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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 다움, 유가족다움을 넘어 - 세월호 이후의 연극과 여성주의적 다큐멘터리 이소현 - <장기자랑>(2023)202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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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다움, 유가족다움을 넘어 - 세월호 이후의 연극과 여성주의적 다큐멘터리 이소현 - <장기자랑>(2023)
박예지 2022 영화의전당 영화평론대상 수상자
세월호 9주기를 맞아 개봉한 다큐멘터리 <장기자랑>(2023)은 동명의 연극에 도전하는 단원고 희생자 및 생존자의 엄마들을 다룬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월호 유가족, 피해자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엄마들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무대에서 발랄한 모습으로 연기를 한다. 무대에서 내려온 이들은 배역을 더 잘 소화하기 위해 밤에 혼자 가게에서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틀어놓고 춤 연습을 하기도 하고, 서로 더 중요한 배역을 맡고 싶어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다른 매체나 작품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다. 이소현 감독은 ‘유가족다움’에서 벗어난 세월호 유가족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한다. 이런 접근법은 실존 인물에 기반한 캐릭터로 창조한 ‘연극’에 도전하는 엄마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이중의 형식을 통해 성공한다.
그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날 이후 이 트라우마적 사건을 다룬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연극이 만들어졌다. 세월호 사건은 사회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세월호를 잊지 말자’라는 말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자는 말이 아니라 “세월호 사건을 현재에 기입시키고 그로 인해 재구성된 세계를 어떻게 미래로 가져갈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날을 어떻게 현재로 가져오고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이후의 연극 또한 극장이라는 공간과 연기라는 행위, 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하게 되었다. 연극은 어떻게 시대의 고통에 반응해야 하는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무대화할 것인가? 당사자가 직접 연극을 한다고 할 때 배우란 어떤 존재인가?
연극 <장기자랑>은 ‘4·16 가족 극단 노란리본(이하 노란리본)’에 속한 단원고 희생자 및 생존자의 엄마들이 세월호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을 연기하는 작품이다. 극작가 변호진이 희생자들의 짧은 전기를 담은 「4.16단원고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에 실린 내용을 기반으로 극을 썼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참사는 벌어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수학여행에 가서 장기자랑으로 어떤 걸 할까 고민하고 연습하다 제주도에 무사히 도착해서 준비한 장기자랑을 선보인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청춘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연극의 배경엔 ‘세월호 참사’라는 공동의 역사적 비극이 단단히 버티고 있고, 배역은 희생자인 단원고 학생들의 엄마의 신체로 수행된다. 만약 그날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아이들은 제주도에 가서 이렇게 장기자랑을 선보였겠지. 수인 엄마는 말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좋은 점은 우리 아이들은 제주도에 도착을 못했지만 이 작품 안에서는 모두 다 같이 제주도에 도착하는 거라고. 참사는 한 번이었고 대체 역사적 상상은 배우의 신체를 통해 여러 공간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그렇다고 이 연극을 사이코드라마나 소시오드라마의 연장 선상에서 보면 안 된다. 사이코드라마는 환자에게 배역과 상황만을 주고 대본 없이 그가 즉흥 연기로 억압된 감정을 표출하게 하는 심리 치료의 기법이다. 반면 극단 노란리본의 <장기자랑>엔 정해진 배역과 대본이 있고, 배우들은 좀 더 잘 연기하려고 연습을 한다. 배우들은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동시에 연극배우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 다큐 <장기자랑>은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연극을 하게 되었지만 어느덧 노란리본 극단에서 200회가 넘는 공연을 한 연극배우가 되어 더 비중 있는 배역을, 더 나은 연기를 욕망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는다. 한때 성악가가 꿈이었던 영만 엄마는 말한다. “그냥 나는 더 멋지게 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힘들 때마다 술을 마셨던 예진 엄마는 연극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어 헬스장에 다니며 체중 감량을 한다.
‘진실규명’을 위해 ‘당사자의 고통’을 기록하려는 설명적 다큐멘터리의 문법과 달리 이소현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참여적이고 성찰적이며 수행적인 접근을 취한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 과정부터 그렇다. 감독은 세월호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온 NHK의 사운드팀으로 참여하면서 세월호 유가족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가 제작 현장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유가족들이 감독에게 먼저 다가와 ‘이 다큐를 찍기 싫다’고 말한 것이다. 그럼 왜 참여하냐는 감독의 질문에 유가족들은 대답했다고 한다. ‘잊히지 않기 위해서.’ 이소현 감독은 이걸 듣고 당사자들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으면서 기억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이후로 노란리본 극단의 홍보 영상을 찍게 되었는데, 그때 홍보를 위해 준비한 단 두 가지 질문에 엄마들이 2~3시간씩 이야기를 털어놨다고 한다. 명확한 목적을 갖고 수행된 인터뷰에 준비된 대답을 들은 게 아니라 엄마들이 먼저 감독에게 다가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감독이 그런 엄마들의 일상에 함께하면서 다큐멘터리가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여성주의 다큐멘터리의 방식이었다면, 이소현 감독은 <장기자랑>을 통해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있던 세월호 문제를 단원고 희생자들인 엄마들의 일상을 통해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세월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다시 정치화시킨다.
이소현 감독은 극단 노란리본의 단원인 엄마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연극을 한다고 해서 고통이 낫지는 않는다”고. 다만 이들은 기억하면서도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의 공연은 당사자들보다 그 공연을 보는 관객들에게 더 큰 치유를 안겨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어떻게 이 사건을 잊지 않고서도 절망과 냉소에 빠지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연극 <장기자랑>과 다큐 <장기자랑>은 그 방법을 보기 드물게 신중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제시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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