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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 타르> 혹은 ‘ART’ 혹은 ‘RAT’
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화 <TAR
그런데 리디아 타르는 이러한 불가능에 가까운 이력들과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을 그러한 정체성들로 묶어두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여성이기 이전에, 레즈비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이고자 한다. 그녀가 자기 학생에게 말하는 것처럼 바흐가 아이를 스무 명 낳은 ‘백인 남자 시스젠더 작곡가’이기 이전에 위대한 작곡가이듯이 말이다. 그래서 리디아 타르는 이러한 이유들로 바흐를 연주하지 않겠다는 학생에게 매몰차게 말한다. 만일 바흐의 천재성이 그의 젠더나 출생 국가, 종교, 섹슈얼리티 등등으로 축소될 수 있다면, 너의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유색인종이며 팬젠더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학생에게 말이다. 리디아 타르에게 지휘자는 대중과 신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워야 하는 자이다.
타르는 분명 여성 지휘자로서 많은 어려움과 편견들을 겪으며 지금의 지위에 올랐을 것이며, 자신의 배우자인 샤론(니나 호스)과의 관계 역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무수한 고통을 받았을 것인데, 왜 그녀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다지 가혹한가? 그런데 이는 단순히 리디아 타르를 비난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색인종이며 팬젠더인’ 그 학생은 왜 줄리아드 음대에서 하필 타르의 강의를 선택했을까? 그녀가 훌륭한 지휘자여서일까? 아니면 여성이면서 레즈비언이어서일까? 이렇게 물으면 타르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만 평가받고자 해왔던 그간의 투쟁들을 무시한 채, 그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로봇’처럼 음악가를 정체성을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학생의 평가는 그녀에게 큰 모욕이 된다. 그래서 심지어 떠나는 학생의 뒤에 대고 타르는 ‘너의 영혼의 설계자는 소셜 미디어인 것 같군’이라고 소리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리디아 타르의 지지자가 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리디아 타르는 자신의 음악으로만 평가받고자 하는 바로 그 기준에 부합하게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젊은 여성들에게 일종의 성 착취를 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 능력만으로 판단 받고자 했던 그녀의 그간의 싸움이 동전의 앞면이었다면, 그 동전의 뒷면은 다른 모든 것들은 그래도 괜찮은 것으로 여기게 했던 것이다. 타르가 작곡가의 정체성으로부터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음악의 순수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사실 추악함이었다. 그녀가 늘 고통 받는 미세한 소음들처럼 말이다. 영화
그리고 타르는 바로 그런 존재이다. 그녀의 앞면은 순수한 음악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고 뒷면은 소음이다. 우리는 이미 그녀의 이름에서 두 양면을 본다. 타르(TAR)는 그녀가 사랑한 예술(ART)이기도 하면서, 쥐(RAT)처럼 교묘한 악인 것이다. 타르와 같은 인물은 사실 우리에게 새로운 인물은 아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제임스 레바인은 10대 남성 다수를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이어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해고되었고, 샤를 뒤투아 역시 여성 성악가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플라시도 도밍고, 윌리엄 프레우실, 다니엘레 가티 등 꿈을 꾸는 젊은 음악가들에 대한 성 착취는 만연했다. 리디아 타르처럼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음악 세계 아래 진부한 욕망의 세계를 짓고 있었다. 리디아 타르는 전임 지휘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은연중에 의문을 표한다. 성추문과 같은 일들이 카라얀과 같이 나치에 동조하는 일에 견줄 수 있을 만큼(영화에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언급한다) 정말로 악한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리디아 타르를 결코 지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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