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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R 타르> 혹은 'ART' 혹은 'RAT'202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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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영화 <TAR
/tár>/tár> tár="">/>타르>는 지휘자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의 실제로 가능한지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커리어들을 시작부터 쉴 새 없이 열거한다. 그녀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을 거쳐 여성으로서는 처음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에미, 그래미, 오스카, 토니 시상식에서 모두 수상한 EGOT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지휘자이자 작곡자가 있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지만, 실제로 우리의 현실 세계에는 아직 없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베를린 필하모닉에 여성 상임지휘자가 취임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리디아 타르에게는 ‘마에스트로’로서의 주요 경력 외에도, 페루 우카얄리에 5년간 머물며 시피보-코니보 원주민들의 토착 음악을 연구한 경력도 있으며, 요르단 자타리 난민 캠프에서 콘서트를 열었던 이력도 있다. 최고의 커리어 측면에서든 다양성 측면에서든 어떻게 보아도 리디아 타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이력을 가진 음악가이다. 그런데 리디아 타르는 이러한 불가능에 가까운 이력들과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을 그러한 정체성들로 묶어두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여성이기 이전에, 레즈비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이고자 한다. 그녀가 자기 학생에게 말하는 것처럼 바흐가 아이를 스무 명 낳은 ‘백인 남자 시스젠더 작곡가’이기 이전에 위대한 작곡가이듯이 말이다. 그래서 리디아 타르는 이러한 이유들로 바흐를 연주하지 않겠다는 학생에게 매몰차게 말한다. 만일 바흐의 천재성이 그의 젠더나 출생 국가, 종교, 섹슈얼리티 등등으로 축소될 수 있다면, 너의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유색인종이며 팬젠더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학생에게 말이다. 리디아 타르에게 지휘자는 대중과 신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워야 하는 자이다.
타르는 분명 여성 지휘자로서 많은 어려움과 편견들을 겪으며 지금의 지위에 올랐을 것이며, 자신의 배우자인 샤론(니나 호스)과의 관계 역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무수한 고통을 받았을 것인데, 왜 그녀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다지 가혹한가? 그런데 이는 단순히 리디아 타르를 비난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유색인종이며 팬젠더인’ 그 학생은 왜 줄리아드 음대에서 하필 타르의 강의를 선택했을까? 그녀가 훌륭한 지휘자여서일까? 아니면 여성이면서 레즈비언이어서일까? 이렇게 물으면 타르가 오로지 자기 능력으로만 평가받고자 해왔던 그간의 투쟁들을 무시한 채, 그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로봇’처럼 음악가를 정체성을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학생의 평가는 그녀에게 큰 모욕이 된다. 그래서 심지어 떠나는 학생의 뒤에 대고 타르는 ‘너의 영혼의 설계자는 소셜 미디어인 것 같군’이라고 소리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리디아 타르의 지지자가 될 수 있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리디아 타르는 자신의 음악으로만 평가받고자 하는 바로 그 기준에 부합하게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젊은 여성들에게 일종의 성 착취를 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 능력만으로 판단 받고자 했던 그녀의 그간의 싸움이 동전의 앞면이었다면, 그 동전의 뒷면은 다른 모든 것들은 그래도 괜찮은 것으로 여기게 했던 것이다. 타르가 작곡가의 정체성으로부터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음악의 순수성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사실 추악함이었다. 그녀가 늘 고통 받는 미세한 소음들처럼 말이다. 영화
/tár>/tár> tár="">/>타르>는 그녀가 늘 시달리는 소음들이 그녀에게 계속 침범하게 함으로써 그녀가 꿈꾸는 음악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정말 가능한지 묻는다. 영화 중반부에 이르면 옆집에서 들려오는 소음의 정체가 움직일 수 없는 노인이 자기 딸을 부르기 위해 누르는 벨 소리였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옆집 노인이 죽고 나서 소음이 들리지 않게 되자, 그녀는 옆집 가족의 방문을 받는다. 집을 팔아야 하는데, 연주 시간을 피해서 구매자를 방문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리디아 타르의 연주가 이제는 소음이다. 음악과 소음은 그렇게 한 번에 뒤집혀 버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고 타르는 바로 그런 존재이다. 그녀의 앞면은 순수한 음악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고 뒷면은 소음이다. 우리는 이미 그녀의 이름에서 두 양면을 본다. 타르(TAR)는 그녀가 사랑한 예술(ART)이기도 하면서, 쥐(RAT)처럼 교묘한 악인 것이다. 타르와 같은 인물은 사실 우리에게 새로운 인물은 아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제임스 레바인은 10대 남성 다수를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이어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해고되었고, 샤를 뒤투아 역시 여성 성악가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플라시도 도밍고, 윌리엄 프레우실, 다니엘레 가티 등 꿈을 꾸는 젊은 음악가들에 대한 성 착취는 만연했다. 리디아 타르처럼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음악 세계 아래 진부한 욕망의 세계를 짓고 있었다. 리디아 타르는 전임 지휘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은연중에 의문을 표한다. 성추문과 같은 일들이 카라얀과 같이 나치에 동조하는 일에 견줄 수 있을 만큼(영화에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언급한다) 정말로 악한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리디아 타르를 결코 지지할 수 없다.
영화 <
/tár>/tár> tár="">/>타르>가 드러내는 리디아 타르에 대한 태도는 아주 흥미롭다. 그녀의 음악 세계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끌어올려 놓고, 그래서 우리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그녀의 재능을 펼쳐 놓고, 별 수 없이 용서를 할 셈인지 또는 그래도 그녀를 용서할 수 없는지 묻는다. 영화가 비추는 리디아 타르의 결말은 정말로 그녀가 지키고 싶어 했었을 것인 음악만을 그녀에게 남겨두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영화는 타르를 혹은 적어도 타르의 앞면인 음악만큼은 옹호하고 있는 것인가? 집으로 돌아간 타르가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번스타인의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눈물을 보일 때, 영화는 그 모든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음악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고 말하고 있는가? 영화는 리디아 타르에게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음악만큼은 빼앗지 않고,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을 떠올리며 구토하는 장면도 넣음으로써, 마치 그녀를 용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의 크레딧과 함께 영화의 태도는 사실 처음부터 아주 명확했다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다. /tár>/tár> tár="">/>타르>는 늘 엔딩 크레딧 마지막에 오르던 수많은 스태프들을 영화의 가장 처음에 오게 하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케이트 블란쳇’의 이름을 띄우기 때문이다. 영화는 주연과 감독만의 예술인가? 오케스트라는 지휘자만의 예술인가? 우리는 /tár>/tár> tár="">/>타르>에서 완벽한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를 보지만,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그녀가 이 영화의 전부라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역시 다르지 않다. /tár>/tár> tár="">/>타르>는 이렇게 예술계의 수많은 독재자들이 앞에 내세우는 예술의 순수성의 이면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리디아 타르에 대한 /tár>/tár> tár="">/>타르>의 태도는 명확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술이면서, 쥐이다. 우리는 이 예술-쥐에게서 앞엣것만을 취할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우리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더라도 말이다. - 다음글 <다음 소희> - 사방의 벽으로 갇힌 소희에게 보내는 한 줄기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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