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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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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무명의 청춘들, 빛나는 열정의 시간들202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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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보인간의 생존신고>: 무명의 청춘들, 빛나는 열정의 시간들
김현진 (시민평론단)
영화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는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에서 무명가수 이승윤이 우승을 차지하는 장면으로 시작하지만, 이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인 권하정, 김아현 감독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승윤의 팬들이 만든 영화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는 가수 이승윤을 ‘영업’하는 홍보성 영화가 아니다. 이승윤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에게 영감과 열정을 주는 뮤즈이자 조연이다. 뮤직비디오의 촬영이 모두 끝나고 이승윤이 감독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 영화의 성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처음 시작은 이승윤의 노래였지만, 진행될수록 이승윤은 안중에도 없고 본인들이 좋아하는 것, 하고 싶었던 것, 욕심내고 싶었던 것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 참 좋았습니다.” 이 영화를 단순히 한 무명가수에게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헌정한 열정적인 팬들의 미담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무명의 예술가들이 서로의 작품에 감동하고 거기에 더 힘을 받아서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가는, 예술가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존중과 격려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영화는 친구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출한 권하정, 김아현과 뮤직비디오를 같이 만드는 구은하, 이 셋은 뮤직비디오 컨셉 회의부터 의상과 헤어 컨셉 선정, 세트장과 스태프 섭외, 소품과 세트장 제작 등등 뮤직비디오 제작 전반에 걸친 모든 일들을 같이 해낸다. 이 과정에서 정말로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장난과 농담을 담은 웃기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사실 이 영화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승윤의 곡 ‘무명성 지구인’과 ‘영웅 수집가’에 대한 가사의 내용을 바로 알 수 없다는 점이 그렇다. 이승윤의 팬이 아닌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 노래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이 만드는 뮤직비디오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바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그 두 편의 뮤직비디오가 영화 본편에 포함되지 않고 일부분만 삽입되는 것도 아쉽다.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이라면 뮤직비디오의 결과물을 궁금해 하기 마련인데, 그걸 영화가 끝난 이후 유튜브로 찾아서 봐야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다룬 메이킹 필름의 성격에 충실하고자 뮤직비디오 본편을 편집에서 제외했다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튼, 이런 아쉬운 점을 잊을 수 있을 만큼 권하정, 김아현, 구은하 이 세 여성의 코믹한 장면들은 인상적이다.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서로의 아이디어에 대해 칭찬해주고,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서로 공감해 주고 격려하는 훈훈한 장면들도 서로 절친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MBTI 방식으로 말하자면 ‘F력’이 넘치는 영화랄까.
<듣보인간의 생존신고>라는 제목에서 ‘듣보’와 ‘생존’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개념이 하나 있다면 바로 무명(無名)이다. 유명(有名)의 반대말. 이 영화의 주제곡인 이승윤의 노래 ‘무명성 지구인’은 이 무명에 대한 노래다. ‘이름이 있는데 없다고 해/명성이 없으면 이름도 없는 걸까?’ 무명의 설움. ‘듣보’란 말은 아마도 여기서 온 게 아닐까. 이 말은 서글픈 말이다. 하지만 ‘생존’이라는 말이 이어지면서 희망적인 의미가 더해진다. 그럼에도 어쨌든 살아있으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응원이 되고 다시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다 같이 고생해서 찍은 뮤직비디오의 시사회가 끝나고, 이승윤은 주인공들과 헤어지면서 “우리 칠십 살 돼서 만나요.”라고 말한다. 가수 이승윤도, 영화인 권하정, 김아현, 구은하도 모두들 70세가 될 때까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부디 잘 생존했으면 좋겠다.
PS: 이 영화가 끝나면 이승윤의 ‘무명성 지구인’과 ‘영웅 수집가’ 뮤직비디오를 반드시 찾아서 봐야한다. 영화 본편에서 빠진 내용을 보충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재미있다. ‘무명성 지구인’이 저예산 가내수공업 스타일로 만든 소박하고도 귀여운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이라면, ‘영웅 수집가’는 뮤직비디오 전문 업자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거의 프로 수준의 영상미를 보여준다. 보고 나면 아마도 권하정, 김아현 감독의 행보를 기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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