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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탑> 시간의 안과 밖202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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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시간의 안과 밖
김나영 시민평론단
영화감독 병수(권해효)는 5년 만에 만난 딸 정수(박미소)와 함께 인테리어 디자이너 해옥(이혜영)을 만나러 간다. 미술 공부를 그만두고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려는 딸 정수를 해옥에게 소개해주기 위해서다. 해옥은 두 사람에게 자신의 4층 건물을 한 층씩 올라가며 소개한다.
<탑>을 구성하는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안과 밖이다. 병수가 자리를 비운 다음 정수는 해옥과 병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정수는 병수가 집안과 밖에서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며 사람들은 그의 진짜 모습을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해옥은 집 밖에서의 모습이 진짜 병수일 수도 있다며 무엇이 진짜 병수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고 답하는데, 공교롭게도 병수는 이후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온 다음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밖으로 나서지 못한다.
기타 선율이 흐르고 건물 입구를 비추는 화면 밖에서 병수가 해옥의 건물 입구로 걸어온다. 기타 선율은 영화에서 몇 번 더 반복되는데 그때마다 병수가 거처하는 장소, 맺고 있는 관계, 건강 상태의 변화가 동반되어 기타 선율이 시간의 흐름을 암시하는 것처럼 기능한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병수는 분화된 시간 속에서 비록 점점 그 위상이 흔들릴지언정 언제나 영화감독이다. 정수의 말에 의하면 병수는 걱정과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고 선희(송선미)와의 대화에서 병수 스스로가 자신은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보았다며 덕분에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병수의 말은 역설적으로 그의 불안을 드러낸다. 일련의 변화들에도 영화감독과 불안이라는 두 가지 중추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그를 구성한다.
표면적으로는 <탑>이 홍상수의 전작들보다 인물의 동일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선형적 시간 개념을 흔드는 시도를 약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건물의 수직적 구조와 결부된 몇 가지 기호(이를테면, 3층의 물이 새는 천장, 옥탑의 물이 빠지지 않는 욕실)들이 여전히 영화를 보는 관객의 인물이나 시간에 대한 관습적 인식에 혼란을 야기한다.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선형적으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도 읽힌다.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은 왜 중요한 문제일까. 인과는 선형적 시간이 전제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과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병수가 자신의 자동차에 다시 올라타 시동을 켰다가 내린 후 정수가 등장하는 마지막 시퀀스의 장면의 흐름 때문이다. 이 순간 정수가 다시 등장할 수 있었던, 그래서 시간이 앞으로 되돌려졌다는 혼란 속에 관객을 밀어 넣는 영화의 논리는 무엇인가. 병수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가 끄고 다시 내리는 일련의 동작들 ‘이후에’ 정수가 나타난다. 어떤 편집도 없이 배우가 행하는 일련의 동작만으로 시간의 성질이 변했다. 인물의 옷, 병수의 자동차, 같은 건물 앞이라는 이전과 공통된 기호들의 배치 속에서 마치 병수가 차에서 내렸기 ‘때문에’ 시간이 역행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 순간 병수는 자동차에서 왜 내린 걸까? <탑>의 형식 안에서는 시간이 한순간 압축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간편하게 말해도 좋은 걸까. 아니면 자동차에서 내린 것을 병수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선형적 시간과 중첩된 다층의 시간이 혼재된 <탑>의 시간 안에서 희미해진 인과 개념이 끌어들이는 더 큰 주제는 바로 자유의 문제다. 세계가 선형적 시간의 논리에 따라, 인과에 따라 움직이기만 한다면 병수에게 선택의 자유는 없다. 그러나 병수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복수의 시간 계열 앞에서 병수는 차에서 내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다음엔?
병수는 지금 어떤 시간에 속해 있는 걸까. 여전히 지영(조윤희)과 드라이브를 하려고 그녀를 기다리는 중인 걸까, 정수와 해옥이 기다리고 있는 지하로 막 돌아가려는 순간일까. (그런데 정수와 해옥이 병수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은 그때 그 시간과 동일한 시간은 맞을까?) 어쩌면 이들 모두를 벗어난 제3의 시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병수 앞에 놓인 것은 비결정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병수는 자유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정수(와 함께 했던 시간)의 귀환이 병수가 ‘선택한 결과’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선형적 시간관을 인정해야 한다. 관습적 시간 인식 밖에서 반짝이듯 출몰한 자유의 시간 다음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놓여 있는 것이다. <탑>의 마지막 장면에서 병수는 여전히 겁이 많은 영화감독이다. 그러나 그는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세속의 도덕으로는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자유와 선택에 대한 홍상수의 윤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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