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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시선
영화로운 시선은 영화의 전당과 부산국제영화제의 협업으로 탄생한 '시민평론단'에게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비평글을 기고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인데요.
부산 시민들이 영화 비평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활발한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합니다. 매월 개봉하는 대중영화와 한국독립영화를 바탕으로 게시되며,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 상징의 별자리,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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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름다운 상징들이 서로 부딪히고 깨져 다시 밤하늘의 별처럼 수놓아지는 눈부신 작품이다. 물과 불, 나무와 돌. 상승과 하강. 창조와 파괴. 뻔하고 투박하게 보일 수 있었던 흔한 상징들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손에서 만나 새로운 별자리를 창조해낸다.
주인공 마히토는 전쟁의 상처를 입은 소년이다. 큰 불길에 어머니를 잃고, 불은 마히토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마히토는 계속해서 불길에 사라진 엄마를 떠올리지만, 아버지는 시골에 내려간 뒤에도 그 불길의 원흉일지도 모르는 군수용품을 만드는 데만 힘쓴다. 아버지가 마히토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선택한 답은 자동차 등교와 기부금 따위다. 헤진 옷을 입고 농사를 하며 동원훈련에 투입된 친구들 사이에서 마히토가 설 곳은 없다. 친구들과 싸우지만 그렇게 얻은 육체적 상처들은 마음의 상처를 가릴만큼 충분히 아프지 않다. 이 순간, 마히토는 자신의 머리를 돌로 찍어 깊은 상처를 낸다. 충분히 아프기 위해. 이건 자신의 상처를 알아달라고 외치는 소년의 가여운 자해다. 영화의 말미에서 마히토는 이 흉터를 자신이 만들어낸 악의의 흔적이라고 얘기하는데, 놀랍게도 왜가리의 말이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은 마히토가 스스로의 악의를 세상에 드러낸 이후이다.
왜가리의 말은 엄마의 목소리로 머리에 남은 악의의 빈틈을 파고든다. 마히토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떠오르게 하는 왜가리를 죽이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심지어 왜가리를 잡으려다 환상에 사로잡혀 쓰러진다. 그런 마히토를 구해준 건, 새엄마 나츠코가 쏘아올린 효시다. 어떤 무기로도 왜가리를 잡을 수 없었지만 그 깃털을 주워 만든 화살(feat. 새엄마가 쓴 무기를 따라 만든 활)만큼은 끝까지 왜가리를 추격해 맞추는 모습이 나온다. 왜가리는 영화의 중반부에 거짓을 말하는 존재라고 일컬어진다. 이 장면은 마히토가 거짓을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을 맞출 수 있다는 또다른 은유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나는 엄마가 필요없어!’라고 생각하던 마히토의 거짓 말이다. 이런 상징들이 쌓여 마히토가 죽은 엄마를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엄마 나츠코를 구하기 위해 탑으로 향한다는 명분은 힘을 얻는다.
<물과 불> - 이쯤에서 다시 물과 불의 상징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불은 마히토에게 어머니를 앗아간 원흉이고, 모든 불행의 시작이다. 하지만 탑의 세계로 들어선 마히토가 가짜 엄마를 만지자마자 엄마의 형상은 흔적도 없이 물로 녹아 흩어진다. 물로 사라진 엄마는 마히토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을 사용하는 소녀 히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히미의 불은 와라와라와 펠리컨을 구분 짓지 않는다. 새로운 생명과 그것을 앗아내는 존재를 인지하여 불태우는 것이 아닌 오로지 생명을 위한 평등한 불인 것이다. 그렇기에 펠리컨을 묻어주는 마히토의 행동은 “와라와라를 죽이지 마”라고 말하던 마히토의 말과 “펠리컨을 무찔러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던 키리코의 시점을 넘어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탑, 누군가에는 저주받은 세계였던 탑이 마히토에 이르러 화해의 가능성을 싹틔우는 순간이다. 이후 히미의 불은 마히토를 구하는 데 쓰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불을 사용하는 장면은 마히토가 새엄마 나츠코에게 “엄마”라고 외치는 순간이다. 마히토가 나츠코를 새로운 엄마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수많은 터부(금기)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계속 문밖에서 거리를 유지하던 히미는 아들을 껴안으며 모든 금기를 불로 태워 없앤다. 이 장면은 미래의 엄마(히미)와 아들(마히토)의 첫 포옹이다. 새로운 생명을 위한 불꽃이자 누군가(펠리컨)에겐 저주받은 세계를 만들었던 불이 금기를 태우며 또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탑이 무너지고 그것을 휩쓰는 건 엄청난 양의 물이다. 그리고 그 물에 쫓기는 키리코는 작은 횃불 하나를 들고 서 있다. 키리코는 이 작은 불씨를 가지고 히미와 함께 자신이 있어야 할 탑 밖의 세계로 나선다. 다시, 순환이다. 물과 불로 이어지는 생명의 끝없는 순환.
