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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통증의 장소들2021-10-27
사상 스틸 이미지

 

 

<사상> : 통증의 장소들

                                                              이보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박배일 감독의 <사상>(2021)은 잡다한 요소들로 이뤄진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주로 감독의 아버지인 박성희씨의 집과 그의 개인사를 따라가는 동시에 LH주택공사의 재개발로 인해 거주지를 잃어버린 부산 만덕동 주민들의 투쟁을 담는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투쟁과 연대에 몸을 담았던 동지 최수영씨에게로 시선을 이동해 얼마간 그의 생활을 좇기도 한다. 와중에 형식적인 측면에서 눈여겨볼 만한 시도들도 관찰된다. 관조적인 드론 숏과 함께 감독의 내레이션이 개입되거나 정지된 이미지들이 연쇄적으로 나열되는 대목들이 그렇다. 영화는 인물들의 과감한 비속어와 방언도 개의치 않고 그대로 자막에 필사했으며, 사이사이 이명 같기도 용접 소리 같기도 한 차가운 사운드를 반복적으로 삽입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구체적인 결을 완결적인 언어로 풀이하기는 쉽지 않으며 애초에 그다지 정합적인 구성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2011년에 제작을 시작한 뒤 관객에게 공개되기까지 9년이나 걸렸고, 오랜 시간 카메라에 많은 것이 담겼듯 그 과정에서 들어낸 부분은 더욱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이 있다면 이 영화가 감독의 아버지를 경유해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사상 스틸

 

영화의 도입부, 박성희씨가 등장해 자신의 인생을 소략한다. 열일곱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릴 적부터 농사를 짓고 살아 학교는 제대로 출석한 적 없으며, 억지로 선을 본 뒤 하게 된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는 말들이 이어질 때 화면에는 그의 젊은 시절 사진들이 하나씩 나열된다. 다시 박성희씨가 정면을 바라보는 화면으로 돌아오고, 말을 잇던 그는 별안간 “이 이상 더 할 이야기가 있는 건가?”라며 카메라 정면의 위쪽을 쳐다본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화면 너머에서 연출자가 작은 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아버지 인생을 정리하는 데 5분도 안 걸리네.” 인생의 고통은 끊임없었지만, 스스로 세월을 진술하는 데는 조금의 시간도 부여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부족한 언어. 이 장면에서 더욱 인상적인 것은, 이후의 상황에는 모두 자막이 등장하는 반면 여기에는 불친절함을 감수하고서도 자막이 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음성으로 들릴지언정 정확한 언어로서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는다. “이름 붙여진 것은 이미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카뮈의 물음처럼, 지금 그에게는 자신에 관해 섬세히 진술할 능력도 의지가 없다. 결국 이 짧은 대화를 끝으로 카메라가 흔들리면서 장면의 전환이 예기된다.

 

사상 스틸

 

이 위기를 방증하듯 이후 아버지는 수많은 병적 징후들까지 마주한다. 산재로 손가락을 잃었다는 정보가 제시된 이후에도 영화 내내 그가 이명과 허리 통증, 피로와 우울감 등 여러 통증에 시달린다는 사실들이 연이어 보고된다. 병실에서 아버지는 앞으로 프레스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겠다고 읊조리면서 “어디서 아픈지 그걸 못 찾겠어”라며 부연한다. 산재라는 외부적 원인은 분명할지언정 통증의 근원지를 정확히 발견해내지 못하는 답보상태. 이 다양한 통증은 노화에 따른 현상인가, 특정한 질병에 기인하는가. 혹은 위험천만한 노동현장에서 겪은 외상의 후유증 때문인가. 아니라면 매일같이 부수고 깨뜨리는 공사장 인근에 살며 만성이 된 이상 감각인가. 아무것도 아니거나 복수의 가능성일 수도 있지만, 자명한 것은 원인을 명료히 지시할 수는 없어도 현재의 고통은 시종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반복적으로 공원에 나가 걷거나 운동기구를 들며 회복을 도모하지만, 건강은 단기간에 연마되지 않는다.

