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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에 관한 그림들, <드림팰리스>와 <기생충>2023-06-07
드림팰리스 스틸

 

 

계급에 관한 그림들, <드림팰리스><기생충>

 

 

강선형 한국영화평론가협회

 

  2019년과 2020년은 <기생충>의 해였다. 칸 황금종려상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사상 흥행과 작품성의 측면 모두에서 국제적으로 성공한 거의 유일한 예가 되었다. 그리고 이 성공은 단지 한 작품의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오랫동안 계급의 경계에 대해 그려왔고, <기생충>은 그러한 그림의 완성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첫 영화 <플란다스의 개>는 시간강사의 세상과 교수의 세상 사이의 명확한 경계와 그 경계에서 악인이 되어가는 인간 존재, 그리고 그런 군상이 빚어내는 씁쓸한 코미디들이 모두 담겨있다. 사문서위조, 주거침입, 살인의 죄를 짓는 범죄자들이 되어가는 <기생충>의 가족들과 그들이 빚어내는 코미디처럼 말이다.

  <플란다스의 개>2000년 영화임을 떠올려 보면, 봉준호 감독이 그려내는 이 계급에 관한 그림이 얼마나 오래된 그림이며 문제의식인지 알 수 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뇌물을 주고서만 교수가 될 수 있는 세계가 그려졌지만, <기생충>에서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 그야말로 별세계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곳에 도달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기생충>의 가족들이 <플란다스의 개>의 고윤주(이성재)처럼 경계에도 발을 내디뎌 보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박사장(이선균)IT 회사를 운영하는 경제지에 얼굴이 실릴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이며, 그가 재산을 증식시킨 방식이 시장 독과점이나 불공정 거래, 분할상장, 도용 등 어떤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단지 타인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구분하는 명확한 선을 긋고 그 선을 침범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을 뿐이다. 게다가 용납하지 않았을 뿐, 특별히 어떤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니다. 냄새가 나지 않게 조치한다기보다 자신의 코를 막았을 뿐인 것이다. 심지어는 국문광(이정은)은 해고하지만 박사장네는 마지막까지 해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생충>은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견고한 세계의 사람과 그 아래에서 버둥거리며 서로를 헤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계의 사람들을,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햇볕이 드는 마당과 컴컴한 지하라는 우화적 그림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데 정말로 박사장 같은 사람은 현실에 있을까? 명품 계급도나 연봉 계급도, 거주지 계급도 등 사람들이 시시때때로 양산하고야 마는 계급도에서 가장 상위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직접적 피해도 주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람 말이다. <베테랑>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재벌 2세의 갑질을 일차원적으로 그려내고 이른바 사이다를 선사하는 영화들이 늘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상위 세계의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그 세계의 사람들에 대한 순수한 신화를 재생산하고 있지는 않을까? <기생충>의 우화는 그런 질문을 남긴다. 봉준호 감독은 늘 우화의 방식을 택해왔다. 괴물을 양산한 원인이지만 안전한 미국과 괴물과 싸워서 생존해야 하는 가족들의 이야기인 <괴물>, 칸칸이 나누어진 계급을 그린 <설국열차>에 등장하는 앞칸들의 평화로움, 한국의 강원도 산골과 자본주의의 중심 뉴욕을 대비시킨 <옥자>에 등장하는 화려한 축제와 같은 것들은 늘 우화를 통해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가 택했던 현실적인 방식보다 말이다.

 

드림팰리스 스틸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기생충>처럼 우화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현실의 구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드림팰리스>는 산업재해의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시위하고 있는 사람들을 배신하고 기업으로부터 받은 합의금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은 혜정(김선영)의 이야기이다. 혜정에게 자신의 배신은 얼마든지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함께 시위하고 있음에도 공장의 관리자였던 남편에게 은연중에 책임이 있음을 내비치는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에 대한 원망이 그녀를 지탱한다. 그래서 그녀는 합의금을 받고 기업 앞에서 여전히 시위를 벌이고 있는 유가족들을 떠나지만 스스로는 떳떳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혜정의 아이 동욱(최민영)은 늘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자기가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가족을 잃고 진상규명을 기업에 요구하는 유가족들에게로 돌아간다. 혜정은 죽은 남편을 위해서, 동욱을 위해서 합의금을 받고 버티지만, 동욱은 도통 그런 합리화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드림팰리스 스틸

