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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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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리의 세계에서 윤리의 세계로 - 박찬욱 감독론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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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을 죽인 용의자로 의심받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형사 이야기쯤이야 흔하다. 형사인 해준(박해일)이 아름다운 과부인 서래(탕웨이)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 삶과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는 이야기. 이건 필름 누아르의 전형적인 장르적 플롯이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2022)의 결말엔 찝찝함이 남는다. 왜 서래는 해변가의 모래구덩이 안에서 꼿꼿이 자결했는가? 이 결말은 장르적이지 않다.
누아르에서 팜므파탈은 형사를 유혹하는 동시에 살인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서서히 던져 주지만, 그 조각을 맞추며 수수께끼를 풀던 형사는 결국 사건의 중심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그녀에게 마음을 준 형사는 그녀가 사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사건의 주도권을 가진 듯 보였던 팜므파탈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거나, 또는 남자로부터 처벌당해 남성중심의 내러티브로 편입되거나 추방당하게 된다.
하지만 서래는 굴복하지도, 처벌당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남성에 의해 내러티브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대신 끝까지 내러티브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목숨을 끊는 걸 선택했다.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남았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은 어떻게 이런 결말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걸까? 전형적인 필름 누아르로 시작해 중반부터 멜로드라마로 전환되어 결정적으로 장르를 틀어버리는 이 작품은 박찬욱의 작품 세계의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느와르 장르에 천착해 온 박찬욱 감독이 자신의 세계관 변화에 따라, 어떻게 장르를 혼종적으로 이용하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확립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공동경비구역JSA>(2000)와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세계는 ‘부조리의 세계’였다. 이 세계에서 완전한 악이나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의 부조리로 인해 서로를 증오하며 고통 받는 자들이 등장할 뿐이었다. <공동경비구역JSA>의 비극을 야기한 건 남북 분단이라는 상황이었으며, <복수는 나의 것>은 계급갈등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었다. <올드보이>의 경우는 좀 더 신화적인 차원으로 이동하는데, 근친상간이라는 원죄를 목격하고 그것을 소문으로 옮긴 자가 원죄를 저지른 자에 의해 과도하게 보복당하는 부조리를 그린다. 이 세계에서 박찬욱 영화의 인물들은 ‘정말로 악하거나 잘못한 자는 아무도 없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서로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쳤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벌하거나 상대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이런 ‘부조리의 세계관’은 첫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 <친절한 금자씨>(2005)부터 변곡점을 맞이한다. <친절한 금자씨>에는 박찬욱 영화사상 처음으로 ‘악당’이 등장한다. 요트를 사기 위해 아이를 납치하여 죽이는 백 선생(최민식)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고의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어린 시절 백 선생에게 이용당하고 딸과 떨어져야 했던 금자씨(이영애)의 복수는 정당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영화는 혹여나 선악의 경계가 흐려질까 백 선생의 악마성을 더 강화시킨다. 금자가 백 선생을 응징하려는 순간, 백 선생이 살해한 아이는 금자씨에게 죄를 덮어씌웠던 사건의 희생자인 원모(남송우)라는 아이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에게 복수를 할 자격이 있는 자는 금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금자의 아이는 죽지 않았으며 어찌보면 금자 또한 납치된 아이가 죽도록 방치한 동조범이다.
영화는 엄격한 윤리적 기준에 맞춰, 가장 복수할 자격이 있는 자-살해된 아이의 부모들-에게 먼저 복수의 권리를 넘겨준 뒤, 마지막으로 금자씨에게 기회를 준다. 이 복수의 과정은 아주 의례적으로 진행되어서 마치 집단이 치르는 희생제의처럼 보인다. 백 선생을 산에 묻고 나서 금자는 원모의 환영을 본다. 복수는 끝났지만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를 구원하는 것은 살아있는 딸이다. 딸과 함께 금자씨는 하얀 눈을 맞는다.
