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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체리향기2023-01-26
체리향기

19981, 중등교사 임용시험에 두 번째 낙방한 나는 두문불출 방구석에서 질질 짜고 있었다. 네다섯 시간만 자고 기본적인 생리현상만 해결하며 종일 책상 앞에 붙어있었던 지난 한 해가 너무 억울했다. 지필고사에 합격하고 2차 면접에서 탈락했기에 그 아쉬움과 충격은 더 컸다. 태어나서 가장 치열하게 산 1년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삼수를 한들 무얼 더 할 수 있을지암담했고, 참담했다. 실패의 연속인 현실과 모든 게 불확실한 미래가 너무 두려워서 그냥 삶 자체를 포기하고 싶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다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당시만 해도 동숭동 대학로에는 최신 개봉작을 무료로 보여주는 예술전용 극장이 있었다. 상영작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낯설고 긴 이름의 감독이 그저 아랍 출신이려니 했다. 걸리는 대로 보겠다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섰는데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체리향기? 좋아! 달달한 영화를 한번 봐줘야 할 타이밍이야!’ 길지도 짧지도 않은 러닝타임을 확인하고 듬성듬성한 극장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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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너무 힘들었다. 알라신을 믿을 것 같은 남자가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에서 계속 차를 몰며 자신을 땅에 묻어줄 사람, 자신의 자살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는 장면만 백만 년쯤 계속되었다. 졸다가 눈을 뜨면 여전히 운전 중이고, 너무 잤다 싶어 화들짝 화면을 봐도 그는 저를 묻어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이러고 있었다. 더이상 잠도 오지 않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고 보게 된 영화 후반부에 드디어 남자는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 박물관에서 새의 박제를 만드는 일을 하는 노인은 어떤 만류나 설득 없이 남자에게 그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며 작지만 소중한 삶의 기쁨을 하나씩 풀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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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노인은 아내와의 불화로 자살을 시도했다. 깜깜한 새벽, 밧줄을 가지고 집을 나선 노인이 한참을 걷다가 적당한 나무를 발견한다. 목을 매려고 나무에 줄을 묶는 순간, 손에 닿은 체리를 발견하고 하나를 입에 넣는다. 달콤하게 입안에 퍼지는 잘 익은 체리의 맛. 두 개 세 개체리를 먹는 동안 장엄한 태양이 떠오르고, 마침 학교에 가던 남루한 아이들 몇 명이 그에게 체리를 따달라고 부탁한다. 노인은 자신이 목을 매려고 했던 나무를 흔들어 아이들에게 체리를 따주고 자신의 주머니에도 양껏 체리를 따 넣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의 죽음 대신 체리를 선물한다. 만약 나무가 체리 나무가 아니었다면, 마침 잘 익은 체리를 달고 있지 않았다면, 학교에 가던 아이들에게 그 아침은 달콤한 체리 맛 대신 나무에 목을 맨 사람을 목격한 끔찍한 날로 기억되었을 것이며, 노인과 함께 부인의 삶도 그날 멈추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체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달콤한 열매가 입에 들어오듯이 절망했던 온몸이 확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그때 알았다. 체리 열매 하나로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며, 내 곁에 있는 사람과 그것을 나눌 줄 아는 인생이야말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물리적인 외부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나의 생각과 마음가짐은 내가 바꿀 수 있으며, 그것이 자살 나무를 체리 나무로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 인생의 고난은 그것이 주는 기쁨에 비하면 별것 아닐 수 있구나. 우연과 필연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체리향기>는 절망에서 허우적대던 나를 건져 올린 필연적 체리 향기가 되었다.


자살을 원했던 주인공 바디가 수면제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다음 날 아침 노인이 구덩이에서 잠자는 바디를 깨웠는지, 죽은 바디의 육신 위로 흙을 덮어주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바디가 수면제를 먹지도, 구덩이에 묻히지도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비로소 그는 세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자신이 판 구덩이에서 스스로 일어나 노인을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며칠 뒤, 나도 바디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구덩이 속을 걸어 나왔다. <체리향기>의 힘으로 결국엔 지나갈’ 1년을 다시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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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3, 나는 늦깎이 교사로 부산의 모 고등학교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몇 년의 뒤처짐과 힘듦은 인생의 전 과정에서 역시 별것 아니었다. 지나고 보니 그것들은 하나하나 새로운 깨달음을 준 보배이기도 했다. 나는 실패와 좌절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교직 생활 내내 아이들과 나누려 노력했다. 지금 이 고통스러운 상황도 관점을 바꾸면 향기로운 체리가 될 수 있음을. 이른 아침 아이들에게 체리를 선물하고, 자신과 아내를 구하고, 결국 낯모르는 행인의 인생까지 바꾼 그 노인처럼 열심히 알려주고 싶었다.

덧붙임 1: ‘영화란 모름지기 재미있어야 한다라는 좁은 생각을 깨쳐준 것도 <체리향기>이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영화가 있고, 오락에 국한되지 않는 무한한 역할과 힘을 가진 작품들이 많다는 사실을, 이 작품을 통해 발견하게된 것이다. 이후 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열혈지지자로, 지루하고 힘든 영화도 기꺼이 찾아보는 관객이 되었다. 임용을 한 해 더 준비한 덕에 부산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20여 년 동안 BIFF와 희노애락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가족, 친구, 동료 교사는 물론, 학생들과도 ‘BIFF 영화 함께 보기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덧붙임 2: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작품은 물론, 그 제자들의 작품까지 챙겨보는 광팬이 된 것도 고백하고 싶다.당신의 <체리향기>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라는 감사의 인사를, 이제 고인이 된 감독님께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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