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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과 실망, 희망이 혼재한 영화 <제비>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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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실망, 희망이 혼재한 영화 <제비>
송영애(한국영화평론가협회)
한국 현대사에서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일들이 아직 많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의 ‘녹화사업’도 그중 하나다. 사상적으로 불온하다고 평가한 학생을 강제 입대시키고, 고문하고, 프락치로도 활용했다고 알려진, 게다가 의문의 죽음도 많다고 알려진 녹화사업을 담은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이송희일 감독의 <제비>다.
<제비>는 ‘녹화사업’의 진상을 밝혀내는 영화는 아니다. 대신 그 시기를 관통한 이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는 영화다. 주요 인물로 경찰, 검사, 기자 등이 아니라, 사이가 좋지 않은 어머니와 아버지, 아들과 며느리, 그들의 주변 지인 정도가 등장한다. 소통이 끊긴 가족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제비>가 마냥 사적인 이야기로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는 개인의 산물인 동시에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어느새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오늘은 영화 <제비>가 사적이면서 공적이기도 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영화는 뒤섞임, 혼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현재와 과거가 섞이고, 과거는 여러 버전의 과거로 분화되어 섞인다. 그리고 현실과 소설도 섞인다. 그렇게 섞이고 섞인 이야기에는 절망과 실망, 그리고 희망까지 함께 담긴다.
- 현재와 과거, 현실과 소설
영화는 호연(우지현)이 일하는 건설 현장에서 시작한다. 그는 늦어지는 공사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다. 그러나 이혼 위기의 아내 은미(박소진)가 찾아와 호연의 어머니 진숙(박미연)이 사라졌다고 알렸을 땐 시큰둥하다. 호연과 은미, 호연의 부모 진숙과 현수(이대연)는 서로의 전화도 잘 받지 않는 가족이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 사이에 대화가 끊기지도 꽤 된 듯하다.
마지못해 진숙을 찾아 나선 호연은 진숙이 사라진 현장인 ‘출판 기념회’ 장소에 간다. 누군가를 보고, 맨발로 뒤따라간 후 사라졌다는 진숙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진숙을 자극한 그 남자는 누구일까?
그 현장에 있었던 진숙의 친구들은 호연에게 진숙을 찾으려면 수십 년째 진숙이 써온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진숙의 소설은 진숙의 학생운동 시절을 바탕으로 한다. 진숙의 친구들은 진숙의 소설을 허구가 아니 사실로 인지하고 있을 정도다.
어느새 영화는 진숙의 내레이션과 함께 소설 <제비>의 내용이자 진숙의 과거로 이동한다. 비록 현재 현실에서 진숙은 사라졌지만, 소설 속 과거를 통해 나타난다. 그렇게 호연은 부모의 과거와 맞닥뜨린다. 진숙과 현수는 녹화사업 시기를 고스란히 겪어낸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제비’(윤박)라 불린 진숙의 옛 비밀 연인도 있다.
- 분화된 과거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의 영화는 많다.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추적하는 영화가 종종 선택하는 구성이다. 누군가의 회상이 중간중간 등장하고, 긴장감이나 불안감 속에 의외의 반전을 제공하기도 한다. <제비>도 그렇다.
이 영화의 이야기 구성 방식이 흥미로운 이유는, 현재와 과거, 현실과 소설을 오가기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과거 상황이 여러 버전으로 분화한다. 같은 시간과 공간의 과거지만, 기억하는 이들에 따라 조금씩 다른 버전의 과거로 이동하는 것이다.
진숙이 사라진 2주 전 상황에 대한 기억부터 1983년에 대한 기억까지 여러 버전의 회상 장면으로, 시간순이 아니라 호연이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 순서대로 등장한다. 그렇게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있었던 일들이 여러 인물의 기억에 따라 여러 차례, 각기 다른 버전으로 분화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강의실 앞쪽의 상황을 회상했다면, 다른 이는 강의실 뒤쪽 상황을 회상한다. 누군가 자신이 그곳에 도착했던 상황을 기억했다면, 다른 이는 그 직전 그곳을 떠나던 상황을 기억한다. 각기 다른 버전의 과거를 퍼즐 맞추듯 조합하면, 그날 혹은 그 사건의 실체에 더 다가가게 된다.
절망과 실망 그리고 희망
<제비>는 사라진 어머니 진숙을 찾아 나선 아들 호연의 짧은 여정을 통해, 30년 전 진숙과 현수, 제비를 비롯한 학생들의 사랑과 열정, 좌절을 드러낸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소설, 여러 시선의 과거를 오가며, 지난 30년이라는 세월과 그들의 변화도 넌지시 알려준다.
관객은 자세한 건 모르지만, 계속되어 온 좌절과 실망 등을 느끼며 짐작할 수 있다. 조금 단순화되고 일반화된 인물이나 상황도 보이지만, ‘저런 사람, 저런 상황이 꼭 있지’라고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마냥 가슴 아픈 가족의 이야기로 끝나는 건 아니다. 책으로 읽듯, 영화로 보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온 이들의 일상과 기억을 목격하며, ‘아마도 어머니를 찾겠지?’ ‘아마도 대화를 시작하겠지?’라고 기대하게 된다. 더불어 ‘진상이 밝혀지는 날이 오겠지?’라는 희망도 품게 된다.
영화 내내 과거와 현재 장면 모두에서 좁은 골목, 복도를 달리는 인물을 자주 보게 된다. 겁에 질려, 혹은 간절함에 달리고 또 달렸던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며, 지난 30년 우리의 역사도 되돌아보게 된다.
지극히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영화인 <제비>가 현재와 과거, 현실과 소설을 통해 담아낸 좌절과 실망, 그리고 희망까지 느껴보기를 바란다. 아마 주변을 돌아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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