왜 박찬욱의 세계관은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 지점에서 변화했는가? 부조리한 세계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인물들 대신 왜 명백한 ‘악’이 등장하고, 그 악을 처벌하기 위해 윤리적으로 섬세하게 계산된 복잡한 절차가 동원되는가? 그 실마리는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 사이에 제작된 단편 <컷>(2004)에서 엿볼 수 있다.
3.
박찬욱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뱀파이어의 모티브가 드러난 건 옴니버스 <쓰리몬스터>에 수록된 단편 <컷>이었다. 이 작품에선 뱀파이어가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자로서 부르주아의 비유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나날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부르주아 남성 영화감독 류지호(이병헌)는 집에 돌아와 갑자기 괴한(임원희)의 습격을 받는다. 괴한의 정체는 류지호의 작품에 보조출연자로 몇 번 출연했던 무명배우였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던 무명배우에게 있어서 절망의 순간에 떠오른 것은, 자신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좋은 운을 누리며 성공한 영화감독인 류지호였다. 류지호가 무명배우에게 직접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지만 그는 구조 안에서 얻어 온 이득으로 인해 무명배우에게 처벌받는다. 전례 없이 박찬욱 감독의 자기반영의 색채가 강한 이 영화감독 캐릭터는 무명배우가 짜 놓은 고문구도 안에서 결국 자신의 위치성을 깨닫고 분열된다.
이전까지의 박찬욱 작품이 부조리한 세계 자체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면 <컷> 이후의 작품들은 사실 그 비극을 야기하는 구조 안에서 자신 또한 역할을 했음에 직면한 주체가 그걸 받아들이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멜로드라마이다. 잘못된 구조 안에서 지배계급으로서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타인의 피를 빠는 것과 같은 생명 착취 행위이며, 불평등한 사회에서의 원죄인 것이라는 통렬한 자각. <컷>의 류지호는 마지막에 결국 미쳐서 아내를 죽인다. 자신과 같은 계급의 여성에게 자신의 죄를 투사하여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이후로 박찬욱은 마치 이 단편영화 안에서 벌어진 살인에 대해 속죄를 하듯, 여성주체의 입장에서 영화를 전개한다. 계급적 죄책감에 더한 젠더적 죄책감.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죄를 저지르지 않은 부르주아는 없다.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죄를 저지르지 않은 남성은 없다. 자신의 위치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 이 위에서 새로 태어나는 건 자살을 꿈꾸는 신부 ‘상현’이다
4.
<박쥐>(2009)의 상현(송강호)은 무기력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는 신부이며 그에게 있어 가장 강한 감정은 ‘죄책감’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신부라 우러러 보고 신성시 하지만, 상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기도 밖에 없고 이제 그것조차 잘 듣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는 단지 운 좋게 품위와 명예를 가진 신부가 되었을 뿐이다. 그는 자살충동에 시달리지만 가톨릭에서 자살은 가장 큰 죄 중 하나이기에, ‘순교’의 형태로 자살을 시도하다 되살아나 뱀파이어가 되고 만다. 그는 죄를 지었고 그 결과 자신의 욕망과 위치성을 은유하는 뱀파이어라는 존재로 살아가는 벌을 받았다. 이후 상현은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자신의 윤리의식 사이에서 갈팡질팡 배회하며 고통 받는다.
