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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지옥만세>: 오키오키, 지옥2023-08-25
<지옥만세> 스틸 이미지

 

 

<지옥만세>: 오키오키, 지옥

 

김현진 (시민평론단)

 

학교 폭력과 따돌림의 피해자인 여학생 송나미(오우리 배우)와 황선우(방효린 배우)는 아이들이 모두 수학여행을 떠난 동안 자살을 결심한다. 죽으려는 순간 그들을 괴롭혔던 가해자 박채린(정이주 배우)이 서울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다. 어차피 죽을 인생, 채린의 인생에 기스를 내겠다는 일념으로 두 소녀는 서울로 향한다. 채린의 인스타그램 속 여러 정보를 통해 채린을 찾아낸 나미와 선우는 당황한다. 선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을 벌하러 온 것이 자신에게 축복이라고 말하는 채린. 분명히 그 사람은 악마였는데 그 복수해야할 존재가 악마 아닌 존재가 되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지옥만세> 스틸 이미지


임오정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지옥만세>는 이야기의 측면에서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를 보여준다. 시나리오 작법 책에서 보통 주인공의 맞은편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존재를 적대자(안타고니스트)라고 한다. 이 영화에선 갑자기 적대자의 정체를 적대자가 아닌 것으로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주인공들끼리의 내적 갈등으로 옮겨가게 만든 다음, 적대자의 정체를 의심하고 그의 실체를 주시하는 일종의 미스터리 구조로 이야기의 방향을 바꾼다. 그런 다음 새로운 적대자를 등장시키며 이야기에 새로운 긴장감을 이어간다.

그 새로운 적대자는 바로 이 영화의 제목에 등장하는 단어 지옥이다. 좁게는 채린이 속해있는 사이비 종교단체 효천 선교회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넓게 보자면 이 영화의 세계관을 요약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학교에서의 물리적인 폭력, 종교단체에서의 구조적인 폭력. 그 아래에서 고통 받는 자들. <지옥만세>는 두 공간을 통해서 이 지옥을 형상화한다. 하나는 수안보의 쇠락한 와이키키 관광 호텔이다. 한때 온천으로 유명했던 곳이지만 이제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면서 폐허가 된 공간. 그곳에서 나미와 선우는 죽으려 하지만 곧 채린의 행방을 찾아서 서울로 떠난다. 또 하나는 효천 선교회다. 서울 을지로의 아세아 전자상가. 재개발을 앞두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그 쇠락한 곳에 실제로 교회로 사용하던 공간이 있었고, 제작진이 그 장소에서 그대로 촬영했다. 오래되고 낡은 폐허의 공간에 어두운 톤의 조명을 입히면서, <지옥만세>의 전반적인 화면의 톤은 주로 어둡고 무겁다.


<지옥만세> 스틸 이미지


<지옥만세> 스틸 이미지


<지옥만세>에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에 영감을 얻은 듯한 장면들이 보인다. 종교에 귀의해서 평온함을 얻은 가해자의 모습은 <밀양>에 있었고, 불타는 비닐하우스의 모습은 <버닝>에 있었다. 그러나 임오정 감독은 엉뚱하고 어설프지만 자신들만의 어떤 윤리를 지키려 하는 소녀들, 이 캐릭터들의 활력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여기에 배우들이 큰 기여를 한다. 큰 눈을 동그랗게 번뜩이며 세상 온갖 불만이 다 담긴 말투로 짜증 섞인 대사들을 연신 던져대지만 겁은 누구보다 많아 보이는 송나미를 연기한 오우리 배우와, 절제된 표정과 말투로 조용하지만 속에 굳은 심지를 가진 선우를 연기한 방효린 배우의 합이 특히 돋보인다. 정이주 배우는 선해 보이는 얼굴 뒤로 무언가 묘하게 차가움이 있어 보이는 채린 역을 잘 소화해냈다. 역시나 선한 얼굴과 평온한 말투로 사이비 종교의 궤변 같은 말들을 멀쩡한 사람처럼 연기한 박성훈 배우와 그런 종교의 잘못된 구조 속에서 주눅 들어가는 혜진을 연기한 이은솔 배우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지옥만세> 스틸 이미지


영화의 제목 <지옥만세>는 영화를 보고 나면 알겠지만 지옥을 찬양하거나 하는 뜻이 전혀 아니다. 차라리 저 제목은 지옥이 만년이 되도록 남아있든지 말든지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일종의 야유이자 반항이라고 생각한다. 오케이를 뜻하는 영화 속 선우의 대사처럼 오키오키, 지옥. 그까짓 지옥 얼마든지 와라. 이 얼마나 쿨한 태도인가.

지금껏 한국영화사에서 뉴웨이브라고 부를 만한 순간이 두 번 있었다. 1980년대 이장호 감독을 시작으로 하여 장선우, 박광수, 정지영 등의 신인감독들이 리얼리즘 영화를 들고 나왔던 시기.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감독이 등장했던 시기. 나는 한국영화사의 세 번째 뉴웨이브는 지금 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감독들에게서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독립영화부터 상업영화까지 지금 작품을 만들고 있는 여성 감독들이 결실을 맺는 전성시대가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본다. 임오정 감독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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