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 클로드 샤브롤 감독론2017-02-20
-
클로드 샤브롤
김이석 동의대학교 영화학과 교수
클로드 샤브롤은 50년이 넘는 창작활동 기간 동안 57편의 영화와 22편의 TV용 영화를 연출하였다. 1930년 약사의 아들로 태어난 샤브롤은 부모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약학과 문학을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는 강의실보다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소르본 대학 주변의 영화관을 더 자주 드나들었고, 결국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53년부터 샤브롤은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 자크 리베트(jacques Rivette), 에릭 로메르(Eric Rohmer) 등과 더불어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평론가로 활동하게 된다. 1955년에는 20세기폭스사의 프랑스지사 홍보 담당으로 일했으며, 1957년에는 에릭 로메르, 도미니크 라부르딩(Dominique Rabourdin)과 함께 자신이 존경했던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시네필에서 영화감독으로
1958년 클로드 샤브롤은 자신의 첫 장편영화 <미남 세르주>(Le Beau Serge)를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자전적인 성격의 이 영화는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샤브롤은 주목받는 프랑스의 신인감독에게 수여되는 장 비고(Jean Vigo)상을 수상하게 된다. 1959년에는 두 번째 영화 <사촌들>(Les cousins)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다.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보다는 몇 개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보다는 1년 앞서 발표된 이 영화는 전 세계가 프랑스 영화계를 주목하게 만든 작품 중 하나였다. 같은 해 샤브롤은 자신의 세 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컬러영화인 <레다>(À double tour)를 발표한다. 50년이 넘는 활동기간 동안 샤브롤의 영화세계가 부침을 반복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적인 위선에 대한 고발, 선악의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 등 샤브롤 특유의 문제의식은 이 초기작들 속에 이미 확고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열성적인 관객의 한 사람으로 출발해서 영화에 관한 전문적인 글을 쓰다가 마침내 창작자의 길을 걷게 된 샤브롤의 여정은 고다르나 트뤼포 등 누벨바그 시대를 열어간 동료 감독들의 행보와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고다르나 트뤼포 등이 시네필 시절의 열정을 유지하면서 기존의 영화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탈-관습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썼던 것과는 달리, 샤브롤은 대중적인 장르 영화를 즐겨 만들었다. 평론가 세르주 투비아나는 시네필의 영역에서 대중적인 영역으로 옮겨간 이런 변화가 샤브롤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 역시 영화에 대한 샤브롤 자신의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누벨바그와 샤브롤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5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샤브롤은 한 번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다. <사촌들>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잠시 주목받기도 했지만, 세계영화계의 관심은 이내 <400번의 구타>를 만든 트뤼포와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든 고다르 등 다른 감독들에게로 옮겨가게 된다. 당연히 누벨바그의 대표감독이라는 명예로운 호칭도 이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프랑스 국내의 평가도 그리 후한 편은 아니었다. 칸국제영화제에는 <비올렛 노지에르>(Violette Nozière, 1978)와 <닭초절임>(Poulet au vinaigre, 1985) 두 편의 영화가 공식 경쟁부문에 초청되었을 뿐이며, 프랑스의 세자르 영화상에서도 두 차례 후보로만 올랐을 뿐 한 번도 수상을 하지 못했다.
샤브롤의 성격도 이런 평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고다르, 트뤼포, 로메르 등 샤브롤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감독들은 예술가로서 자의식이 매우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때로는 영화보다 더 강렬하고 매혹적이었다. 반면 샤브롤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에 “나는 자아가 없다”며 사양할 정도로 겸손한 인물이었다. 논쟁의 시대, 선언문의 시대였던 1960년대에 샤브롤이 보여준 겸손함은 적어도 비평가들의 시선에는 미덕이 아니었다.