<박쥐>에 이르러 박찬욱 작품의 주인공은 부조리의 세계에서 고통 받는 개인에서 자신의 위치성과 욕망으로 인해 악이 되어 윤리적으로 고뇌하는 주체로 옮겨왔다. 상현은 뱀파이어로 부활한 이후 통제되지 않는 욕망에 고통 받다가 선을 넘어버린다. 그리고 여기서 박찬욱의 작품사상 새로운 유형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태주(김옥빈)이다. 태주는 상현을 성적으로 유혹해 그가 자신의 남편을 살해하게 하는 전형적인 팜므파탈이다. <박쥐>에서 가장 생동감을 가지고 빛을 발하는 캐릭터 또한 바로 태주이다. ‘종교가 없어 지옥에 가지 않’고 ‘사람 먹는 짐승’으로 스스로를 인정하기 때문에 사람피를 빨아먹는 행위에 아무 죄책감이 없는 태주. 선과 악, 인간과 짐승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상현과 달리 그녀에겐 죄의식이 없으며, 뱀파이어가 된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힘으로 인해 누릴 수 있게 된 자유를 한껏 만끽한다. 그리고 감독은 <박쥐>의 서사 내에서 더 이상 다루기 힘들 정도로 강한 에너지를 갖게 된 그녀를 결말에서 상현을 통해 처벌한다.
사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테레즈 라캥’은 태주의 모태가 된 테레즈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그런데 왜 박찬욱은 이 소설의 주인공을 로랑-상현으로 바꾼 것인가? 그는 아버지의 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남성 주체였고, 그래서 로랑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박쥐>의 마지막에 소멸한 것은 태주가 아닌 '상현'이다. 그리고 태주는 <스토커>(2013)에서 다시 부활했다.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를 처벌한 건 상현이다. 태주는 자신의 의지로 죽지 않았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5.
<스토커>엔 흡혈장면이 나오지 않을 뿐, 이 영화는 전형적인 뱀파이어 장르의 서사를 따르고 있다. 초인적인 힘과 매력을 지닌 뱀파이어와 성적인 긴장 상태에 놓여있던 인간이 그에게 먹히는 동시에 피를 수혈 받고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스토커>는 <박쥐>를 태주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사랑의 대상인 태주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이끌었던 죄의식적 남성주체인 상현이 아닌, 상현에게서 피를 수혈 받고 새롭게 깨어난 여성인 태주의 시점에서 구성된 이야기.
전통적인 서사에서 탑에 갇힌 공주님은 왕자에 의해 구출된다. 부모에게 버려진 채 한복집에 갇혀 온갖 구박을 먹고 자란 태주를 신부 상현이 구출해 주었듯이, 유일하게 믿고 따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마음이 맞지 않는 어머니 밑에서 신경전을 벌이던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카)를 구출해 주러 온 사람은 삼촌인 찰리(매튜 구드)다. 찰리는 여러모로 뱀파이어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는 잘생기고 섹시한 미모와 사람들을 유혹하는 화술을 지녔다. 무엇보다 그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두 번의 장면에서, 감독은 고의적으로 찰리가 음식에 손을 전혀 대지 않았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그는 오직 핏빛 와인만을 마시는데, 이 와인의 생산연도는 인디아가 태어난 해와 같다. 그리고 처음으로 단 둘이 남은 자리에서, 찰리는 인디아에게 와인을 권한다. 이때 카메라는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같은 이들의 외모를 번갈아 비추며 같은 피를 나눈 친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찰리의 말에 인디아는 그럴 필요 없다고 날카롭게 쏘아붙인 뒤 한 마디를 덧붙인다. '우리는 이미 가족이니까요.' 그들은 말 그대로 피를 나누어 마신 사이인 것이다.
