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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초록밤>을 가득 채운 것들20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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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록밤>을 가득 채운 것들
송영애(한국영화평론가협회)
윤서진 감독의 영화 <초록밤>은 제목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까만 밤이나 하얀 밤은 들어봤지만, 초록 밤이라니 낯설었기 때문이다. 밤을 색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칠흑 같은 밤’이나 ‘까만 밤’, ‘하얗게 지샌 밤’이라는 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과연 영화 <초록밤>은 어떤 밤을 어떤 방식으로 담아낸 걸까?
<초록밤>은 장편 극영화에서 익숙한 극적인 스토리와 문제해결 식 구성을 담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평범한 일상의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대신 어딘가에서 누군가 겪고 있을 만한 일상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볼 수 있도록 한다. 어느 순간에는 감정,이입하다가, 외면할 수도 있는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한다.
덕분에,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혹은 낯선, 혹은 불편한 <초록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을 찾아보고 싶다.
일상의 이면
<초록밤>의 이야기는 극적이지 않다. 기승전결 식의 구성과도 거리가 멀고, 문제 해결 식 내용도 아니다.
아파트 야간 경비 일을 하는 성근은 경비를 서던 중, 누군가가 죽인 고양이를 발견하지만, 묻어주곤 끝이다. 충격을 좀 받은 것 같으나, 그의 일상이 크게 바뀐다거나, 범인을 잡기 위해 애쓴다거나, 관련된 다른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성근은 영화 내내 말도 거의 하지 않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 수가 없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아 보인다. 대사는 대부분 짜증과 푸념인데, 분양받았던 아파트를 잃은 것 같고, 남편 가족과 관련해 여러 일도 겪은 것 같다. 그렇다고 새로운 갈등 상황에 부딪히거나, 새로운 일을 겪는 건 아니다.
그의 아들 원형은 장애인 활도 보조사로 일하고 있고, 오랜 연인도 있다. 다만 바로 결혼을 할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역시 연인과 새로운 위기를 맞는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버지처럼 말 수가 거의 없어서, 그의 마음도 도통 알기가 어렵다.
성근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만,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와 임종을 지킨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냥 어느새 장례식장에 모인 가족들이 말다툼을 좀 벌이지만, 그걸로 끝이다. 이후 오해를 푼다거나, 화해하는 장면은 없다. 이어서 다음 장례 절차가 진행될 뿐이다.
이렇게 글로 쓰니 복잡해 보이나, 영화에서는 경비를 돌고 있는 성근의 모습, 장애인을 돕고 있는 원형의 모습, 식사 준비를 하거나 김치를 담그는 성근의 아내 모습, 장례식장에서 말다툼하는 모습, 절로 걸어가는 모습 등이 길게 멀리서 담담하게 보인다.
게다가 성근이 손전등을 들고 걷는 모습, 원형이 차 안에서 연락을 기다리는 모습 등 그들이 뭔가 말하고 행동하기 전 후의 모습을 더 길게 보여준다. 한 장면이 한 커트인 경우도 많아, 멀리서 구경하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게 그들의 일상이 담겼다. 누구나 늘 겪는 일상은 아닐지 몰라도,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일상으로 보인다. 영화 중반에 조금은 충격적인 일이 생기긴 하나, 그 또한 그냥 또 그렇게 지나간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온통 어두운 공간
생각해보면 극적일 수도 있으나, 거리감을 둔 채로 구경하기엔 별로 드라마틱하지 않은 인물들의 일상을 구경하고 있자면, 답답함도 느끼게 된다. 과묵한 인물들, 카메라의 거리감 때문만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초록밤>의 영상은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 일단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다. 화면의 상당 부분이 거의 까맣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초록밤>에는 밤 장면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밤 장면도 도시의 대낮 같은 화려한 밤거리 대신, 오래된 아파트 주변의 어두운 공간을 보여준다. 성근이 야간 근무를 서는 아파트도 유독 어둡다.
밤이라서만은 아니다. 원형이 장애인을 기다리는 주차장은 하필 지하 주차장이다. 장례식장, 사우나, 모텔 등 실내 공간도 등장하지만, 어두침침하다. 성근의 아내가 볼일을 보러 걸어 들어간 도로 옆 숲도 참 어둡다.
어두움 이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소위 말하는 여백의 미는 기대할 수 없다. 성근의 아버지 장지는 나무 기둥 너머에 있다. 화면은 온통 짙은 밤색의 나무 기둥으로 가득 찬다. 포스터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인데, 나무들 사이로 상복을 입은 가족들이 보인다. 거실, 경비실, 복도, 인도, 절 입구 등의 공간은 집안 살림, CCTV, 벽, 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그 공간 안에 자리한 인물의 마음이 그렇게 무언가로 빼곡하고 무거운 걸까?
- 그리고 소리와 초록빛
그렇게 멀고, 어둡고, 답답한 영화적 공간 속에 인물들은 걸어가거나, 앉아있거나, 어딘가 바라보고 있다. 대화나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짧게 나오고, 그 이전과 이후 인물의 모습을 더 길게 보여주는데, 보이는 만큼의 소음도 들려오고, 현악기와 피아노가 주로 사용된 음악이 들려온다.
그리고 초록빛도 보게 된다. 밤 장면에서는 필터 등을 사용해 화면이 전체적으로 초록빛이기도 하고, 가로등 빛만 초록빛이기도 하다. 흔히 이야기하는 밝고, 생기 있는 초록빛과는 거리가 멀다. 매우 인위적인 색이라 할 수 있는데, 멀리서 길게 어둡게 보여주는 공간과 인물, 여러 소리와 음악과 어울려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 <초록밤>의 초록밤은 차마 끝내지 못하고, 이어가는 일상 속에서 무기력함으로 가득 찬 밤이다. 언뜻 보면 그저 무덤덤한 일상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것뿐이지만, 답답함을 넘어 불안함도 느껴진다. 쌓아두고, 채워두기만 해서, 언제가 터질 것 같은 그들의 마음이 외면해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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