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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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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사랑의 고고학> : 길고 느리고 끈질기게, 상처를 치유하다2023-04-18
사랑의 고고학 스틸

 

 

<사랑의 고고학>: 길고 느리고 끈질기게, 상처를 치유하다

 

김현진 (시민평론단)

 

제목에 고고학이 나온다고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같은 모험영화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물론 비유적인 의미에서 사랑이라는 것도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종의 정신적 모험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 영화 <사랑의 고고학>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 선조들이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를 밝히는 학문이라는 고고학의 사전적 의미처럼, 이 영화도 자신의 지나간 사랑의 상처들을 되새기면서 어떻게든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고고학 스틸

 

고고학자 영실(옥자연)은 유적 발굴 현장에서 작업을 하던 중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오는 남자 인식(기윤)과 사랑에 빠진다. 영실에겐 오래전 마음을 정리한 관계지만 아직 그녀의 집에서 동거를 하는 전 남친이 있다. 친절한 남자일 것만 같았던 인식은 영실의 전 남친의 존재와 영실의 과거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마치 검사처럼 온갖 숨 막히는 말들로 그녀의 죄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인식이 영실에게 하는 말들은 듣기만 해도 절로 화가 치밀어 오르는 찌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글을 읽는 이들의 정서적인 안정을 고려해서 차마 그 말들은 받아쓰지 않도록 하겠다. (영실을 연기한 배우 옥자연도 그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연기하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고 한다.) 우선 영실의 과거를 의심한다. 그에 걸맞는 무언가가 나오면 또 다른 의심의 회로가 돌아간다. 그렇게 추궁을 하다가 영실이 떠날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사과를 하고 앞으로 잘할게 모드로 돌변한다. 이런 관계가 그들의 연애 기간 내내 계속 반복된다. 연인에게 가하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자 정서적인 학대다.

영실은 왜 인식의 가스라이팅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관계를 바로 끝내지 못했을까? <사랑의 고고학>은 영실이 인식과 곧장 헤어지지 못한 이유를 자세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가 정서적으로 미성숙하고 불안정해도 자신이 좀 더 인내하고 좀 더 노력한다면 남자가 다시 안정된 심리상태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 오판이 오히려 가스라이팅을 더 부채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연인이나 아내를 의심하는 남자들은 쉽게 변하지를 못한다. 여자의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과거는 수정되거나 삭제될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현재에 충실해야 되는데 그들은 그러지 못한다.

 

사랑의 고고학 스틸

 

<사랑의 고고학>의 러닝타임은 2시간 43분이다. 이 느리고 기나긴 시간은 고고학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지난한 과정과 비슷할 것이다. 망치나 곡괭이 같은 도구로 땅을 막 파내는 것이 아니고, 땅속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빗자루 같은 도구로 흙을 쓸어내듯이 조금씩 천천히 신중하게. 이런 느린 페이스는 영실이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영화 <사랑의 고고학>의 페이스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진로 상담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영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한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가난과, 노동의 무가치함과, 환멸을 예상해야 되요.” 이걸 알면서도 영실은 고고학자의 길을 걸어간다. 영실이 자신의 직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곧 자신의 실패한 연애에 대처하는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크게 화내지 않고 소리 지르지 않고 좀처럼 눈물 흘리지도 않으면서, 영실은 자신의 삶이 상처에 무너지지 않도록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면서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낸다. 써놓고 보니까 영실의 말은 어쩌면 이완민 감독이 영실의 입을 빌려 말하는 자신의 독립영화 경력에 대한 코멘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힘들지만 좋아하는 일이니까 계속 해나가는 것. 아마도 <사랑의 고고학>이 메이저 영화사의 투자를 받았다면, 2시간 43분이란 러닝타임을 줄이라는 압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주인공이 과거 연애의 상처를 길고 느리고 끈질기게 응시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이 여정은 보기에 힘겨울 수 있지만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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