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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그 여름>: 사랑의 여름과 깨달음의 여름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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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사랑의 여름과 깨달음의 여름
김현진 (시민평론단)
한지원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그 여름>은 소설가 최은영의 단편소설 ‘그 여름’이 원작이다. 동성애를 소재로 한 퀴어 로맨스물이면서도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현실이나 혐오 문제, 찬반의 논의 같은 영역을 다루는 영화는 아니다. 물론 여자 커플에 대한 주위의 수군거리는 시선이나 레즈비언 커뮤니티, 커밍아웃에 대한 두려움 같은 문제를 간간히 짧게 보여주긴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동성애의 문제가 아닌, 연애를 겪으며 찾아오는 한 여성의 성장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 영화가 남녀 커플이든 여여 커플이든 통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안경을 쓴 여고생 이경은 축구선수가 꿈인 수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서로에게 반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사랑을 키워간다. 이경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고, 수이는 무릎 부상 이후 축구를 포기하고 자동차 정비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하며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경은 수이와 지낼수록 자신이 수이와는 너무 다른 사람임을 느끼고는 힘들어 한다.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경은 간호사로 일하는 은지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은지가 이경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이경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 세 여성 캐릭터의 대조를 통해 레즈비언들 사이에서도 어쩔 수 없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계급의 문제를 보여준다. 수이는 블루 컬러, 은지는 화이트 컬러 직업군에 속해 있다. 이경이 수이와 같이 먹은 음식이 라면이라면, 은지와 먹는 음식은 샤브샤브다. 대학생인 이경은 이 양자 사이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이경은 자신의 연인이 가난한 블루 컬러임을 감당할 수 있느냐, 그리고 누구의 삶을 더 선망하느냐에 대해 시험받게 되는 것이다. 수이의 때 묻은 옷차림, 곰팡이 핀 수이 집의 천장, 온갖 알바를 하느라 너무 바쁜 수이의 일상을 견딜 수 있을까.
한지원 감독은 밝고 청량한 순간들로 두 사람의 사랑의 순간들을 쌓아올린 다음 서서히 붕괴시킨다. 이 헤어질 결심의 감정을 감독은 가슴 아픈 장면으로 형상화한다. 어두운 물속의 이경과 수이. 이경은 수이의 손을 놓아버린다. 이경은 밝은 수면으로 떠오르고 수이는 어두운 물 아래로 가라앉는다. 수이를 사랑했지만 끝내 수이를 감당하지 못한 이경은 수이를 놓아버린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던 날에 나오는 노래가 선우정아의 ‘도망가자’였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둘만 있는 곳으로 도망가도 좋았을 것 같은 감정은 다 어디로 가고 이경은 수이에게서 도망치는 것인가. 물론 사랑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의무도 아니고 그것을 어긴들 범죄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쓰라려 오는 건 피할 수 없다.
<그 여름>을 보고 나서 뜬금없게도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결말이 생각났다. 비장애인 남성 츠네오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 여성 조제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헤어진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한 가지 뿐이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츠네오의 이 자백 같은 말이 가슴 아픈 이유는 이런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그 사람의 어떤 문제라도 다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그릇이 이 정도구나, 여기까지구나 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뼈아픈 깨달음. 츠네오는 결국 조제를 더는 감당할 수 없어서 도망친 것이다.
<그 여름>의 이경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츠네오처럼 깨달음의 순간을 겪는다. 이경은 말했다. “난 욕심꾸러기들이 싫었다? 막 욕심내고 그런 사람들 있잖아. 만족을 모르고...” 하지만 자신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결국 인정하게 되고 수이의 곁을 떠난다. 사랑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누구나 갖고 있다. 하지만 역으로 사랑은 그 사람의 인격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강제로 깨닫게 만들기도 한다. 이건 좋은 것일까. 알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마음의 성장통 같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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