규칙도 없기 때문이다. 사회와 대립하는 위치에 아이들의 세계를 두곤 하는 작품들은 순수했던 아이들이 마치 타락한 세계에 물들어가는 것처럼 그린다. 그러나 <최선의 삶> 속 아이들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쉽게 물건을 훔치고, 술과 담배를 즐긴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뭐든 즉흥적이고 임기응변식인 이들의 규칙 없음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는 원작과 비교해 영화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원작에선 조금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무리 문화와 경제 계급을 경계로 나누어진 지역적 특성, 아이들 간에 암묵적으로 자리 잡은 서열은 영화에선 대부분 삭제되어 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의 시선과 움직임이다.

 

최선의 삶 스틸

 

 

   가출의 이유는 세 사람 각각 다르다. 특히 영화의 가장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 강이(방민아)에게 가출의 동기는 그 자신에게도 해명되지 않는다. 안락한 집을 떠나 구질구질하며 위험한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가출을 감행하는 이유는 우정으로도, 가난으로도, 일시적 반항심으로도 환원하기 어렵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자라는 점에서 강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자신의 집 강아지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는, 어떤 비하의 의미도 없이,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가 소설보다 유리해지는 드문 순간 중 하나는 이처럼 바로 그저 보여줄 때이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다시 <고양이를 부탁해>를 환기해 비교한다면, <최선의 삶>에서 가출과 고양이 모두 어떤 의미를 찾기 어렵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서 집을 나서는 <고양이를 부탁해> 속 태희(배두나)의 여행이 호기심으로 충만한 것이라면, <최선의 삶> 속에서 가출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게다가 태희가 갈 곳이 없어진 지영(옥지영)과 함께 떠나는 <고양이의 부탁해>의 결말과 비교해, 함께 집을 떠나온 친구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최선의 삶>의 이야기는 훨씬 더 비정하고 잔혹해 보인다.

 

 

고양이를 부탁해 스틸

 

  

   친구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떠나는 결말은 <고양이를 부탁해>의 인물들이 성장을 위한 출발과 동시에 일정한 성장을 이루어냈음을 보여주지만, <최선의 삶>에서 고양이는 아이들의 세계에 있으면 결국 무의미하게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고양이를 부탁할 친구도, 돈도 없는 상황에서 그러나 아이들은 계속해서 고양이를 주워 온다. <최선의 삶>에는 성장이 없다.

 

   이는 20년 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최선의 삶>의 세계가 이상할 정도로 현재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소설의 스노볼을 대신해 영화의 앞뒤로 배치된 과거의 영상은 스노볼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과거 영상은 현재의 관객에게 영화의 배경이 20여 년 전 과거 어느 시점이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한편, 영화를 닫을 때의 과거 영상은 결말의 파국적 심상을 다소간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정리되는 심상은 소설의 그것과는 다르다. 결말은 소설과 영화가 가장 결정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지만, 영화가 소설이 보여준 결말의 일부를 보여주지 않았을 뿐 이야기를 바꾸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이 주는 느낌은 소설과는 사뭇 다른데, 영화가 딱 거기에서 멈춤으로써 소설이 다소간 과거를 반추하는 느낌으로 서술했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는 강이의 내레이션이 영화에서는 더 나빠질 미래조차 보이지 않는 현재에 대한 서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설이 작가 자신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제의이기도 했다면, 영화는 악몽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악몽을 충실히 재현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는 악몽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작가의 수상소감) 셈이고, 자신의 인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더 나아지기 위해 기꺼이 더 나빠지는쪽을 선택한 셈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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