<무덤과 사이프러스 나무> - 처음 떨어진 ‘아래의 세계’, 무덤의 문에는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고 쓰여 있다. 이 문구는 데미안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히토의 여정은 죽음을 배우는 과정이자 생명의 탄생을 향해 가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왜가리와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섬들에서 가장 크게 묘사된 이미지는 바로 ‘사이프러스 나무’다. 무덤에서는 고인돌을 닮은 커다란 돌 너머 하늘까지 솟아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있고, 키리코의 집에 자라난 사이프러스 나무는 달과 맞닿을 것 같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오랫동안 서양의 역사에서 현실세계와 영적세계를 연결해주는 문이자 죽음의 상징이었다. ‘아래의 세계’에서 사이프러스 나무는 죽음과 생명의 세계를 잇는 선이자, 와라와라들이 새로운 세상으로 가게 하는 이정표, 펠리컨들이 나아갈 수 없는 한계선이다. 그 선 너머 히미의 불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 영화는 반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려내듯 사이프러스 나무가 맞닿은 새로운 우주를 빚어낸다.
<돌에 관하여> - 영화에서 돌은 몇 번씩이나 언급된다. 탑의 주인에게 향하는 길이자, 금기를 둘러싸고 있는 방, “돌은 우리가 가는 걸 원하지 않아.” 같은 대사로도 등장하며, 무덤 앞 고인돌 같이 거대한 이미지부터 큰할아버지에게 가려면 밟고 가야 하는 돌다리 같은 소소한 상징까지 다양하다. 영화는 돌을 이용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탑의 세계는 모형으로 쌓아올린 돌로 만들어지는 세계이다. 마히토는 처음 할아버지가 준 돌들이 악의로 가득 찼다고 알아차리고 선택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마히토가 재능이 있다고 말하며, 마히토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완벽한 탑을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찾아낸 악의 없는 돌 13개. 할아버지는 다시 한번 그 돌들로 마히토가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마히토는 머리의 상처를 가리키며 자신에게 있는 악의의 흔적을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세계를 지탱하던 질서 중 하나인 앵무왕이 분노하며 돌을 쌓아올리고 자신의 칼로 책상을 내리친다. 세계는 무너진다. 견고했던 돌의 세계, 평화롭다고 믿어지던 세계는 무너지고 물에 휩싸인다. 영화은 계속해서 탑의 세계가 파라다이스가 아니라는 것을 비춰준다. 식인 앵무가 사는 평화로운 탑과 사랑앵무가 사는 전쟁 가득한 현실 중 어떤 것이 나은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다만 탑을 나오는 마히토의 손에 아주 작은, 악의 없는 돌 하나가 쥐어져 있을 뿐이다. 그 모든 여정을 기억하기 위해.
파고보면 수많은 이야기거리가 있는 영화. 시간이 부족해서 다 말하기가 힘든 영화. 어쩌면 난해하고 너무 어렵다고 볼수도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지막까지 하얀 돌멩이를 꼭 쥐고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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