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MOVIE
-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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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평행선을 달리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모성애라곤 없는 엄마, 화나면 딸을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 엄마,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수경(양말복)은 그런 엄마다. 수경은 마트에서 홀로 화가 났는데, 그녀의 딸인 이정(임지호)이 씩씩거린다는 이유로 차 안에서 이정을 마구 때린다. 그리고 이정이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가자 그대로 이정을 들이받는다. 수경은 급발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정도, 두 여자를 바라보는 우리도 수경의 의도가 없지 않았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수경이 정말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정을 들이받았든,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그랬든 말이다.
그런 수경을 보고 있으면 모성애는 타고나는 것도 아니고, 아무에게나 학습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자기 삶을 희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자신에게 올 보상이지 않았을까? 가성비 따지는 삶 지겹다고 수경이 입버릇처럼 말하듯이 이제는 좀 억척스럽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금전적 보상일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다 큰 딸과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좋은 관계, 허무하기만 한 인생 속에서 그래도 잘 살아왔다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마음들도 보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꿀 수 없는 이정을 두고, 수경은 ‘나도 이제 하고 싶은 대로 살래’라고 말하고, 사랑받는 결혼을 꿈꾸고, 좋은 집을 꿈꾸고, 유튜브를 보면서 리코더를 배운다.
보통의 어머니들은 처음에는 보상을 바라고 시작하더라도, 주면 줄수록 더 커지는 사랑이 그 바람을 점차 잊어버리는 과정을 겪을 것이다. 어느새 자식은 그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선물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애를 추적해보면 아마도 그런 식의 발생 과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경이라는 우리 사회에서는 독특한 엄마는 그 바람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수경에게 이정은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쓸모없는, 철 안 드는, 버거운 딸이다. 자기에게 보상을 주기는커녕, 사과를 바라고, 사랑을 바라고, 짜증도 받아주지 않으면서 피 말리는, 욕심이 너무 많은 딸이다. 다른 아이들도 다 엄마에게 욕을 듣고 맞으면서 살지만 결국 엄마와 잘만 지내는데, 수경의 집이 지옥이 되어버린 건 다 유난이고 비정상인 이정 때문이다. 이십 대 후반에도 여전히 집에 붙어있으면서 이 모든 것이 엄마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런데 정말로 이정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수경이 절대 변하지 않는데도 이정은 갑자기 철이 든 것처럼 수경을 대할 수 있을까? 수경이 딸에게 원하는 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서로 보듬어주는 친구 같은 관계지만, 어머니와 딸은 결코 대등한 관계일 수 없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의존적이었고, 혼자서는 독립적인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등하지 않은 그 관계에 있어서는 무수한 세월 동안 유대를 쌓아오지 않는다면 수경이 자기 고객들에게서 발견하는 ‘대등해 보이는 관계’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속옷 외에도 집, 차, 소파, 음식 등 많은 것들을 공유하지만 마음을 나눌 수는 없다. 그리고 어머니와 단 한 번도 그런 관계를 만들어보지 못한 이정은 그 어떤 관계에서도 유대를 쌓을 수 없다. 모든 관계는 엄마와의 관계처럼 파국일 뿐이다. 이정은 엄마처럼 의존할 수 있는 존재를 찾지만, 누구도 엄마처럼 온전히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두 여자의 서로 피를 말리는 이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해방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무한히 반복될 것이다. 두 사람의 평행선은 함께 사는 그 집에서는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수경은 딸로부터의 탈출구를 찾고, 계속해서 수경에게도 돌아오던 이정도 종국에는 탈출구 문을 연다. 탈출구가 되어줄 수 있다고 믿었던 무수한 수경의 남자들도 소용없었고, 열심히 일해서 모은 이정의 통장도 소용없었는데, 이 무한히 반복될 것 같은 절망 속에서 어떻게 해방은 가능했을까? 어쩌면 해방을 위해 두 여자에게 필요한 건 다른 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의 확인이었을지 모른다. 두 여자는 결코 하나의 점에서 만날 수 없다는 그 확인 말이다. 정전된 집에서 ‘엄마, 나 사랑해?’ 묻는 이정의 말에 수경은 웃어 보인다. 수경의 웃음은 비웃음인지 헛웃음인지 알 수 없고, 그래서 긍정인지 부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도저히 알 수 없는 웃음처럼 더 이상 서로의 진심을 알아내 보려는 지난한 노력이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이정은 수경을 놓아준다. 수경이 이정을 의도적으로 차로 치었든 정말로 급발진으로 인한 사고였든 이제는 상관없게 될 때, 이정은 수경을 자신으로부터 해방한다.
이정으로부터 해방된 수경은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자유를 찾을까? 또 다른 가정에서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야 하는 것이 지긋지긋해 종열(양흥주)과 헤어지는 그녀가? 수경으로부터 해방된 이정은 드디어 홀로 설 수 있을까? 엄마의 대체품을 찾아다니느라 소희(정보람)에게도 버림받은 그녀가?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그 과정이 해방으로 가는 과정만큼 지난하고 어려우리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해내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해방은 시작일 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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