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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나의 우주, 엄마에게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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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는 빚이 많아. 전생에 엄마한테 빚을 많이 져서 이생에 딸로 태어났어. 그 빚 갚으려고. 엄마한테 잘 해야겠네.” 사주쟁이의 말에 내 눈은 가늘어졌다. 그러면서 안심했다. 전생에 진 빚이 많아서 엄마 딸로 태어났다는데, 이번 생에 쌓은 빚도 엄청날테니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 에도 엄마는 꼼짝없이 우리 엄마로 태어나게 생겼다. 엄마는 내가 착한 딸이라고 은근슬쩍 자랑했지만 내 속셈을 전혀 모르니까 그러는거였다. 나는 엄마의 돌고 도는 인생을 통째로 저당잡는 중이라고! 내 사악한 음모 는 다중우주를 넘나들며 전 우주를 혼란에 빠트린 악당 조부 투바키 정도나 되야 이해할 수 있다. 조부 투바키를 알기 위해선, 그의 창조주이자 숙적인 엄마 에블린 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야 한다. 에블린은 물건이 꽉꽉 들어찬 주방 식탁에 앉아 사람 하나쯤 가뿐히 파묻어버릴 양의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다. 국세청에 제때 소명하지 못한다면 전재산이 몰수당 할 판인데도 가족들은 끊임없이 에블린을 방해한다. 에블린은 남편의 이혼 요구서를 받아들고 딸의 여자친구 인정요구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의 눈치를 본다. 에블린은 모두에게 대답하지만 누구도 에블린에게서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는 못 한다. 에블린은 이혼 요구서를 아직 읽지 못했고, 딸의 여자친구가 못마땅해 밥주기를 아까워 한다. 딸을 외면했던 아버지이지만 대꾸조차 못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온 사방에 대화가 넘쳐나지만 소통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제각각의 언어와 용건으로 떠드는데,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에블린, 지금 내 말 듣고 있어요?”이다. 에블린은 반쯤은 들었고 반쯤은 듣지 않았으며, 사실 전혀 못 알아듣고 있다. 에블린은 지나치게 바쁘고 누구보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확실하게 잘 하진 못 한다. 심지어 에블린은 그 와중에 세탁소 손님들의 세탁물을 찾아주고 파티 초대를 하며 국세청 직원의 지적에 변명하고, 참고로 다중우주도 넘나들고 있는 중이다. 에블린에게 필요한 것은 조용한 방이다. 영수증을 처리해 세탁소를 운영하고, 가족들의 요구사항을 이해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곳. 조부 투바키와 차분히 앉아서 베이글과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그런 장소. 그러나 에블린이 다중우주를 넘나든다 한들 어떤 에블린에게도 그만의 방은 없다. 에블린은 온갖 장소에서 바쁘다. 그중에 서도 압도적으로 바쁜 에블린은, 오로지 실패 외길인생만 꿋꿋이 걸어온 ‘엄마 에블린’이다. 엄마 에블린은 특별하다.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에블린 중 가장 많이 실패했고 어 떠한 특출난 능력도 없다. 에블린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그 결과 에 따라 우주가 하나씩 늘어났다고 할 때, 엄마 에블린은 모든 결정에 실패한 에블린이다.
엄마가 되지 않은, 즉 성공적인 결정을 내린 에블린은 무림 고수를 거쳐 배우가 되었고, 요리사가 되었으며 인류를 구원하는 과학자가 되기도 했다. 엄마 에블린은 억울하다.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결과가 실패다. 나 빼고는 모두가 성공했단다. 그런데도 잘난 에블린들이 어쩌지 못한 희대의 악당을 처치해야 한다. 모든 것에 실패했다면 모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못할 설명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면서. 게다가 다중우주의 모든 가능성을 마음껏 끌어다 쓰는 조부 투바키는 사랑하는 딸 조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사실, 그 조이다. 조부 투바키는 우주를 넘나들며 엄마 에블린을 찾았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파괴를 일삼으며 종을 멸절시켰지만, 그건 어쩌다 일어난 사고일 뿐이다. 그러니 나와 같은 것을 보고 소통할 수 있는 당신이 진작 나타났어야지. 조부 투바키는 갓 사람 에게서 뿜어져 나온 따끈따끈한 피를 뒤집어 쓰고 뻔뻔하게 말한다. 그꼴을 보면서 조부 투바키가 비속어를 썼다고 잔소리하는 에블린은 엄마답다. 조부 투바키는 온 우주를 하나로 연결했다. 그렇게까지해서 소통할 수 있는 에블린을 찾아다녔다. 결과적으로 실패다. 조부 투바키는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 없으니 베이글 너머로 완전히 소멸하자며 에블린을 유혹한다. 에블린은 사랑하는 딸의 결 정을 존중하려 한다. 에블린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그 순간, 엄마 에블린은 성질이 난다. 에블린은 모든 순간 실패해서 엄마 에블린이 되었다. 그래도 에블린은 꿋꿋했다. 사랑하는 조이, 다정함으로 에블린을 지켜온 남편 웨이먼드가 있었다. 그들은 에블린의 자부심이었다. 에블린은 조부 투바키를 막아 세운다. 아무리 엉망이어도 우리는 다시 대화 해야해. 적어도 내가 엄마고 네가 딸이면, 우리는 그래야해. 악당 조부 투바키가 연결한 우주는 그렇게 깨어진다. 각자 엉망진창인 채로, 그곳에서 다시 각자 시작할 수 있도록. 가장 실패한 에블린이 이렇게 해냈으니 너희도 해낼 수 있겠지, 에블린은 자기 자신을 믿는다. 그렇게 에블린은 가족들과 솔직한 소통을 시작한다. 그제서야 국세청 직원에게도 솔직하게 대답한다. 당신 말, 못 들었어요. 지금부터라도 잘 들을게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등장인물들 간의 소통이 시작되는 순간, 끝 난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다정하게 듣고, 이해하고, 대답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려고 수천개의 우주를 넘나들었고 과학기술을 동원하며 날아다녔다. 에블린의 방은 여전히 없다. 에블린은 주방 식탁에서 쉴 새 없이 바쁘고 모두에게 대답하느라 피곤하다. 그래도 조부 투바키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다. 조이는 에블린의 바람과 달리 엄마를 꼭 닮아 엉망진창이다. 투사인 에블린에게 다정함을 전해 준 웨이먼드 같은 벡키를 찾았다. 에블린과 조이는, 엄마와 딸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다. 빚쟁이 딸인 나의 음모는 진행중이다. 엄마를 위한다면 나는 이번생에 빚을 다 갚아야 한다. 다음생부터는 엄마가 자신만의 방에서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그런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남기고 싶은건 나의 욕심이다. 조부 투바키의 실패한 음모 를 보며 나는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빚은 일단 다 갚자. 다음 생엔 빚쟁이랑 수금 원 말고,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친구가 될 수 있게. 어쩌면 지금부터 가능할 계획 일지도 모른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는 내내 엄마가 보고 싶었다. 다음번엔 엄마랑 같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와 보기엔 다소 복잡한 영화일지도 모 르겠다. 엄마는 에블린보다 질문이 많고, 나는 영화 내내 엄마에게 설명해야 할테고, 나와서는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타박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을 나서며 엄마는 덧붙일거다. “딸아, 그래서 이제 우리 어디 갈래.” 내 차례다. 엄마, 우리 수다를 떨어요. 싸워도 좋으니까 서로를 포기하지 말아요. 그렇게 지금, 우리가 함께인 우주를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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