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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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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한없이 작고 평범한, 그래서 특별한 재복의 이야기2021-11-02
휴가 스틸이미지

 

 

<휴가> :한없이 작고 평범한, 그래서 특별한 재복의 이야기

 

 

구형준 (부산영화평론가협회)

 

1.

 

   소박하고 소탈하며 단출하다. 처음 <휴가>(2021)를 보고 내가 느낀 감상이다. 실제로 영화도 장기농성 중인 해고노동자 재복(이봉하)이 열흘간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본 설정 외에 별다른 극적 구성을 취하지도, 이렇다 할 미학적 기교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정직하고 무뚝뚝하다고 할까. 마치 사려 깊게 에둘러 말하지 못하고 매번 대뜸 던지듯 말하는 재복처럼, <휴가>도 자신의 작품 속 인물과 꼭 닮아있는 영화다. 하지만 한편으론 정직하고 단출한 영화가 으레 그렇듯, <휴가>는 딱히 영화적 야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조금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먼저 고백해야겠다. 사실 나는 <휴가>를 통해 이란희 감독을 처음 알게 되었고,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장기농성을 다룬 단편<천막>(2016)을 비롯한 그의 전작들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천막>이 실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을 배우로 기용한 과감한 픽션이라는 것도, 그리고 <휴가> 속에 실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와 <천막> 속 독특한 픽션-인물들이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있다는 내막도 모른 채 영화를 보았다. 이런 배경은 모두 영화를 본 후 감독의 인터뷰 등을 읽고서야 알게 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그 둘레에 자리 잡은 이런 저런 현실의 흔적들을 알게 된 뒤, 작품에 대한 감상의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영화가 달리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애처롭긴 하지만 새롭지는 않았던 영화 속 사연들과 관계들이. 그리고 무엇보다 재복이란 인물의 영화적 존재감이. 그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몸짓과 말. 특유의 멀뚱하고 퉁명한 표정과 걸음걸이 같은 것들이 모두 다르게 느껴졌다. 영화는 달라진 게 없는데, 도대체 뭐가 바뀐걸까?

내가 속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면 같은 대상도 다르게 대하는 일종의 간사함을 지녔기 때문일까? 솔직히 아주 아니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엔 픽션과 픽션의 이면에 가려진 현실이 서로 상호작용하거나, 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정서적 효과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휴가>는 픽션의 안팎에서 불현듯 현실의 그림자를 투사해 영화의 세계를 육중하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 육중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판판하게 가다듬으며, 픽션과 현실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는 영화다. 물론 이 글에서 새삼 픽션과 현실의 본질적 상관관계를 파헤치려는 건 아니다. 다만 <휴가>와 맞닿아 있는 영화 안과 밖의 복잡다단한 접촉면들 속에서 서성거렸던 나의 헤맴을 조금 풀어보고자 한다.

 

휴가 스틸이미지

 

2.

   이란희 감독은 <휴가>에 대한 인터뷰에서 <천막>을 만든 후 여의도 농성장에서 영화를 상영한 경험을 반추하며 해고노동자들이 길바닥에 앉아 꿉꿉한 영화를 보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고, 다음엔 지난한 현실을 다루면서도 신나고 기운을 얻을 만한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처음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밴드를 결성해 음악으로 투쟁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한다.(‘천막에서 천막으로’, 리버스미디어, http://reversemedia.co.kr/article/415)

하지만 그 음악영화의 시나리오를 본 연대 당사자들이 상당히 난감해하며 받아들이기 어려워했기에 영화로 발전시킬 수 없었고, 대안을 찾던 중 지금의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요컨대 <휴가>, 그 출발부터 현실의 특정한 어떤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허구를 벗어나지 않아야한다는 전제를 지닌 이야기였다.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실존인물이 등장하지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도 않지만, 그 이야기와 이어진 현실의 누군가가 행여 마음을 다치지 않을 만큼의 품. 그리고 그 품을 면밀히 검토하고 거리를 유지하려는 사려 깊은 태도.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휴가>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영화적 당위인 것이다.

즉 이 픽션 속엔 누구보다 픽션 바깥에 실존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과 무관함에도)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말 한마디 내뱉지도, 찰나도 등장하지 않으며, 직접적인 연결고리도 없으나, 역설적으로 이 픽션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고 있는 현실의 살아있는 사람들. 짧은 이야기 안에 차마 압축할 수 없는 그들의 고초와 투쟁의 역사들. 그래서일까. <휴가> 속엔 돈과 가족, 노동과 취업과 진학, 식사와 건강 등, 누구나 겪었을 법한 고민과 갈등들이 산적해 있지만 그런 소재들 중 어느 하나도 스스로 발 딛고 있는 현실의 땅을 벗어나 서사적인 재료로 소비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은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한 요소로서 담담하고 소박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생활감 가득한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결코 그 생활감이 벗겨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영화. 어떻게든 시작과 끝으로 맺어져야하는 허구임에도 그 속에 허구의 위악이 틈입하지 못하도록 무진 애를 쓰는 영화. <휴가>는 그런 영화다.

