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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거장이 아픈 과거를 위로하는 방법2024-01-24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전작인 <아이리시맨>(2019)에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오랜 폭력의 역사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나에게 <플라워 킬링 문>은 감독의 영화 인생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여는 첫 영화처럼 보였기에, 이 영화를 제작한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영화는 나의 의문에 정확한 답을 제시함과 동시에 나의 인생 영화 목록에 추가되었다. 특히 영화를 제작한 동기가 인생 영화로 선정한 대표적인 이유였다. 그의 인터뷰를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제작 동기는 바로 아픈 과거를 관객이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관객의 기억을 돕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감독은 관객을 오세이지 부족의 전통 제사로 초대한다. 제사를 이끄는 사제를 비추던 카메라는 사제로부터 점점 물러나며 제사에 참여한 인디언들의 모습을 비춘다. 제사 내내 사제가 읊조리는 기도문에는 자기 고향과 전통을 지키지 못한 오세이지 족이 느끼는 비참함과 죄책감이 사무쳐있다. 특히우리의 자녀들은 앞으로 백인들의 가르침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우리를 잊지 말라는 신을 향한 부탁이자 관객들을 향한 감독의 부탁이다. 아무도 몰랐던 이 비극을 관객들이 기억해야 함께 슬퍼할 수 있다. 그래서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전략을 세웠고, 그 전략은 성공했다.

 

 

제사에 사용된 파이프 담배를 땅에 묻는 순간 땅에서 석유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이어서 인디언 원주민들의 타악기와 피리 소리로 가득한 음악이 흐른다. 음악을 따라가면 석유로 인해 부촌으로 변한 오세이지 족의 마을이 나오는데,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했던 다양한 원주민들의 모습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디 하나 어설픈 구석은 찾아볼 수 없는 의상, 소품, 세트장은 사건이 발생했던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착각이 들 만큼 완벽하다.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허투루 쓰지 않고 하나하나 정성 들여 구현한 빈틈없는 세계는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그리고 관객이 사건에 집중하게 하는 요인이 더 있는데, 바로 최신 영상 트렌드를 벗어나는 느린 호흡과 전개이다. 짧은 시간에 소모할 수 있는 영상이 대세임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전개 속도는 상당히 느리다. 드라마 시리즈 몇 편을 연속으로 이어놓은 것 같다는 일각의 감상평이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감독은 느린 전개 속에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와 그들이 내리는 크고 작은 선택을 충분히, 그리고 자세히 담았다. 심지어 모든 사건의 중심인 가장 악한 인물이 누구인지도 영화 초반에 드러난다. 그래서 관객은 소수의 특정 인물이 아닌 사건 전체에 집중할 수 있다.

오세이지 족 원주민들은 현명하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결의에 찬 원주민들이 모여 부족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회의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나고 자란 배우 릴리 글래드스톤은 오세이지 족의 현명함과 강인함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몰리 역을 탁월하게 소화했다. 몰리의 현명함은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몰리와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단둘이 거실에 있을 때 갑자기 태풍이 불자, 몰리는 태풍 앞에서 잠잠히 침묵해야 한다며 자신을 얻기 위한 욕구로 가득한 어니스트를 진정시킨다. 그리고 어니스트가 접근할 때도 '코요테는 돈을 원하지.'라며 몰리는 그의 속셈을 이미 간파한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자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연에 무관심한 어니스트의 태도는 영화에 등장하는 백인들이 오세이지 족을 대하는 태도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몰리는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이다. 오세이지 족에게 닥친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몰리는 직접 사립 탐정을 고용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수도인 워싱턴 D.C.로 향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정치적 소수자인 오세이지족의 모든 희생은 끝내 묵살 당한다. 현명하고 강인한 몰리의 의지를 꺾은 시대 분위기는 몰리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관객의 작은 희망도 함께 꺾는다. 그리고 이 좌절감은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윌리엄(로버트 드니로)과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들을 대표한다. 윌리엄은 교묘한 술책으로 악을 지시하고 어니스트는 그의 명령을 이행한다. 두 사람의 역할은 다르지만, 내면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윌리엄은 오세이지 족을 진정한 친구로 여긴다. 그리고 어니스트는 아내 몰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오세이지 원주민의 목숨 값을 자신들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하게 여긴다. 이러한 모순은 명분과 행동의 괴리를 낳는다. '오세이지 족은 오래 살지 못 한다'며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그들의 재산을 빼앗는 가해자들의 모순은 어니스트가 몰리에게 매일 놓는 인슐린과 독극물이 섞인 주사로 대표된다. 가해자들이 벌이는 어떠한 폭력에는 영화적 쾌감이 거세되어 있다. 원주민이 총살당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가만히 고정되어 있고, 총을 든 사람들은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혼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어정어정 걸어가 방아쇠를 당긴다. 심지어 영화의 볼거리 중 한 축을 담당하는 건물 폭발 장면은 영상에 담기지 조차 않고, 폭발음과 함께 어니스트와 몰리의 침실 창문이 깨지는 장면으로 갈음한다. 그 대신 카메라는 폭발 직후의 시신들과 잔해들을 자세히 비춘다. 감독은 악인들을 프레임 안에 버려둔다. 관객은 화면을 통해 목격한 그대로 가해자들을 기억할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재판 장면이 끝난 뒤, 영화는 거장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연출로 마무리된다. 화면이 바뀌면 재판 이후의 상황을 재연하는 라디오 드라마 공연이 펼쳐지는데, 공연의 막바지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무대 위로 올라와 피해자와 가해자의 말로를 관객에게 직접 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독의 모습은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해 제사를 이끌며 기도문을 읊는 오세이지 족 사제의 모습과 겹치며 감독이 206분간 이어진 위령제를 이끌었음을 암시한다. 이 대목에서 영화의 끝에 감독이 직접 등장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출은 흔히 볼 수 없는 연출이기에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지만, 관객의 몰입을 깨면 안 된다는 할리우드 영화의 불문율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배우만 등장하던 영화에 감독이 나타나는 순간, 스크린 너머로 안전하게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는 기분이 사라지면서 관객은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이를 모를 리 없는 감독은 의도적으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며, 영화의 도입부에서 관객이 제사에 참여하는 기분이 들도록 연출했던 것처럼, 화면을 통해 비극적인 사건을 엿보던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 순간 <플라워 킬링 문>은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시대극으로 그치지 않고 슬픈 과거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가 된다. 그리고 거장이 세운 기념비는 영원히 피해자들을 위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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