태주에게 빠져 단기간에 격정적인 관계를 맺었던 상현과 달리, 삼촌은 오랜 시간동안 인디아의 주변을 맴돌며 그녀가 스스로 자각하기를 기다린다. 그는 인디아의 식욕, 성욕, 그리고 뱀파이어로서의 욕구(인디아 가문의 핏줄이 지닌 욕구)를 자각시키는 촉매로 충실히 기능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찰리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낯선 존재가 아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기다려왔던, 내가 누구인지 가장 잘 알고 있고 나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줄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찰리와 인디아는 이로써 서로가 같은 종족임을 확인하는 피의 세례식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아버지와 친한 관계에 있었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인디아는 프로이트가 말한 '엘렉트라 콤플렉스'의 전형적인 예시처럼 보인다. 친하게 지내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가 죽은 날 집안에 들어온,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닮은 삼촌 찰리. 그런 삼촌을 욕망하는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 그런 엄마를 증오하는 딸 인디아. 이 신화대로라면 인디아는 엄마를 죽이고 삼촌과 맺어져야 하지만 박찬욱은 결말에서 이 신화를 뒤집어버린다. 소녀는 어머니를 응징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팔루스가 없음을 원망(남근선망)하며 어머니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팔루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뒤 한 명의 온전한 주체로 우뚝 선다. 그런 그녀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필요 없다. 마지막에 그녀는 아버지를 죽인 삼촌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건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했던 또 다른 아버지를 죽인다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담고 있다. 자신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고, '~을 하라'고 명령했던, 아버지의 법을 살해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초자아'는 결국 아버지의 법이다. 사회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복종하려고 하는 의지이자 스스로의 욕망을 도덕에 의해 억압하는 것이다. 이건 <박쥐>에서 가톨릭 신부였던 상현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부분이다. 반면 박찬욱의 뱀파이어 영화에서 여성들 - 태주와 인디아-은 상대적으로 그런 초자아로부터 자유롭다. <친절한 금자씨>이후로 박찬욱 작품의 주요 여자인물들은 항상 남자보다 낮은 계급(젠더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에 위치해 있어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해내리라 기대 받지 않고 자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환경에서 자란 여자들이 기존 사회의 통념에서 오히려 더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기 쉬웠을 거라 이론적인 측면에서 가정해 볼 수 있다. 때문에 <박쥐>에서 죄의식적 남성주체인 상현이 하지 못했던 것-뱀파이어로서의 정체성을 과감히 인정하는 것-을 여성인 태주는 해낼 수 있었고, <스토커>의 인디아는 자신을 새로운 정체성으로 이끈 유사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온전히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주체에 대한 긍정은 다음 작품인 <아가씨>(2016)까지 이어진다. 여성 투탑 주연의 이 영화에서 남성은 다시 백선생과 같이 공감의 여지가 없는 ‘악’으로 나타나며, 자신들을 핍박하고 착취하던 남성 앞에서 여성들은 서로 계급을 초월하는 연대와 사랑을 나누며 물을 건너 유토피아로 간다. ‘악’의 위치를 차지했던 남성들은 처벌받고, 여성들은 평등하고 대칭적인 위치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가장 최근작인 <헤어질 결심>(2022)에서, 신부 상현과 태주의 모티브는 반복된다. 왜 죄책감에 휩싸인 남성 주체는 귀환하는가? 아무리 윤리적인 자각을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성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건 누구에게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사 안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할지라도 현실에서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태주뿐만 아니라 상현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박찬욱은 <헤어질 결심>에서 다시 한 번 <박쥐>의 이야기를 반복한다.
6.
<스토커>의 인디아가 <박쥐>에서 죽은 태주의 부활이었다면, <헤어질 결심>의 서래는 살인자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하고 자신만의 윤리를 기준으로 살아온 인디아의 연장선상에 있다. 태주-인디아-서래는 박찬욱의 작품 안에서 작용-반작용을 하며 이어져 온 캐릭터이다. 서래는 시각적으로도 태주와 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있다. 부스스한 펌을 한 긴 머리에 빈티지한 푸른 원피스. 태주가 물을 상징하는 푸른 계통의 옷을 입었다면 서래는 물의 푸른색과 산의 녹색을 섞어 입는다. 그리고 그녀는 불운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만의 윤리를 실행하며 손에 피를 묻히고 살아온 살인자이다.
