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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계획이 있었던' 아버지의 뻔하지 않은 이야기 <킹 리차드>202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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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계획이 있었던’ 아버지의 뻔하지 않은 이야기 <킹 리차드>
송영애(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화 <킹 리차드>(레이날도 마르쿠스 그린, 2021)는 테니스 선수 비너스 윌리엄스와 세레나 윌리엄스의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다. 더 정확하게는 포스터의 분위기대로 아버지 리차드와 어린 비너스와 세레나를 중심으로 어머니 오라신과 다른 세 자매까지 온 가족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담아낸 영화다.
비너스와 세레나가 테니스계에서 보기 드문 흑인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면, ‘감동 실화’, ‘아버지의 헌신’, ‘가족의 희생’ 등의 키워드에 ‘인종 차별’ 등의 키워드를 떠올리게 될 듯하다. 영화 <킹 리차드>는 이런 키워드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지만, 뻔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 영화가 조금씩 예상을 빗겨나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다 계획이 있었다!
소위 ‘성공 신화’의 시작에는 ‘우연’이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우연히 발견하거나 알게 된 누군가의 천재적인 재능처럼 말이다. <킹 리차드>에서는 우연 대신 허풍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계획이 등장한다. 리차드는 비너스와 세레나가 태어나기 전에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를 키워낼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사실 계획이란 게 반드시 성공적으로 실행된다는 보장은 없다. 더욱이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를 키우겠다는 계획은 리차드처럼 78쪽 분량이 아니라 780쪽 분량으로 상세하게 세운다 해도 상상이나 바람으로 끝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태어난 아이가 재능을 갖고 태어날지도 의문이고, 부모의 뜻대로 자라줄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 아무리 부모라지만 아이의 인생을 미리 계획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 리차드와 오라신의 계획은 실행됐고,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의 계획에는 꽤 상세한 훈련 계획과 프로 진출 계획, 세계대회 우승 계획 등이 포함되었다. 그렇다고 비너스와 세레나에게 가혹한 훈련을 강요했던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포함되어 있을 것 같은 주니어 대회 출전이나 우승 계획은 빠져 있고, 대신 학교생활과 가정생활을 지켜주기 위해 애쓴다. 소위 엘리트 체육 교육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이웃이 아동학대로 신고하기도 하지만, 열악한 훈련 환경 속에서 함께 하는 윌리엄스 가족은 즐거워 보인다. 비너스와 세레나를 위해 다른 자녀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시작은 부모의 계획이었지만, 과정에는 가족 모두가 함께한다.
- 모두가 투사는 아니다!
가족 모두가 함께한다고 하나, 전문 코치도 없고, 시설 좋은 코트도 없다. 그런데도 세계적인 선수가 둘이나 탄생했으니, 여러 역경을 극복해냈을 거란 예상이 가능하다. 극적인 사건이나 악역이 등장할 것 같으나, <킹 리차드>에서 이 예상은 빗나간다.
윌리엄스 가족이 극복해야 하는 역경은 특정 사건이나 개인이 아니라, 상황 그 자체이다. 백인이 주류인 테니스계 상황과 과거보다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한 인종 차별 상황이 구체적 사건이나 인물 대신 두려움과 어려움을 증폭시키는 배경으로 제시된다. 윌리엄스 가족이 해결해야 하는 갈등은 가족 내부에서 발생한다.
영화 초반부터 리차드는 자신과 자신 부모의 차별 경험을 여러 차례 이야기한다. 영화 중반에는 1992년 ‘LA 폭동’의 계기가 되었던 로드니 킹 폭행 사건을 보여주는 TV 뉴스도 나온다. 뉴스를 보며 리차드와 오라신은 이런 일이 또 생겼음에 참담해 하면서, 그래도 이번엔 영상에 찍혀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비겁하다 할 수도 있으나 현실에서도 모두가 투사는 아니다. <킹 리차드>는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과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물론 새로운 길을 열어나간 사람의 이야기이니 기준에 따라서는 투사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윌리엄스 가족이 희생자나 피해자로 그려지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백인 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은 일단 자주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 않지만, 맥락 없는 범죄자, 도움이 필요한 희생자나 피해자, 혹은 투사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킹 리차드>에서는 모두 보기 힘든 모습이다.
대신 이 영화는 철저하게 리차드를 중심으로 한 윌리엄스 가족의 이야기이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계획을 실행하는 가족의 갈등과 화해, 화합하는 모습은 공감하기 쉽고, 유쾌하다. 테니스를 모르거나, 윌리엄스와 세레나 선수를 몰라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너무 뻔한 할리우드식 인종 스테레오타입을 답습하고 있지 않아 오히려 신선하기도 하다.
한편 리차드를 연기한 배우 윌 스미스가 <킹 리차드>로 남우주연상을 휩쓸고 있다. 지난 3월 27일(현지 시각 기준)에 개최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남우주연상을 받아 아카데미 사상 다섯 번째 흑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다. 올해로 94회를 맞은 아카데미에서 다섯 번째라고 하니, 미국 영화계도 테니스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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