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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되기, <오마주>202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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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예술가 되기, <오마주>
강선형(한국영화평론가협회)
얼마 전 한 동료가 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로 고민해 온 문제를 이야기한 적 있다. 왜 학자나 예술가는 출퇴근 시간이 명확하지 않고 여가(餘暇)의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동료는 학자를 꿈꾸는 대학생들로부터 ‘학자가 되려면 몇 시간을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말문이 막혔다고 했다. 이 질문에 어떻게든 답하기를 시도해보자. 어떻게 답하든 우리는 최소량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학자나 예술가가 되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에 대해 어느 정도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최대량으로 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그 동료는 학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학자나 예술가라는 직업군의 유난함에 대해서.
사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절대적인 양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적당히 해서는 먹고 살 수 없는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늘 사직서를 품고 사는 회사원들의 삶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하며 살 수 있다. 모두가 이사나 CEO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자는 교수가 되지 않으면 먹고사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예술가는 몇 편 되지도 않는 자기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풀칠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가 될 때까지 또는 무언가가 완결될 때까지 작업은 끝날 수 없다. 그뿐인가? 어쩌면 절대적인 양을 늘려서 완결될 수 있는 문제라면 오히려 쉬웠을 것이다. 작가들은 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천재적인 작가는 더 적은 노력과 시간으로 더 멋지고 완벽한 작업을 토해낼 것이란 사실을.
<오마주>의 영화감독 지완(이정은)은 그런 삶을 택한 사람이다. 시나리오의 맞춤법이 ‘되’인지 ‘돼’인지 작은 고민부터 막연한 ‘재미없음’이라는 아들(탕준상)의 평가까지 감수하면서 그런 삶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천만 영화’는 젊은 시절에는 당위적으로 거부되었던 수식어일지 몰라도 지금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수식어이다. 끊임없이 영화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지만, 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녀는 생활비를 주지 않겠다는 남편(권해효)의 선언에도 쫓겨나면 돈이 없어서 살 곳을 마련할 수도 없기 때문에 ‘거실’로 분가하여 소심한 시위를 해볼 뿐이다. 영화는 그녀에게 명예도, 돈도, 미래도 주지 않는다. 존경은커녕 존중도 얻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완을 그만두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도 영화에 자신을 붙들어 놓는 것, 그건 도대체 무엇일까? 지완은 더 이상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들과 함께, 세상의 너무 많은 좌절과 죽음들 앞에서 갈팡질팡하면서, 한국의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 홍은원을 만난다. 홍은원의 <여판사>라는 작품의 사운드를 복원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이다. 지완은 영화를 보고 잃어버린 작품의 조각들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홍은원(김호정)의 맑게 웃고 있는 사진,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 그녀의 작업 공간, 그녀의 영화가 상영되었던 영화관, 검열로 인해 잘려져 나간 장면까지 하나둘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여성으로서 영화를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시절, 홍은원이 지녔던 꿋꿋함이 자신에게 와 닿는 것을 느낀다.
홍은원은 실제로 1947년 스크립터를 시작한 뒤 십여 년 만에 <여판사>라는 작품을 감독한다. <여판사>라는 작품은 한국 최초의 여성판사인 황윤석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 유명세를 이용하려고 했던 영화였다. 사람들은 황윤석의 죽음에 최초의 여성판사와 결혼한 남편의 열등감을,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키워나갔지만, 결국 그녀의 사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은 종결되고 말았다. <여판사>는 그런 사람들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여판사> 속 여판사 진숙(문정숙)은 사회활동을 하는 부인을 둔 남편의 자격지심을, 그리고 시어머니의 은근한 불만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에서 일어나는 죽음은 현실에서와 같이 여판사 그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시할머니의 죽음이다. 시할머니가 사망하고 시어머니가 의심받자 진숙은 판사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서 시어머니의 변론을 맡는다. <오마주>에서 지완은 영화에서 그려진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사랑받으면서 열심히 일하는 현대 여성으로서의 진숙을 향해 ‘슈퍼우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 황윤석은 사인조차 밝혀지지 않는 죽음을 맞고, 그녀의 남편은 유기치사 혐의로 1심에서는 유죄판결을, 2심에서는 무죄로 풀려났는데, 영화 속 진숙은 자격지심으로 인해 바람을 피운 남편과 화해하고 시어머니를 위해 변호를 맡을 만큼 사회가 요구하는 완벽한 슈퍼우먼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지완의 말에는 그런 히어로가 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여전히 그런 요구를 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실망감이 모두 묻어난다.
왜 우리는 그런 초인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하는가? <여판사>가 개봉했던 1962년에 앞서 1960년 개봉했던 김기영의 <하녀>를 떠올려보면, ‘여판사’라는 제목에서 기대할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진취적인 묘사와 같은 것은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홍은원이라는 감독의 역량의 문제였을까? 홍은원이 십여 년 만에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여판사의 이야기를 여자 감독이 만들면 이목을 끌 수 있겠다는 제작사의 판단 때문이었다. 오직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독이 될 수 없었고, 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데뷔할 기회를 얻었던 것을 돌이켜보면, 홍은원이 완전한 자유 속에서 새로운 여성상을 그려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성 감독이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차별성에는 사회와 시대가 그어놓은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진숙의 대사들에는 언뜻언뜻 홍은원의 열정이 묻어있다.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는 전 여자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여성은 주부가 되는 길이 제일 행복한 길이 아닐까 묻는 남자에게 ‘여성이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가정 파괴의 위험성이 백 퍼센트 부수된다고는 할 수 없잖아요’라고 답하는 것 등에서 말이다.
<오마주>의 지완은 검열로 인해 잘려 나간 <여판사>의 필름을 찾아다니다 결국 중요한 장면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영화 속 진숙의 담배 피는 장면이다.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이든 아니든 여성이 담배를 피운다면 도려내어져야만 했던 시대, 지완은 그 시대를 마주하면서 홍은원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런 시대와 사회의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영화가 자신이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든 아니든 꿋꿋하게 만들어갔던 홍은원의 삶에서 위대함을 발견한다. 천만 영화나 해외 영화제에서의 최고 작품상 수상과 같은 수식어의 위대함이 아니라, 지독한 한계 속에서도 하루하루 자신의 영화를 꿋꿋하게 만들어가는 일의 위대함 말이다. 그래서 지완은 세상에서 금세 잊혀버리고 마는 죽음들을 목격하면서 느끼고 있었던 그 자신의 죽음 역시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슬픔을 떨쳐낸다. 그리고 지완과 함께 우리 역시 매일매일 작은 나아감이 있는 위대한 삶들, 살아있음을 다시 발견한다. 모든 직업으로서의 예술가 되기 또는 모든 부침을 겪고 있는 삶들에 대한 따뜻한 위로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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