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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션들>의 아방가르드 영화적 요소 즐기기!202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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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의 아방가르드 영화적 요소 즐기기!
송영애(한국영화평론가협회)
지난 11월 24일 개봉한 장세경 감독의 <픽션들>의 홍보 문구 중 흥미로운 단어를 발견했다. 바로 ‘아방가르드’라는 단어였다. 개봉 예정인 장편 극영화가 스스로 ‘아방가르드’라 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술적인 영화라는 의미로 통할 수도 있으나, 어려운 영화라는 의미로도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일반 상업영화 관객에게는 진입 장벽이 되는 용어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차별화를 강조하는 용어로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오늘은 아방가르드 영화의 의미도 좀 살펴보고, <픽션들>의 아방가르드 영화적 요소도 찾아보려 한다. <픽션들>을 더 즐길 수 있는 팁 소개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아방가르드 영화, 전위 영화, 실험 영화, 그리고 <픽션들>
프랑스어인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전위(前衛)’ 즉 ‘앞쪽에 위치함’을 의미한다. 원래 군사용어로서 본 부대보다 앞서서 전방 상황을 파악하는 전위 부대를 칭하는 용어였지만, 점차 사용되는 분야가 확대되었다. 예술 분야에서는 소위 ‘앞서 나간 예술’ 즉 ‘기존 주류 예술보다 실험적이고 전복적인 예술 작품이나 활동’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된다.
20세기 초반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 음악,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방가르드 움직임이 활발했다. 예를 들어, ‘왜 꼭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하는가?’ ‘왜 화음을 맞춰야 하는가?’ 등의 미술, 음악 분야의 아방가르드적 반발은 오랜 기간 서양 예술계를 지배하던 관행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1910년대 후반 당시는 영화가 탄생한 지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영화는 이제 막 관행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 움직임이 나타났다. 영화는 탄생 당시 1분이 채 되지 않는 길이었고, 일상 기록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느새 2시간 안팎으로 길어졌고, 허구의 스토리를 담아내고 있었다.
좀 더 효과적으로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한 기법도 다듬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에 감정 이입하기 좋도록 클로즈업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다양한 카메라 움직임도 시도되었다. 편집 역시 나름의 원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은 무성영화이던 당시, 디테일한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장면과 인물의 대사를 알려주는 간(間) 자막도 활용되기 시작했다.
아방가르드 영화는 바로 그 부분을 전복시켰다. 아방가르드 영화인의 입장에서 영화가 시각성과 움직임인데, 마치 소설이나 연극처럼 장면화된 허구의 스토리를 담아내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어찌 보면, 영화 본질에 대한 성찰이기도 했다. 누구도 영화를 예술로 인식하지 못할 때, 영화를 창의력이 필요한 시각예술 물로 인식했고, 스토리 전달 대신 영화 고유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방향을 전환했다. ‘왜 스토리를 담아야 하는가?’ ‘왜 자막을 통해 설명하려 하는가?’ ‘왜 기승전결 식의 인과성을 추구하는가?’ 등등의 고민이 수반됐다.
구체적인 표현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초현실주의 영화, 입체파 영화, 다다이즘 영화, 추상영화 등으로도 칭해지는 아방가르드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리듬감, 조형미, 방향감, 질감, 새로운 구도 등이 시도되었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상징적인 메시지 등이 담겼다.
극영화도 아니고, 기록영화도 아닌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다만 시기에 따라 작가에 따라 실험의 방향과 방식, 의도는 천차만별이어서, 정해진 틀이 있는 건 아니다.
<픽션들>의 아방가르드 영화적 요소는 장편 극영화라는 장르 안에서 관객을 낯설게 하는 방식으로 느슨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조금은 덜 어렵고도 할 수 있다. 영화 관람과 관련해 몇 가지 습관만 잠시 잊는다면 말이다.
인과성이나 논리성은 잊어라!
<픽션들>의 스토리는 에피소드 간의 연결 고리가 약하다. 소위 말하는 복선도 작용하지 않는다. 이전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거나, 이후의 내용을 예상해보는 습관은 오히려 방해될 수도 있다. 어차피 기억과 예상은 스토리 퍼즐 맞추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인공 4명도 마찬가지다. 윤수(김권후), 은경(이태경), 치원(박종환), 주희(구자은)의 관계를 명확히 이해하려 너무 애쓸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몇몇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윤수가 쓰고 있는 소설 속 이야기나 인물일 거로 생각했던 장면이나 인물이, 어느 순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깔끔한 퍼즐 맞추기는 애초에 불가하다. 유기적, 논리적 연결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사실 현실에서도 사람들의 대화를 몇 번 들었다고, 그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냥 나름 상상하는 정도로 만족하면 된다. 일상에서 무수히 지나치는 많은 사람을 잠시 엿보는 기분으로 4명의 인물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느끼게 해준다.
‘사람들의 불안’에 대한 영화라는 소개가 많이 되고 있는데, 미리 접한 영화에 대한 정보도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아무래도 미리 들은 키워드 위주로 영화를 보게 되어, 오히려 시야를 더 좁게 할 수 있다. 결국 제목 그대로, 모두 영화 속 픽션 즉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자막과 대사도 흘려 읽고, 들어라!
보통 자막과 대사는 영화의 이해를 돕는다. 유성영화가 대세가 된 현재도 자막은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초기 아방가르드 영화 중 일부 초현실주의 영화는 시각예술 물인 영화를 보면서, 문자에 의존하는 무성영화 식 영화 소통 방식을 비판했다. 연결되는 커트와 커트 사이에 ‘옛날 옛적에’ 식의 자막을 넣어,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려, 자막에 의존하는 관객을 각성시키려 했다.
<픽션들>에는 1, 2, 3 등의 숫자 자막이 중간중간 등장한다. 처음에는 에피소드를 구분하는 숫자로 인식하게 된다. 옴니버스 영화로 느껴지기도 하고, 각각의 구분이 명확하다고 짐작하게 되지만, 점차 구분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시간 순서대로도 아니고, 점차 그 경계도 무너진다.
대사도 그렇다. 인물들은 모두 달변가다. 연극 무대 위 주인공 같은 비일상적인 말을 하기도 하고, 글로 인용하기에 근사한 말도 자주 한다. 다만, ‘그래서 뭐?’라는 생각도 계속 들게 한다. 너무 거창해서 진정성이 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대로 너무 일상적이어서 공감이 가기도 한다. 비현실성과 현실성이 뒤섞여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는 않게 된다.
긴 호흡의 옆모습에 익숙해지자!
마지막으로 카메라의 위치에도 좀 적응할 필요가 있다. 영화 후반에 가서는 좀 달라지지만, 영화 내내 각 커트의 길이가 꽤 길다. 리듬감 있는 빠른 편집이나 음악 등과는 거리가 멀다.
수려하게 이야기하는 인물들의 옆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다. 적당히 멀리서 편집 없이 길게 보여주다 보니, 그들의 미세한 표정을 느끼기는 힘들다. 그러나 긴 커트는 그만큼 관객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덜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 자유를 좀 누리는 걸 추천한다. 잠시 한눈을 팔고 싶어진다면,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된다. 화면 안 곳곳을 보든, 화면 밖 곳곳을 보든 크게 문제 되진 않는다.
결국 익숙함을 잠시 내려두는 것이 필요하다. ‘원래 이래야만 한다.’라는 생각만 내려둔다면,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은 색다르게 영화를 즐길 수 있다. <픽션들>의 여러 픽션을 그렇게 즐겨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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