비록 언행은 겸손했지만 그의 영화는 결코 모호하거나 온화하지 않았다. “모든 경우에 변함이 없는 것은 내가 결코 우스꽝스럽지 않은 것들을 조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샤브롤 자신의 말처럼, 그는 언제나 프랑스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부르주아적인 가치에 대해 첨예하게 맞서곤 했다. 부르주아를 ‘우리에게 남아있는, 우리를 지배하는 유일한 계급’이며 ‘가장 우스꽝스럽고, 가장 흥미로운’ 존재라고 인식했던 그의 대표작들 대부분은 자신이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주목했던 부르주아들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장르적으로 샤브롤은 자신이 존경했던 알프레드 히치콕 스타일의 서스펜스 스릴러를 즐겨 만들었지만, 그의 영화 속에 담긴 신랄한 비판정신과 그가 창조한 독특하고 파격적인 캐릭터들은 샤브롤이 단순히 히치콕의 아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여인들
클로드 샤브롤의 영화세계는 여인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아내 덕분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었고, 스테판 오드랑(Stéphane Audran)과 이자벨 위페르(Isabelle Huppert)라는 두 명의 여배우와 함께 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그의 주요 작품 대부분은 여성이 주인공이다.
샤브롤은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던 첫 번째 부인 아네스 구트(Agnès Goute)의 도움으로 1957년 자크 리베트의 단편영화 <양치기 전법>(Le Coup du berger)을 제작했고, 이듬해에는 자신의 첫 장편영화 <미남 세르주>를 연출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부인이었던 배우 스테판 오드랑과의 인연은 좀 더 각별했다. <사촌들> 이후 별다른 성공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던 샤브롤은 오드랑을 만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68년 영화 <암사슴>(Les biches)은 샤브롤과 오드랑의 첫 번째 합작품이었다. 우리말 제목은 다소 순화되어 있지만, 원제목은 ‘못된 X들’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속된 표현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 오드랑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유혹하는 부유한 양성애자라는 파격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암사슴>에서 시작된 샤브롤과 오드랑의 협업은 1978년에 발표한 <비올렛 노지에>까지 이어진다. 비록 오드랑과의 관계에 대해 훗날 ‘가정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다소 매정하게 평가하기도 했지만, 샤브롤과 오드랑의 협력관계는 두 사람 모두에게 매우 성공적이었다. <비올렛 노지에>는 샤브롤이 오드랑과 함께 한 마지막 영화이자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한 첫 번째 영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에서 오드랑이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딸에게 살해당하는 어머니 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오드랑과 결별한 샤브롤은 위페르라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나면서 전성기를 이어가게 된다.
샤브롤이 창조한 인물들은 대단히 파격적이었지만 이런 인물을 구현하는 과정은 대단히 인간적이었다. 샤브롤을 통해 배우로서 만개할 수 있었던 이자벨 위페르는 처음 영화를 찍을 때부터 마치 십여 편의 영화를 찍은 것 같은 친밀함을 느꼈으며, 그의 작업방식에서 ‘일종의 휴머니즘’을 느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런 신뢰 덕분인지 샤브롤과 함께 했던 배우들은 좋은 평가를 받곤 했다. 스테판 오드랑은 <암사슴>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주연여우상과 <비올레트 노지에르>로 세자르상 여주조연상을 수상했다. 또 이자벨 위페르는 <비올렛 노지에르>로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여자 이야기>(Une Affaire De Femmes)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의식>으로 세자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샤브롤이 창조한 여성 캐릭터는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관계를 주도하고 자신만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고, 이로 인해 기존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존재들이다. 이처럼 여성에 관한 영화를 즐겨 만든 이유에 대해 샤브롤은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그는 남자들은 대부분 비열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남자다움이라는 잘못된 품성으로 벌충하려고 애쓰는’ 존재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인간
클로드 샤브롤은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작가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에 그는 기꺼이 대중적인 장르영화를 만들었다. 모두가 텔레비전을 경계하고 무시할 때, 그는 기꺼이 텔레비전 영화를 만들곤 했다. 비평가들은 그의 영화가 미학적인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꾸준히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클로드 샤브롤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클로드 를로슈 감독에 따르면 샤브롤은 혁명과 전통을 동시에 대변해왔으며, 양자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 인물이었다.
과도한 자의식, 세간의 평판, 찰나적인 유행 등에 짓눌리거나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샤브롤은 누벨바그 시대의 동료들이 대부분 창작활동을 멈춘 1990년대 이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세르주 투비아나가 말한 것처럼 샤브롤에게 있어서 “영화란 곧 그의 삶이었고, 그는 자신의 삶을 탐식하며 살았다.”
- 다음글 기억과 기록, 그리고 사진에 대한 영화 <봉명주공>
- 이전글 일상의 소소한 용서들 - <소설가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