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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어공주 - 편견을 넘어 모험을 떠나는 미래의 에리얼202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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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 편견을 넘어 모험을 떠나는 미래의 에리얼
박예지 (2022 영화비평공모 대상 수상자)
어렸을 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고 자란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걸 넘어 어디에나 존재했다. 나는 디즈니 버전의 동화책을 전부 갖고 있었고, 문구점에 갈 때면 디즈니 캐릭터가 그려진 문구들을 샀으며 라디오에서도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제곡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하던 걸 잠시 멈춘 채 내가 본 애니메이션 속 장면을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내가 어린 시절 그토록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건 그게 일단 재미있고 노래가 좋았던 것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항상 호기심 많은 소녀였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건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였다. 그건 그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이전까지 살던 곳을 벗어나 모험을 떠나기 때문이었다. <인어공주>의 에리얼은 자신이 살던 바닷속 세상과 가족, 그리고 지느러미와 목소리까지 포기하고 지상 위로 올라가고, <미녀와 야수>의 벨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났다가 자신과 지적으로 통하는 야수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내게 중요했던 건 그들의 살결이 희고 얼굴이 예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걸 위해 과감히 자신의 세상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용기를 갖고 있는 여자들이라는 거였다. 그때 내가 본 동화책 속 에리얼의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문제가 됐을까? 에리얼의 피부가 검거나 아바타처럼 파란색이었어도 나는 똑같이 에리얼에게 이입해서 애니메이션을 봤을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우리가 어렸을 때 본 에리얼이 흰 피부를 가진 미녀였다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영화는 본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영화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게 더 의의가 있을 때가 있다. 이번에 실사화된 디즈니의 <인어공주>(2023)의 경우가 그렇다. <인어공주>(2023)는 에리얼 역에 흑인인 할리 베일리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진 순간부터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심지어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해시태그인 #NotMyAriel이 SNS를 한창 달구기도 했다. 캐스팅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요 주장은 이렇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고 자란 에리얼은 흰 피부에 붉은 머리를 가진 미인이지만 할리 베일리는 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 캐스팅의 문제는 할리 베일리가 단순히 ‘흑인’이어서뿐만이 아니라 ‘못생겨서’라고. 생각해 볼 것은 이게 누구의 입장에서 나온 말들이냐는 것이다. #NotMyAriel에 동참한 흑인 여자가 있을까? 또는 어린 소녀가 있을까? 할리 베일리가 ‘못생겼다’는 것은 누구의 미감에 의한 판단인가? 한편으로 #NotMyAriel의 반대편에서 SNS를 달구었던 흐름이 있다. 그건 할리 베일리가 ‘Part of Your World’를 부르는 티저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그걸 보고 흑인 소녀들이 뛸 듯이 놀라며 좋아하는 리액션 쇼츠 영상들이었다. 과연 디즈니는 누구를 타겟으로 이번 영화를 제작했을까? 누가 에리얼에 깊이 공감하고 그에 이입해서 용기를 얻으며 남은 생을 살아갈까? 디즈니의 여주인공 캐릭터는 성인 남성들의 즐거움을 위한 게 아니라 어린 소녀들에게 꿈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한스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디즈니의 1989년도 버전 인어공주가 소수자 코드를 가진 역사적인 작품이라는 점 또한 간과하면 안 된다. 퀴어 문학을 연구한 작가 릭터 노튼은 안데르센이 양성애자였으며, 그의 사랑 이야기가 인어공주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안데르센은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인 콜린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걸 알고 좌절해 인어공주를 썼다. 안데르센은 자신이 콜린에게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서 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사는 세계로 갈 수 있는 정상성을 ‘두 발’로 은유하여 인어공주 이야기를 만들었다.
1989년에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에도 숨겨진 퀴어 코드와 소수자 정서들이 있다.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 환상적인 넘버들을 작곡한 하워드 애쉬먼은 게이 정체성을 가진 작곡가였고 영화계에서 LGBTQ+의 아이콘으로 간주되는 사람이다. <미녀와 야수>의 공동감독인 커크 와이즈는 “디즈니 르네상스를 책임지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하워드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워드 애쉬먼은 음악을 작곡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어공주>의 마녀 우르술라의 캐릭터가 퀴어 코드를 갖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마녀 우르술라 캐릭터의 디자인은 <핑크 플라밍고>라는 퀴어 컬트 영화에 등장한 드랙퀸인 ‘디바인’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이번 실사영화 <인어공주>에서 우르술라역을 맡은 멜리사 맥카시가 1990년대 뉴욕에서 드랙퀸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배우라는 것은 디즈니가 우르술라 캐릭터가 가진 의미를 이어가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인어공주의 외모를 붉은 머리카락의 ‘진저’로 표현한 것 또한 당시 아이리쉬계가 차별받는 소수자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작 <인어공주> 디즈니의 <인어공주>는 각종 소수자 코드를 담고 있는 콘텐츠이며, 이 작품에서 흑인을 주연배우로 캐스팅한 것은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춘 디즈니의 행보라고 생각한다.
‘이 바다를 벗어나 저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어’라고 노래하는 소녀의 얼굴과 피부색을 평가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지금 이미 성인이 된 어른들이 과거의 기억 속 ‘피부가 하얀 미녀’ 에리얼을 실사화로 다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이 어떤 인어공주를 가슴에 품고 살아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번 실사영화의 에리얼과 왕자는 단순히 서로의 외모를 보고 반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을 가졌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사랑에 빠지며, 영화의 엔딩은 둘이 결혼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둘이 함께 모험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새로운 에어리얼이 아이들에게 준 영향은 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그 세상이 디즈니가 꿈꾸는 세상처럼 좀 더 차별과 편견이 없는 모습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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