 

  혜정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인(이윤지)도 마찬가지이다. 수인은 혜정처럼 합의금을 받지 않고 유가족들 옆에서 버틴다. 혜정은 그런 수인을 설득하려 하지만 수인은 그런 혜정의 합리화를 도리어 비난한다. 동욱에게, 수인에게,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악인이 되어가는 자기 자신을 버텨내는 것은 남편의 목숨값으로 분양받은 아파트에서 녹물이 나오는 것만큼 견뎌내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기업과 합의하는 것만큼은 그녀가 악인이 될지언정 선택한 것이었다고 치더라도, 아파트 분양을 둘러싼 입주민과의 갈등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인의 오해는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녹물이 나오는 수도관을 수리하려면 아파트가 모두 분양되어야 하고, 그래서 혜정은 분양 홍보관 일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결국 수인도 합의금을 받자, 그녀와 이전처럼 이웃으로 함께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드림팰리스를 소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할인 분양을 부추겨 집값을 하락시킨다는 입주민들의 항의를 받게 하고, 할인 분양 세대의 이사를 막기 위해 입주민들이 친 바리케이드 때문에 이사를 못 하게 된 수인에게 원망도 듣게 한다. 분양 홍보관으로부터 수수료까지 받은 혜정에게 수인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드림팰리스 스틸

 

  <드림팰리스>는 혜정의 합리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지만 그녀의 악행과 이기심을 열거하지는 더더욱 않는다. 산업재해 유가족들을 배신하고 합의금을 받은 데다가, 수인마저 합의금을 받고 나면 혜정과 수인의 남편들과 달리 하청업체에 속한 자식들의 죽음에 대해 진상규명을 하기 어려워진다는 유가족 대표 호섭(이대연)의 부탁을 거절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아파트 입주민들을 배신하고 할인 분양을 유도하며, 수인의 분양 수수료까지 챙긴 혜정에 대해, 오히려 그녀가 진정으로 우리가 말하는 악인인지 묻는다. 그리고 혜정이라는 인물 외에도 <드림팰리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도 과연 세상이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악인인지 묻는다. 오직 집값만을 위해 싸우고 입주민의 개별적인 사정은 무시하는 입주자 대표 인모(김용준)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분노를 혜정에게 표출하는 호섭의 아들 정환(류성록), 결국은 유가족들을 등지고 합의금을 받고야 마는 수인, 그리고 자신이 방화를 저지르고도 입을 다문 혜정의 아들 동욱까지. 정말로 이들이 악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드림팰리스>에서 악의 주체는 명확하다. 길성이라는 기업과 드림팰리스를 지은 건설사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혜정과 수인과 계약하고 합의하며 누군가 죽거나 다칠 때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호섭이 죽을 때까지 유가족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담은 CCTV도 보여주지 않고, 드림팰리스 바리케이드 앞에서 누군가 다칠 때까지 미분양사태를 입주민들과 협의하여 해결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건의 주체가 아니라는 듯 멀찌감치 서서 피해자들끼리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그들이 자멸하기를 기다린다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드림팰리스>가 그리는 현실의 그림은 <기생충>이 보여주었던 안온하고 불행한 두 세상의 경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한 세상은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들의 안온함이 무엇을 딛고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급에 관한 그림은 우화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현실의 옷을 입힌다. 정말로 악하지 않아서 악인이 아닌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악하지 않아도 되어서 악인이 아닌 것을 넘어서, 사회의 악의 주체를 명확히 가리켜 보이는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드림팰리스>에서 혜정은 여러 용서들을 한다.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위협했던 입주민 대표를 용서하고 입주민들과의 연대를 약속하며, 자신을 공격했던 정환을 용서한다. 마지막까지 공장에서 화재로부터 청년들을 구하기 위해 싸운 그녀의 남편처럼 말이다. 그녀가 선의 주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만큼 그녀는 악의 주체도 아니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다. <드림팰리스>는 이렇게 여러 인물들의 사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계급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안온한 세계는 결코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드림팰리스>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잊지 않게 해준다. 이것이 <기생충>과는 또 다른 <드림팰리스>의 미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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