형사 해준은 신부 상현을 잇는 죄의식을 가진 도덕적 남성 주체이다. 그는 아내 말마따나 ‘살인과 폭력이 같이 있어야 행복’한 사람, 즉 상현처럼 ‘피’를 원하는 사람이지만 형사라는 직업 안에서 피를 갈망하는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승화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신부라는 직업을 가진 상현이 신의 율법 아래에서 자신을 강하게 억압하다 갑작스러운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미성숙한 방식으로 파멸을 맞이했다면, 해준은 형사라는 좀 더 범속한 직업을 선택해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욕망을 컨트롤 하고 있다.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와 달리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이에 기인한다. <박쥐>에서 태주가 상현에 동조하여 함께 뱀파이어가 되어 타락한 것과 달리 <헤어질 결심>에선 해준이 서래의 윤리에 동의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래는 자신이 ‘불쌍한 여자’라고 하지만 해준은 서래가 죽인 첫 남편이 죽여 마땅한 남자였고, 서래가 그를 죽인 것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또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편하게 죽도록 안락사를 시켜준 일에도 자비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서래는 자신 때문에 ‘붕괴되었다’라고 말한 해준의 말을 믿었다. 자신 때문에 그가 원래 갖고 있던 도덕적 기준과 정체성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고, 그건 사랑이라고. 여기서부터 품위와 위반 사이의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자신을 위해 품위와 자부심을 내려놓고 ‘붕괴된’ 남자라면, 나를 이해해 줄 수도 있을 거란 생각. 그걸 믿고 서래는 게임을 한다. 다시 한 번 피의 현장을 중심으로 형사와 피의자가 되는 순간을 반복하는 것이다.
누아르로 시작했던 <헤어질 결심>은 언제 멜로드라마로 전환되는가? 누아르의 두드러진 특징인 플래시백과 시점의 전환은 사건의 단서를 갖고 있는 각 인물의 주관적인 진실을 대변한다. 이 시점의 전환은 남성 형사와 여성 피의자 간에 벌어지는 내러티브의 경쟁이기도 하다. 누구의 이야기가 주도권을 차지할 것인가? 필름 누아르에서 보통 남성 내러티브는 혼란과 매혹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여성 내러티브는 남성 내러티브의 환상을 뒤엎어 버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한 비정함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서래의 시점은 누아르적인 비정함이 아니라 해준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그녀의 독백은 누아르적 내러티브의 경쟁인 동시에 멜로드라마적인 독백이다. 하지만 극을 멜로드라마로 전환시킨 것은 서래의 독백이 아니라 해준의 발화이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라는 도덕적 상태에 대한 명백한 발화는 전형적으로 멜로드라마적인 것인 동시에 서래의 사랑이 시작되게 만든 지점이었다.
하지만 해준은 다시 돌아온 서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형사로서의 품위, 즉 자신이 도덕적 존재라는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살인자로서의 서래를 부정한다. 처음 해준이 서래의 무죄를 믿었다면 이제 해준은 서래의 유죄를 광적으로 믿는다. 미처 하지 못한 처벌을 끝내기 위해. 붕괴되었다던 그는 서래 앞에서 ‘나는 경찰이고 당신은 피의자’라고 선을 명확하게 그으며, 당신이 ‘꼿꼿해서’ 좋다는 말로 로맨틱한 분위기를 깨 버린다. 나는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피를 보며 살아가는 종류의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으로 보였기에.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나와 달리 당신은 범죄자이고 우리는 이뤄질 수 없다. 해준의 거절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왜 서래는 해준에게 거절당한 이후에 그를 죽이지 않았는가? 높은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와 그 뒷모습을 보고 서 있는 서래라는 구도의 반복. 이 장면은 히치콕적이다. <현기증>에서 여자가 두 번 탑에서 떨어졌듯 <헤어질 결심>에서도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두 번째 남자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즈음, 서래는 뒤에서 해준을 껴안는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 다른 위치에서 다른 윤리관을 갖고 살아가던 두 사람의 결투와도 같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래는 해준을 죽이지 못한다. 단지 사랑하기 때문이어서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죽일 수 없다. 해준은 폭력을 저지른 죄인도 아니고,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살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서래가 무분별한 살인마가 아니라 자신의 윤리적 기준에 의해 사람들을 처벌하거나 죽음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멜로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미덕에 대한 가치의 재확인이다. 서래는 살인자일지언정 윤리를 갖고 있다. 그녀는 도덕적인 ‘품위’를 끝까지 유지하려 하는 해준을 죽일 수 없다.