 

휴가 스틸이미지

 

3.

   재복은 우연찮게 친구 우진(신운섭)의 가구공방에서 단기로 일하게 된다. 일터(가구공장)에서 사람답게 일하기 위해 투쟁하는 일터(농성장)에서 지내다, 잠시 휴가차 짧은 일터(가구공방)로 떠나는, 일터들의 역설적인 폐쇄회로. 하지만 그 중 어디에도 제대로 된 노동환경이 보장된 곳은 없다. 자재를 꺼내다 떨어져 다친 가구공방 직원 준영(김아석)은 응당 받아야할 휴업급여와 치료비등의 복지를 그저 껄끄러운 절차로만 여긴다. 또 산업재해처리를 당연히 제공해줘야 할 고용주 우진도 부담스러워하긴 마찬가지다. 재복은 이렇게 노동자를 소모품 취급하는 환경을 부당하다 느끼지만 당사자가 아니기에 직접 나서기도, 그렇다고 아주 못 본척하기도 찝찝한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재복은 우진과 함께 가구 마감을 하며 준영의 산재처리를 해줄거냐고 넌지시 묻지만 우진은 이런 중소기업에 산재가 어딨냐며 꼭 현실 어딘가의 사업주가 할법한 대답을 한다. 재복은 여기는 법도 없냐고 따지듯 되묻지만 우진은 너는 세상일이 다 법대로 되더냐고 다시 반문한다. 그에 재복은 차마 더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닫은 채 일감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일에 몰두하는 재복의 조용한 얼굴이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길 때 쯤, 우진이 마감질에 대한 충고를 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말을 건다.

이 장면은 우진에게 따지듯 묻는 재복의 모습이 그의 상상인지, 혹은 영화적 판타지인지, 아니면 정말 이루어진 대화인지 모호하기에 얼마간 묘하다. 우진에게 버럭 화내는 재복의 모습은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한편으론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어려운 자신을 도와준 우진에게 대놓고 입바른 말을 하기 힘들 것이기에 그저 상상 속 대화일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장기농성 중인 해고노동자로서 남일 같지 않은 상황에 분통이 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상상이냐 실제냐를 판가름 하는 것보다, 재복이란 인물이 속한 영화적 세계와 그 바깥, 즉 현실과의 이음매가 은근하고도 신기하게 맞춰진다는 점이다. 재복은 불합리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을 은유하는 영화적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모든 부당함에 맞서 결연히 몸을 던지는 상상 속 히어로는 결코 아니다. 그는 용감하지만 연약하고, 강하지만 패배한다. 특별하지만 평범한 재복. 그리고 그 모습에서 연상되는 현실의 무수한 재복들. <휴가>는 여기서 상상과 실제를 은근히 중첩시키는 표현을 통해 영화적 서사와 현실적 소재를 결합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영화의 안팎에 자리한 현실의 조각들을 불러들여 재복이란 인물을 픽션 내부에 자리 잡게 하면서도, 픽션 외부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못 본 채 하지 않는다.

 

휴가 스틸이미지

 

4.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왜 처음의 음악영화 이야기를 보고 난감해 했을까? 물론 그들의 아픔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내가 함부로 그 마음을 넘겨짚을 순 없다. 하지만 마냥 억울하고 슬프기만 하지도, 그렇다고 행복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자신들의 복합적인 역사를 음악영화라는 장르적 형식이 단순한 형태로 압축하고 있다고 느끼진 않았을까. 단언할 순 없지만 아마 이란희 감독도 그걸 느꼈던 것 같다. 대부분의 관객에겐 그저 한 편의 영화로만 다가올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일 수 있음을 그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휴가>는 노동자를 픽션으로 다루면서도 그 이면의 현실이 훼손되지 않도록 예민하게 세공한다. 그리고 그렇게, 상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휴가>의 재복이 탄생한다. 재복은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 그는 매사 툴툴거리는 성격으로 밥을 차리고, 냉장고를 청소하며, 함께 일하는 동료를 염려하고 보일러를 고쳐준다. 부당한 처사에 과감히 맞서는 상상을 하지만 차마 실천하진 못하고 상상에 그친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한없이 작고 평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

서두에 언급했듯이 <휴가>는 영화 속 재복과 닮아서 정직하고, 그래서 얼마간 심심하기도 한 영화다. 영화 안팎에 자리한 이런 저런 내막들을 알고서 영화를 다시 보아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정직하고 심심한 것이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결함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짧은 말로 단언할 수 없는 누군가의 지난하고 복잡한 이야기들. 하지만 그렇기에 일목요연하지 못하고 지루하기도 한 개인의 역사들. <휴가>는 이 사이에서 한 사람 속의 멀고도 먼 양면을 묵묵히 한 초상화 속에 담는다. 나는 거기서 피어난 <휴가>의 작은 정직함과 어색한 심심함이, 오히려 귀하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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