 

사상 스틸

 

‘정상적’ 체계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육체는 결국 <사상>이 관통하고 있는 만덕동의 집(들)과 엇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몸과 마찬가지로 나의 소유이자 거처이지만 이제는 투쟁의 장소로 변모하게 된 장소. 지금 이 집들은 끊임없이 타자의 간섭과 개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상>은 아버지의 집과 수영씨의 집, 그리고 한 농성인의 “0.03평짜리 펜트하우스” 등 여러 거주지를 떠도는데, 이곳들은 각각 오래 살아 여기저기가 고장 나 있거나, 동지들과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거나, 최소한의 크기와 세간으로 꾸려져 기약 없는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그야말로 불안을 유발하는 공간들이다. 영화의 초점은 연대와 협력으로 뭉친 투쟁의 모습에 맞춰져 있지 않고, 차라리 균열과 불안이 도드라지는 부분들을 위주로 떼어내어 이 활동의 불씨가 얼마나 사그라들고 있는지를 건드린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이사와 집들이 장면은 결국 이들이 자신들의 장소를 불가피하게 떠나게 된다는 음울한 진실을 지시한다.

 

사상 스틸

 

이 투쟁의 현장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과 카메라를 든 이(들)의 관계이다. 타인의 삶에 비집고 들어가서는 시치미를 떼고 관망해야 하는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란 사실상 언제건 민폐의 카메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성질을 지닐 것이다. 그래서 많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마다 수시로 들어야 하는-그래서 자주 편집의 대상이 되는- 질문들이 흥미롭게도 <사상>에서는 소거되지 않고 담겨 있다. 가령 이런 장면이 있다. 손가락이 잘린 아버지의 실밥을 제거하던 의사는 갑자기 묻는다. “아드님이 영화감독 하시는 겁니까?” 아버지가 머쓱하게 웃으며 그렇다고 답하니 “흔하지 않은 일을 하시네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또는 이삿짐을 옮기는 인부들이 “이 뭐야. 오늘 내가 주인공이가. 영화 촬영하고 있네”, “이걸 영화 촬영한다고, 할 게 없어서?”와 같은 말들을 천연스레 던지며 카메라를 바라본다. 인물들은 카메라 뒤편의 연출자를 무람없이 의식하면서 시원시원하게 정면 너머로 말을 건다. 단감을 건네고 빵을 쥐여 주며 연출자와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친교의 순간들 사이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대뜸 등장한다. 이들이 한밤중 공사장 위로 망루를 세울 때다. 좁은 곳에서 이것저것 옮기느라 동선이 복잡해지자 한 남성이 카메라 쪽을 향해 “이쪽으로 비켜라, 박감독”이라고 말한다. 카메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구잡이로 흔들리며 그 자리를 비켜난다. 카메라를 붙잡고 응시해야 한다는 목적보다, 지금 그곳은 당신의 자리가 아니며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얼른 비켜야 한다는 제안이 더 크게 요청될 때 <사상>의 카메라는 더없이 흔들린다. 그 남성의 요청에는 어떠한 비난적 어조도 없으며 별다른 가치판단도 개입되지 않았으며, 여기에 녹아든 진실은 오로지 지금 이곳의 모두에게는 영화 찍기보다 망루 세우기가 더 중요한 목표라는 사실 뿐이다. 카메라를 치우라는 주문, 그래서 카메라가 진짜로 치워지는 이 장면은 다소 급작스럽지만 따스하게도 느껴진다. 이는 얼핏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1995) 속 한 장면을 상기하게 만든다. 호박을 캐오던 할머니가 호박을 놓치자 감독이 함께 주우러 카메라 안으로 갑작스럽게 뛰어드는 장면이다. 정한석 평론가가 짚은 바 있듯 변영주는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중요시하는” 감독이며, 그리하여 “환영을 깨는 것에 개의치 않는” 소박한 목표에 곧장 도달한다. 그러니 <사상>의 이 대목 또한 이 영화가 시종 역설하고 있는 바를 더없이 명징하게 일러주는 대목이다. 본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여기에 먼저 있다.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는 자리를 양보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사상>에서 치워질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장소를 잃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카메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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