여기서 이 글을 처음 시작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렇다면 서래는 왜 해변에서 모래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꼿꼿이 서서 죽음을 맞이했는가?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이 지금까지 즐겨 사용하던 수직과 수평, 산과 바다의 모티브를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한 작품이다. 박찬욱의 작품 안에서 높은 곳에서 살인을 하거나 시체를 묻는 것은 처벌이자 완결의 의미였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와 유가족들은 납치살해범인 백 선생을 산에 묻고, <박쥐>에서 상현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태주와 함께 높은 절벽에서 동반자살 한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가 폭력남편인 기도수(유승목)를 산의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인 것 또한 죄인을 자신만의 윤리로 처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바다나 물에서의 죽음은 정당하지 못한, 시체가 계속 돌아오게 하는 찝찝한 죽음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이 류(신하균)가 ‘착한 놈’이라는 걸 알면서도 죽일 때, <박쥐>에서 상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태주의 남편을 죽일 때, 여지없이 물속에서 살인이 이뤄진다.
<헤어질 결심> 마지막에 등장하는 해변은 바다이자 산인 곳이다. 해변가이지만 산과 같은 암석들이 늘어서 있는 곳. 그곳에서 서래는 물로 걸어 들어가지 않고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 그 안에 꼿꼿하게 선 채로 자살한다. 그것은 단지 해준의 미결사건으로만 남고 싶어서는 아니다. 그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도덕에 의해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따라서 스스로를 처벌하겠다는 의지이다. 나의 윤리적 원칙을 철회하고 당신의 도덕을 받아들인다. 당신의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처벌한 나를 속죄인으로서 영원히 기억하라.
수평선에서부터 범람하는 파도가 밀어닥치는 직선의 구덩이 안에서 서래는 꼿꼿하게 죽는다. 서래의 죽음은 누아르적 멜로드라마의 세계에서 도덕적 비의를 자아낸다.
<박쥐>의 커플은 함께 일출을 맞이하지 못하고 <헤어질 결심>의 커플은 함께 석양을 맞이하지 못한다. 해가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바닷가의 절벽과 산 같은 암석이 솟아있는 바닷가의 해질녘에 그들은 헤어진다. 결국 남성주체는 사회적 도덕을 초월한 여성의 피 묻은 윤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비천한 위치에 있는 여성과 품위를 가진 도덕적 남성 간 사랑의 불가능성. 하지만 물에 잠겨 죽은 여자는 파도의 형상으로, 안개의 형상으로 계속해서 남자를 찾아올 것이다.
박찬욱은 자신의 위치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고민을 영화에 반영해 해결을 모색해 온 감독이다. <복수 3부작>이후로 그는 비극적 세계에서 벗어나 죄의식을 가진 남성과 구조적으로 착취당하는 위치에 있는 여성이 부딪혔을 때 어떤 드라마가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실험을 해 왔다. <헤어질 결심>은 비극을 대체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박찬욱의 새로운 스타일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세계가 부조리하더라도 그 안에서 사는 주체들은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행동이 결백한 것이고 어떤 악행이 진행 중이고, 그것이 무엇을 초래하는가?” 박찬욱이 이 안개 낀 미결사건을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풀어낼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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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ne Gledhill, "Rethinking Genre", Reinventing Film Studies, Christine Gledhill & Willimas (eds.), London: Hodder Arnold, 2000, p.234. 안민화, 「멜로드라마 속의 사로잡힌 정동, 탄력적 고통, 대리적 대상-어구스틴 잘조사의 멜로드라마 재고」에서 재인용.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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