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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여섯 개의 밤>의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야기202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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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섯 개의 밤>의 뻔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야기
송영애(한국영화평론가협회)
지난해 7월에 개봉했던 윤서진 감독의 <초록밤>에 이어, 또 한 편의 ‘밤’ 영화가 개봉했다. 이번엔 최창환 감독의 <여섯 개의 밤>이다.
<여섯 개의 밤>에는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가, 엔진 고장으로 부산에 불시착한 여섯 사람이 등장한다. 최창환 감독의 이전 영화에서처럼 여러 세대의 인물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각자 나름의 사정과 사연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뻔하게 진행되는 건 아니다. 관객은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지점에 관해 야기하고 싶다. 뻔할 뻔한 여섯 사람의 밤을 뻔하지 않게 한 영화적 방식에 관한 이야기라 하겠다.
여섯 사람, 세 커플의 뻔하지만 공감되는 이야기
<여섯 개의 밤>에서는 특이하면서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당연히 극적인 해결도 제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미스터리 한 일이 벌어지고, 생존을 위해 해결 방법을 찾는 과정에 여섯 사람 중 몇은 영웅이 되고, 몇은 악당이 되는 식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비행기, 불시착 등의 키워드가 떠올린 스펙터클은 편견일 뿐이었다.
부산 김해공항에 불시착해 비행기에서 대기 중이던 그들은 다른 승객과 함께 해운대의 한 호텔로 이동한다. 그리고 동행인과 함께 혹은 혼자 호텔 방에 짐을 푼다. 이후 둘씩 짝을 이룬 세 커플이 하룻밤 동안 겪는 이야기는 느슨한 옴니버스 영화처럼 각각 펼쳐진다. 혼자 비행기에 탔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는 젊은 커플의 이야기는 예비부부의 이야기를 거쳐, 미국으로 수술하러 가는 길인 엄마와 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세 커플 모두 꼬박 밤을 지새우는 건 아니고, 이야기하고, 먹고, 마시고, 수영하고, 산책하고, 싸우고 그런다. 불시착 자체가 큰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무인도에 고립된 것도 아니고, 하루 늦게 간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불시착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맞닥뜨려졌지만, 여섯 사람의 일상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호감을 보이며, 낯설기에 오히려 솔직해지는 커플, 서로를 참아왔던 커플, 서로가 필요한 만큼 불만도 많은 커플까지 사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관계들이다. 그들은 고립된 상황에서 오히려 솔직해지고, 그래서 용감해지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는데, 영화 안팎에서 자주 본 상황이다 보니, 새롭진 않지만, 꽤 공감하게 된다. 이런 걸 또 보아야 하나 싶다가, 이를 어쩌나 싶어진다. 하룻밤 안에 해결이 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서로 단절된 이야기 그리고 부산
흥미로운 점은 여섯 사람, 세 커플의 하룻밤 이야기가 철저하게 단절된 채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들 중 일부가 호텔 엘리베이터 안이나 편의점 앞에서 잠시 스치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여섯 사람, 세 커플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서로 알아가거나, 돕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한자리에 함께 하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우연히 같은 비행기에 탄 수백 명의 승객 중 일부일 뿐이고, 각자의 이야기가 일상처럼 각각 진행될 뿐이다. 각각 혼자서 혹은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갔듯이 호텔 방을 나선다. 우리가 같은 공간에 머문다고, 모두 알고 지내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그냥 스친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이야기가 부산에서 펼쳐진다는 점이다. 부산 자체가 훌륭한 여행지이지만, 영화에서 그 점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더욱 흥미롭다. 여섯 사람의 숙소가 해운대에 있는 호텔이지만, 시원스러운 바다, 화려한 야경 등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창문을 막고 있는 건너편 고층 건물 정도가 보인다.
호텔 야외 수영장에 가는 장면, 호텔 앞 바닷가를 산책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수영장에서 대화하고, 바닷가에서 대화하는 인물들만 보일 뿐, 시원스러운 수영장 전경이나 수평선, 야경 등은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밤 장면이고, 실내 장면인 데다, 인물 위주로 화면을 채워 넓은 공간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여섯 사람, 세 커플이 서로 단절된 것처럼, 이들은 불시착지 부산과도 단절된 것 같다. 오롯이 각각의 관계로만 고립된 ‘여섯 개의 밤’인 것이다.
- 나의 비밀스러운 목적지는 어디일까?
영화 시작부터 “모든 여행은 여행자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라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말이 등장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일상이 여행지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예상이나 계획은 여행지에서도 빗나가기 쉽다.
계획에 없던 곳을 방문할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리고 늘 함께해온 일행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여섯 개의 밤> 속 인물들도 계획에 없던 곳을 방문했고, 새로운 사람도 만났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내가 만약 누군가와 어딘가에 잠시 고립된다면 어떨까? 지나치게 예상치 못한 극한 상황을 겪고 싶진 않지만, 어딘가 여행이 가고 싶어지긴 한다. 나의 비밀스러운 목적지는 어디 혹은 누구일까?
뻔한 것 같지만, 뻔하기만 하지 않은 인물들의 상황을 지켜보며, 적당히 예상을 빗나가는 일들을 만나게 되는 여행을 상상하게 하는 영화 <여섯 개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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