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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된 엄마, 딸이라는 또 다른 여성괴물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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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에서 수경(양말복)은 한국 영화 안에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엄마’ 캐릭터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나르시시즘과 분노조절장애로 딸을 제대로 양육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엄마인 수경의 모습을 그린다. 수경의 폭력성이 극대화되어 드러나고 엄마와 딸의 갈등이 증폭되는 계기는 자동차 사고 사건이다. 수경은 싸움 후에 조수석을 박차고 나간 이정(임지호)을 차로 치어버린다. 수경은 이 사건이 급발진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진짜 치었을 수도 있을 거란 의심이 들 정도로 영화 초반의 수경은 무정하고 잔인한 모습이다. 그러나 도입부에선 미성년자로 보였던 딸인 이정이 사실 서른에 가까운 성인이라는 정보가 주어지면서 영화는 이 두 캐릭터들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한다. 집을 나와 독립하고 싶어하는 건 이정이 아니라 수경이다. 수경은 직장이 있고 취미가 있고 친구가 있고 애인도 있다. 그리고 애인과 결혼해서 곧 집을 나가려고 한다. 반면 이정의 인생엔 집과 회사 그리고 엄마밖에 없다.
이 영화가 특이한 점은 어머니의 신체가 비체화되는 순간인 abjection을 반대로 전복한 것이다. 비체abject적인 것은 이제까지 모성 자체로 구현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수경을 모성신화에서 해방시켜 존엄성과 개별성을 지닌 주체적 인간의 위치로 복권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영화는 딸인 이정을 비체적인 존재로 만든다. 첫 씬에서 엄마인 수경은 팬티를 빠는 딸 이정 옆에서 오줌을 배출하고, 입던 팬티를 그녀에게 벗어 던진다. 딸은 엄마가 입었던 팬티를 빨고, 그녀의 팬티를 자신의 생리혈로 오염시키는 존재이다.
이 모티브는 이정이 직장동료 소희에게 이야기하는 첫 생리 사건으로 강조된다. 첫 생리가 나와 이정이 수경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수경은 아무 말 없이 나가 생리대를 사 와서 이정에게 채워줬다고 한다. 이정은 처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수경에게 서운함을 느꼈지만 자기에게 생리대를 채워줄 때 너무 좋았다. 마치 ‘기저귀를 채워주는 느낌’이었고 그런 돌봄을 받는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고. 그래서 온 몸의 힘이 풀리며 생리혈이 떨어졌고 엄마의 손에 묻었다. 수경은 말했다. ‘더러워.’ 몸을 빠져나온 피는 더럽다. 더럽지 않은 피는 오직 그게 원래 있어야 할 장소, 몸 안에 있을 때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빠져나온 피까지도 더럽지 않게 여겨주기를 엄마에게 바라는 딸이란 대체 무슨 존재인가? 그녀는 아직까지 엄마와 자신의 몸이 이어져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도 어머니의 자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괴물적인 아이’ 이다.
영화 초반에 제기되었던 수경의 극단적인 폭력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정의 괴물성에 초점을 맞추며 반전을 맞이한다. 엄마 이외의 사람과 관계를 맺어본 적 없는 이정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소희를 마치 대리 엄마처럼 여기고 의지한다. 소희는 개인 간의 거리를 존중하지 않은 채 자신의 공간을 자꾸 침범하려는 이정을 밀어내고, 결국 회사를 무단퇴사하게 된다.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소희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것을 안 이정은 소희의 집 앞에서 차를 타고 기다리다 집을 나온 그녀를 좇는데, 그걸 알아챈 소희의 경멸스러운 눈초리를 받고 만다. 급발진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다음이다. 자신을 무시한 소희를 지나쳐 운전하던 도중 차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급발진해서 벽에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장면은 초반 벌어진 사건이 진짜 급발진 사고였다는 데에 힘을 실어주는 동시에, 차가 이정을 몰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정은 너무 오래 자궁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딸이다. 수경의 아파트와 수경의 차에서, 그녀는 좀처럼 떨어지질 않으려 한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아파트는 정전된다. 샤워를 하는 도중이었던 수경은, 샤워를 마치기 위해 이정을 불러 핸드폰 플래쉬로 자신을 비추게 한다. 집은 자궁처럼 깜깜하고, 엄마는 딸 앞에서 나체로 샤워를 한다. 익숙했던 엄마의 신체가 어둠 속에서 나체로 드러나고 그것을 딸이 지켜봐야만 하는 이 불편한 상황은 견딜 수 없는 기괴(uncanny)함으로 찾아온다. 어머니가 옷을 다 입고 자신의 휴대폰을 찾아 플래쉬를 켰을 때, 그 앞에 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녀관계의 비대칭성. 딸은 엄마만을 보고 있고 엄마의 가장 내밀한 것을 공유하지만 정작 엄마의 시야에 딸이 있었던 적은 없다.
그다음 컷에서 엄마의 방을 빠져나온 이정은 무언가를 느끼고 자신의 발을 본다. 이정의 맨발은 어디선가 흘러내린 물로 젖는다. 정전된 아파트의 냉장고는 마치 양수를 터뜨린 것처럼 물을 질질 흘리고 있다. 이제 이정이 수경의 아파트라는 자궁에서 나가야만 하는 시간인 것이다. 더 이상 이정이 머무를 공간은 없다
다음 날, 이정이 드디어 자신의 의지로 집을 나가고 난 뒤에 이어지는 풀샷 롱테이크에서 수경은 드디어 되찾은 집에서 자신만의 삶을 이어간다. 정전 때 녹아버린 음식들을 정리하고, 한 번 녹아 다시 냉동할 수 없게 된 만두를 끓이며 주방 식탁에 앉아 리코더로 미숙한 실력으로나마 연주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씬은 이정을 위해 분배되지만 그녀는 화면에서 풀샷으로 등장하지 못한다. 이정에겐 아직도 자신의 공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속옷가게에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속옷을 사기 위해 가슴 사이즈를 재는 마지막 장면은, 해방감보다 답답함을 자아낸다. 이정의 가슴을 재기 위해 둘러진 줄자는 그녀에게 주어진 한 줌의 공간을 재는 것처럼 보인다. 이정은 이제 막 자궁을 빠져 나왔으며 그녀가 가진 공간은 오직 그녀의 신체 밖에 없다.
모성 이데올로기에서 엄마를 구출하여 수경을 한 개인으로 그린 점은 탁월한 지점이지만, 그걸 위해 수경의 반대항에 딸인 이정을 놓고 그녀를 비체화한 부분은 문제적이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엄마를 괴물로 만드는 것이 항상 아들(올가미, 마더 등)이었던 반면, 엄마가 주체화되기 위해서는 왜 딸이 괴물화 되어야 하는가? 엄마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타자화시킨 딸은 이제 어디로 가는가? 모성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린 것만으로 여성과 폭력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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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jection이란 단어는 ab분리+jection 던지다의 결함으로 만들어진 단어로, ‘떼어서 던져버리다’ 라는 뜻이다. 최초의 압젝션은 출산이다. 아이는 자궁 안에서 양수와 섞여 있다가 태어나는 순간 여러 가지 부산물들과 함께 섞여 나온다. 이때 남겨진 부산물들이 바로 비체abject이이며, 비체는 주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혐오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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